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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는 이야기
by 은정이 Jan 03. 2017

이근삼의 <원고지>를 다시 꺼내 읽다.

감동을 받았을 때, 무서운 일이 벌어졌을 때, 죽이 잘 맞는 친구와 마음이 통했을 때, 아이들은 멈칫하며 

"소오름"

하고 짧게 내뱉었다.


1959년에 발표된 희곡 <원고지>를 가르칠 때마다 나는 아이들처럼 '소오름'하고 속으로 내뱉었다.


이근삼의 <원고지>에는 중압감에 시달리며 돈을 벌기 위해 원고를 번역하는 '교수', 교수가 번역하는 원고를 돈으로 환산하는 일에만 열중하는 교수의 '처', 부모는 자신들에게 돈을 대주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장남'과 '장녀'가 등장한다.


우리의 모습이 이들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작가가 50년 전에 제기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상실한 채 기계적인 삶을 사는 주인공의 인간 소외 문제가 50년이 지나도 날카롭게 파고들어 '소오름'을 게 만들었다.


살다가 종종 <원고지>에서 봤던 '신문기사'의 문구가 생생하게 떠오를 때면,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오름"하고 짧게 내뱉었다.


교수 : (신문을 혼자 읽는다.) 참 비가 많이 왔군. 강원도 쪽의 눈이 굉장한 모양인데. 또 살인이야. 이번엔 두 살 난 애가 자기 아비를 죽였대. 참, 지프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군. 지프차는 도망가 버리구. 이것 봐. 내 '개성을 잃은 노동자'라는 번역 책이 착취사(搾取社)에서 다시 나왔어. 이 씨가 또 당선됐군.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는데. 끔찍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또 매맞았군.

(처가 신문지를 한 장 다시 접는다. 날짜를 보더니)
처  :  당신두 참, 그건 옛날 신문이에요. 오늘 것은 여기 있는데.

교수 : (보던 신문 날짜를 읽고) 오라, 삼 년 전 신문을 읽고 있었군. 오늘 신문 이리 주시오. (오늘 신문을 받아 가지고 다시 읽는다.) 참, 비가 많이 왔군. 강원도 쪽에 눈이 굉장한 모양인데. 또 살인이야. 이번에는 두 살 난 애가 자기 아비를 죽였대. 참, 지프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군. 지프차는 도망가 버리구. 이것 봐, 내 '개성을 잃은 노동자'라는 번역책이 악마사(惡魔社)에서 다시 나왔어. 이 씨가 또 당선됐군.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는데. 끔찍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또 매맞았군.

처  : 참, 세상도 무척 변했군요. 삼 년 전만 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당신 피곤하시죠?

< 중략 >

장녀 : (신문을 읽는다.) 비가 많이 왔어요. 강원도 쪽의 눈이 굉장한 모양이에요. 또 살인입니다. 이번엔 두 살 난 애가 자기 애비를 죽였대요. 참 지프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답니다. 지프차는 도망가 버리구. 이것 봐요. 아버지의 '개성을 잃은 노동자'라는 번역책이 악마사에서 다시 나왔어요. 이 씨가 또 당선됐답니다.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군요. 끔찍도 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또 매맞았대요.  

교수 : 하룻밤 사이에 참 신기한 사건도 많아라. 세상이 그렇게 변해서야 어디 살 수 있겠니? 너 왼쪽 손에 들고 있는 종이는 뭐냐?
                                                                                                                                                                                                                                                                                                - 이근삼, <원고지>


2008년, 방화범이 지른 불에 남대문이 모두 타버리는 모습을 TV 화면으로 지켜보면서 "소오름"하고 짧게 내뱉었다. '지프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벌어지는 게 어처구니없어서.


2012년 12월 19일, 아버지를 부정하지 못하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던 날, "소오름"하고 짧게 내뱉었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을 해 먹은 '박 씨가 또 당선'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물려받을 재산이나 보험료 때문에 가족을 죽였다는 살인범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소오름"하고 짧게 내뱉었다. '두 살 난 애가 자기 애비를 죽이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게 너무 끔찍해서.


살인에 대한 소식은 우리에게 일상이 되었다. '또 살인이야'하고 말하지 않는 하루가 우리에게는 없다. 어처구니없고 끔찍한 사건들이 반복되어 일상이 된 것을 느낄 때마다 "소오름"하고 내뱉는다.


그런데 일상이 된 끔찍함을 너무도 태연하고 무감하게 받아들이는 자신을 느낄 때가 있다. 어처구니없고 끔찍한 소식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나를 인식할 때면 또 "소오름"하고 내뱉는다. 마치 내가, 삶의 부조리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느라 '반복되는 신문기사를 구별조차 못하는' <원고지> 속 인물이 된 것 같아서.



파리와 니스에 이어 베를린까지...

내가 다녀온 도시들에서 끔찍한 테러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파리에 다녀온 지 5개월 째가 되던 2015년 11월.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 무차별한 공격을 받고 죽은 130명의 소식이 내 일처럼 느껴져서 분노했다.

니스에 다녀온 지 1년이 조금 넘은 2016년 7월. 파란 니스 해변을 84명의 피로 물들인 테러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만난 얼굴들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다.

베를린에 다녀온 지 3개월 되는 2016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던 12명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이틀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고 시장으로 돌진하는 트럭에 깔려 죽어도, 점점 둔감해져서 '소오름'조차 느끼지 못하는 나를 위해 이근삼의 <원고지>를 다시 꺼내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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