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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Feb 22. 2022

미술 시간

학교 다닐 때는 미술 시간이 너무 싫었다.


시간표에 맞춰 책과 과제물을 챙기는 것도 버거웠던 내게

붓, 팔레트, 물통, 벼루, 서진, 고무판, 조각칼…

갖가지 준비물이 더해지는 요일은 일단 귀찮은 날이었다.


1 더하기 1은 2, 3번의 정답은 5.

정해진 답을 뱉어내고,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1등을 하면 어깨가 으쓱하던 내게

하얀 도화지는 공포였다. 그 위에는 정해진 정답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약간의 흥미를 느낄 수 있던 건, 중학교 아크릴 회화시간이었다.

‘덧칠 가능’이라는 말에, 이판사판 내 자유로운 영혼을 캔버스에 쏟아부었던 순간.

지나가시던 옆반 선생님께 처음으로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마저도 동일한 그림으로 담당 선생님께는 B를 받으면서

미술은 내게 아리송한 과목, 못 하는 과목으로 남아버렸다.




마지막으로 미술 수업을 들은 지 20년이 훌쩍 지난 작년,

‘언니. 우리 다음번 만남에 이런 거 한번 해볼까요? ㅎㅎ’ 하며 후배가

‘플루이드 아트 클래스 소개’ 링크를 공유해 줬다.


미술 수업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유동성 있는 재료(아크릴 물감)를 이용하여 물감이 흐르는 우연적인 효과를 주는 예술입니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체험미술이자 힐링아트입니다.’

문구를 보고는 다시 한번 이판사판 자유로운 영혼을 캔버스에 쏟아붓자는 마음으로 좋아좋아를 외쳤다.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같은 계열 색깔들도 미묘하게 색감의 차이가 있으니까 도화지에 칠하면서 비교해 보세요.

종이컵에 색깔들을 섞어보세요.

테스트 캔버스에 물감을 부으면서 감각을 익히세요.

우연적인 효과를 주는 예술이니까, 과감하게도 부어 보세요.

이렇게 섞으면 결이 생기기도 해요.



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거나,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데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니

선생님의 설명을 따라 물감을 이리저리 섞고 붓는 것 자체가 참 즐거웠다.

같이 하는 동생보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없으니까

‘아, 같은 물감을 갖고도 우리는 이렇게 다른 작품을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은 나를 표현하는 활동이라는 걸,

그러니 그 자체로 나의 주관성이나 고유성을 체험할 수 있는 가치 있는 활동이라는 걸

아는 데 30년이 걸렸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점묘법의 의미도 모른 채 귀찮아하며 수백 번 넘게 점을 찍었던 시간,

석고를 깎고 또 깎아서 남들보다 훨씬 작아진 자화상을 만들던 시간,

비율이 엉망진창이었던 석고 대각면 데생 그리기 시간에

무거운 마음 내려놓고 깔깔깔 웃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내가 만든 플루이드 아트 작품을 방에 걸어두고

바다를, 백석을, 통영을, 후배를 생각하며 웃고 감사해한다.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ㅡ 백석, <통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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