성희는 오늘도 현준이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시선이 무겁게 아래로 떨어진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출근길 내내 적어 내려간 일정표가 쓸모없는 종이조각처럼 느껴졌다.
“내가 17일까지 그 돈이 꼭 있어야 한다고 했어? 안 했어?”
“..미안해.”
현준의 말이 그녀의 귓가를 날카롭게 찢는다. “17일까지 돈 가져오라고 말했지? 기억 안 나?” 이번엔 회사 프로젝트 비용이었다. 팀 재정을 관리하던 그가 급히 필요하다고 했고, 성희에게 먼저 입금해달라고 부탁해왔던 것. 그는 그 부탁을 성희니까 당연히 해줄 수 있는 일로 해놓고, 이제 와서는 그의 말이 곧 약속이었다는 듯 몰아붙였다.
그의 말은 차가운 온도였지만, 어쩐지 아주 뜨거운 열기와도 같이 성희의 바싹 마른 입술을 더욱 메마르게 하는 듯 했다. 그녀는 늘 그렇듯 자신이 뭔가를 실패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두 눈을 질끈 감고서는, 연신 "미안해"만 얼버무리고 있었다.
성희는 작은 출판사에서 교정·편집을 맡고 있었다. 누군가의 문장을 매만지고, 실수들을 찾아내고, 책의 외피를 다듬는 일이었다. 책과는 달리, 자신의 삶은 늘 어수선했지만, 그래서인지 성희는 교정의 일에서 묘한 쾌감을 얻곤 했다. 완벽하게 일을 끝내고 나면, 마치 인간으로서의 성희 자신이 완벽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의 뿌듯함이 몰려오곤 했다.
고요한 사무실에서 타닥이는 키보드 소리 사이로 선배들의 부탁은 늘 당연한 듯 건네졌다. “성희 씨, 이거 오늘 중으로 교정 좀?” “우리 회의 자료도 정리해줄 수 있어?” 그럼 성희는 늘 같은 말로 답했다.
“아 네.. 제가 할게요.”
이 작은 “네”가 처음엔 선의 표시였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지만 어느새 ‘성희라면 해주는 사람’이라는 규칙처럼 자리 잡았다. 그래도 묵묵히 해내었던 것은, 거절하게 될 이유보다 거절하지 않을 이유를 만들어내는 성희다운 모습이었다. 성희는 종종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곤 했다. 어쩌면 현준이 또한 그런 성희의 성향과 언제나 동의를 건내는 성희의 규칙을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이었지만.
성희가 특별히 현준에게 만큼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의 이해심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내비추는 것에 이유는 있었다.
“이거, 네가 좋아하잖아. 내가 사왔어.”
퇴근 길에 성희를 기다리고 있던 현준이가 건넨 따듯한 커피 한잔일 뿐이었다. 그 라떼를 건내 받으니 추운 날 한껏 추위에 시달린 성희의 손에 전해지는 행복감, 누군가 자신을 생각해줬다는 감동이 곧 감사함이라는 감정으로 변했다. 집과 회사만 오가며 살아온 성희에게 그 작은 친절은 충분히 성희의 마음의 문틈을 기어코 조금씩 열어 젖히는 듯 했다. 어쩌면 세상에게 받았던 차가웠던 냉기만큼이나 닫혀져 있던 성희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린 것이 지금의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현준이의 날카로운 첫 대사와도 같은 부탁이 시작 된 처음엔 작은 부탁이었다.
“성희야, 나 약속 있는데 데려다 줄래?” “전화 왜 한번에 안받아? 나 전화 늦게 받거나 안받는 거 싫어. 그러니 제때 받아”
그러나 부탁이라는 정중한 단어의 어감과 달리 점점 현준이의 말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만큼이나 현준이의 따듯함은 약소해져 갔다.
“내가 이거 하랬지.”
그 말은 사실 부탁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권리처럼 말해지는 부탁. 현준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성희의 품에 밀어 넣었고, 성희는 자신의 잘못도 아닌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책임을 떠안았다.
그녀가 처음 건넨 ‘선’이 어느 순간 그의 ‘권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성희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그가 이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이렇게 대해도 된다는 신호를 자신이 계속 줬다는 것을, 선한 마음으로 열어둔 문틈은 현준에게 더 많은 짐을 두어도 되는 창고로 변해갔다. 그 문틈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그가 성희에게 내맡긴 책임감도 같이 커졌다.
그녀는 그 문을 조금씩 열어주기만 했을 뿐, 때로는 가차없이 닫아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그녀의 따듯함을 기대하던 선함은 그의 욕심을 뜨겁게 키워댔고, 그녀의 애정어린 양보는 그의 무차별적인 권리를 키웠다. 그렇게 그녀의 조용한 희생은 그의 권리에 의해 성희라는 대상에 대한 통제력을 키웠다.
그렇게 성희가 건네었던 따듯한 선은, 왜인지 악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