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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는 이야기
by 은정이 Dec 05. 2016

잊히지 않는 한 마디 "똥색은 싫어요."

2016년 11월 29일, 마포역에서 영등포역까지 걸어서 퇴근을 했다.

해가 짧아서 한강의 아름다운 저녁놀을 기대할 순 없었지만 걸었다. 퇴근 직전, 순식간에 뱃속으로 들어온 짭조름한 고래 100마리(자갈치)를 운동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 걸었다.

뱃속에 들어온 고래들 중 적어도 30마리는 내 몸에 온기를 남기고 사라졌을 거라 기대될 때쯤,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역 앞의 나무 밑동에서 노숙인 한 명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무릎 사이에 두 손을 끼고 몸을 한껏 오그린 채 땅바닥에 누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냉기가, 자갈치 30마리가 남긴 내 몸의 열기를 뚫고 들어와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나를 포함해서 여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노숙인이 존재할까?

바로 옆 백화점에는 물건이 넘쳐나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땅바닥에서 떨어야 하나?


노숙인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질문을 던지며 무릎담요를 사기 위해 영등포 지하상가로 들어갔다.

머리로는 거창하게 <불평등의 대가>를 떠올리지만, 내가 나눌 수 있는 마음의 크기가 무릎담요 한 장 정도라는 걸 알기에.

무릎담요가 보이지 않아, 대신에 길고 도톰한 목도리 하나를 사서 올라왔다.


내가 봤던 노숙인은 다행히도 (죽지 않고) 서 있었고, 그 옆에서 두 명의 노숙인이 박스를 깔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급했던 마음이 다소 민망한 마음으로 바뀌어 쭈뼛거리며 노숙인에게 다가갔다.

소심하게

"저기요... 아까 너무 추워 보여서요... 이거 덮으세요..."

내가 목도리를 건네자, 노숙인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학생이에요? 돈 있어요?"

내가 의아해서 쳐다보자 노숙인은 또 말했다.

"이딴 거 필요 없어요. 먹을 거 사게 돈 있으면 줘요."

당황스러운 와중에 지갑을 열어 천 원짜리가 있나 살펴보던 내게 날아든 결정적 한 마디.

"나 똥색 싫어요. 이딴 거 누가 해요. 필요 없어요."


쩌억!!!

아까 노숙인에게서 내 몸으로 흘러든 냉기가 얼어붙어 갈라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조용히 지갑을 닫았다. 돈이 없다며 거짓말을 하고 돌아섰다.


전철 구석에서 울고 웃으며 미친년처럼 집에 돌아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고백했는데 거부당한 것 같은 기분, 왠지 모를 억울함, 시린 가슴 때문에 눈물이 찔끔 났다.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너도 집 나가면 노숙자라고 타박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의 패션 센스를 지적하던 노숙인에게 때 탈까봐 일부러 똥색을 고른 거라고 변명이라도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실 웃음이 났다.




며칠이 지났다.

종종 머릿속에서 "똥색은 싫어요."라는 메아리가 울릴 때마다 생각한다.

그 노숙인이 제정신은 아니었음을.

노숙인을 돕겠다는 호의의 저변에, 노숙자를 돕는 나 자신을 사랑했던 나르시시즘적 동기가 깔려 있었음을.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그 노숙인이 악인은 아니지만)라는 성경 구절을.


그러나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 도와줘 봤자 소용없어. 고마운 줄도 모른다니까."

"노숙은 일종의 병이래. 옆에서 도와주고 지원을 해 줘도 그 사람들은 또 나간다는 거야."

그동안 내가 듣기 싫어했던 이런 말들을 내 입으로 하지 않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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