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책을 챙기는 습관이 있어, 배우러 떠나는 이 일상의 여정에서도 예외 없이 책을 들고 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어떻게 책을 읽냐고 묻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익숙해지면 되는 것이다. 나는 대학 시절부터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며통학하면서부터버스에서 책을 읽는 것을어렵지 않게 여기기 시작했다.
어느 늦은 밤 간신히 막차에 올라탔던 때가 기억난다.
지금은 좌석버스 입석이 금지되었지만, 당시에는(라떼시절은) 서서 가는 것도 흔한 일이었으므로 그날도 사람들이 버스 통로에 꽉꽉 들어찼다. 나는 사람들에게 밀려 버스 맨 뒤까지 가서 밀려드는 술기운에 계단처럼 층진 발판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상태에서도 나는 기어이 책을 꺼냈다. 그때 읽던 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읽다만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던 탓인지 그 흐릿한 버스 불빛 아래에서 정신없이 책을 읽었던 밤이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 책은 벽돌처럼 두껍고 무거웠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책들을 늘 들고 다녔던 이유는, 책들이 내게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였기 때문이다.
방황하던 젊은 시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나에게 유일한 의지처는 책이었으며 또한 책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이었다.
지금나는 다시 버스 안에서 책을 들고 있다.
시간은 많이 흘렀으나 여전히 집과 학교를 오가며 책을 읽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때와 같다.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와 관련된 고민들이 나를 책 속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확실한 직업을 가지고도 왜 이토록 애써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려 하는지, 내가 과연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나는 자문하고 있다.
분명한 건 지금 나는 다시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와 달리 나는 이제 취해 있지도 않고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연약하지도 않다.
이 방황을 감당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고단하여 한숨이 그치지 않을 뿐이다.
이런 혼란이, 어쩌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끝끝내 책을 놓지 않게 한걸지도 모른다.
학교에 입한학 첫 달, 나는 버스 안에서 세 권의 책을 읽었다. (곽아람, 『공부의 위로』/ 타라 웨스오버, 『배움의 발견/ 최재천,『최재천의 공부』)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독서를 통해 나의 고민을 풀어보려 했다. ‘공부’와 관련된 책을 찾아 읽었던 이유는 이 혼란에 앞서 내가 공부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으며 이동하던 시간 끝에 나는 어렴풋이 공부의 본질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공부란 반드시 실용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무엇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억지로 몰아붙여서 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남의 의견을 좇아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또한 공부를 하는 과정 자체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체계화되어 있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은 불분명한 길이라는 것.
이러한 것들을 깨치게 해 준 책들 중 두 권을 아래에서 제멋대로, 간략하게 소개하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읽은 책은, 곽아람의 『공부의 위로』였다. 한때 고고학자를 꿈꾸던 저자는 내 안에서 공부와 관련된 소망을 흙더미 아래에서 발굴해 내주었다.
작가는 대학 시절의 공부와 관련된 경험과 느낌을 통해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들이 무엇인지 책에서 서술하고 있었다. 이 책은 대학 시절에 수강했던 강의 중 특히 ‘교양수업’에서 공부한 일들을 말하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런 수업은 취업과도 무관하고 때론 다소 쓸모없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 속에서 그 과정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우며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교양이란 완벽한 지식 체계가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하되 다른 세계가 틈입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교양이란 겹의 언어이자 층위가 많은 말, 날것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일, 세 치 혀 아래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넣어두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라고 서술했다.
중국어 수업을 듣고 싶으니 계절학기 수업 등록금을 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중국어까지 하려고? 하나라도 제대로 하지 그렇게 이것저것 해서 뭐 할래?”라고 했지만,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엄마. 일단 문을 열어놓는 게 중요해. 문을 열어놓으면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잖아. 대학교 때 조금씩이라도 이런저런 언어를 접해 놓아야지 나중에 사회인이 되어서 혹시 필요하게 되더라도 겁 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2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그 시절의 나, 정말 똑 부러지게 사리에 맞는 말을 했구나. 문만 열어놓고 발을 들이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P.142)
『공부의 위로』 저자는 책에서 타라 웨스오버의, 『배움의 발견』 책을 언급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 책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이 저자는 모르몬교 광신도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산속 깊은 곳에서 세상의 종말을 대비하며 16년 동안 기본적인 공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로 자란 소녀는 아버지와 오빠의 폭력 그리고 어머니의 방관 아래서 학대받는다.
그녀는 교육의 기회를 위해 투쟁해야 했으며 배움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던 야만과 무지의 집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과 만나고 나아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나간다. 결국 그녀는 독학으로 대학에 합격하여 케임브리지 박사가 된다. 충격적 이도록 가슴 아픈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실화이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간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하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 P.471)
그 순간까지 그 열여섯 살 소녀는 늘 거기 있었다. 내가 겉으로 아무리 변한 듯했어도 – 내 학업 성적이 아무리 우수하고 내 겉모습이 아무리 많이 변했어도 – 나는 여전히 그 소녀였다. 좋게 봐준다 해도 나는 두 사람이었고, 내 정신과 마음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 소녀가 늘 내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 집 문턱을 넘을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밤 나는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P.506~507)
타라 웨스오버의 교육으로 가는 투쟁과 그것들을 경험하면서 깨친 감정과 생각들은 나의 나태함을 흔들어 놓았다.
그 절절함은 무언가를 원하면서, 애써 태연한척이나 모르는 척하려는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것은 허위였으며, 나 자신에 대한 기만이었다.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쯤 나는 내가 서울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책장을 덮고 여기가 어딘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나는 내 앞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좌석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버스 앞 커다란 유리창으로 쭉쭉 펼쳐진 길을 바라볼 수 있었다. 길들은 망설임 없이 목적지로 이어져가고 있었으며, 버스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저 내 눈앞에 펼쳐진 인생을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이란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문을 열어놓고 있었으며, 그것은 내가인생의 길 위에서 다른 곳을 향해 가고자 함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다.그것을 이제야 겨우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다만 저 먼 곳을 관조하면서.
지금 나는 한 손에 지도를 붙잡고 내가 어딘가로 갈 수 있을지 막막해하며 글자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거리고 있다. 그러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된다면 한 뼘씩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뼘을 위해 나는 지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음을, 이제야 안다.
(※ 아리아드네의 실: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말로, 공주 아리아드네가 연인 테세우스가 괴물을 죽이러 가는 미궁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건네준 실타래다. 어려운 문제를 풀게 해주는 도구의 의미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