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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헤라디야 Oct 31. 2023

오랜만에, 가을 감기

콜록콜록 켁켁 킁킁킁킁 삐거덕 삐걱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고 한다. 그럼 가을 감기는 여우도 안 걸리려나? 그런 뜬금없는 생각이 든 것은 아마도 감기약 때문에 정신이 살짝 몽롱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정말 오랜만에 가을 감기에 걸려 버렸다. 팬데믹 기간 동안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가을 감기에 걸린 기억이 없으니 마스크의 위력을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젯밤에 잠을 설치면서 생각했다. '내일은 왜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됐는지 적어 봐야지.' 그렇지만 오늘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오로지 감기뿐이었고, 그래서 '제가 감기에 걸렸어요' 하는 따분한 내용의 글을 쓰고 있다.


어제는 모처럼 낯선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주제넘게도) 조만간 공연에 참여할 기회가 생겨서 아침부터 악기를 챙겨 들고 대본 리딩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리딩 장소에 도착해서 인사하고 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꾸만 코가 흐르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최근 몇 주 동안 아침마다 알레르기 증상이 보이던 터였다. 진지하게 대사를 읽는 처음 뵙는 배우님들 앞에서 자꾸만 휴지를 꺼내 코를 닦으려니 매우 당황스럽고 민망했다. "공연하는 주에는 혹시 모르니까 알레르기 약을 먹어야겠네요." 그 정도로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리딩이 끝나서 집에 돌아오는데 자꾸 목이 깔깔하게 느껴졌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 뒤쪽이 긁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라? 이건 그냥 알레르기가 아니잖아? 딱 봐도 감기 느낌인데... 그렇게 느낌이 왔을 때 진작에 감기약을 먹었어야 했다. 물론 나는 그러지 않았다. 방심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의 특성상 일상의 습관을 벗어난 일은 종종 떠올리지조차 못할 때가 있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 역시 떠올리지 못하곤 한다. 예를 들어서 낮에 작업을 하다가 시간이 흘러서 저녁이 되고 주변이 어두워져도 일어나서 불을 켤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컴컴한 방에서 계속 자판을 두드리다가 문득 알아차린다. '아, 불을 켤 수도 있겠구나.' 때로는 식사를 깜빡하고 있다가 깨닫곤 한다. '아, 밥 먹은 지 24시간 넘게 지났네.'


* 미국에 사는 자폐증이 있는 친구가 내게 알려준 표현이 있다. 'autistic inertia'라는 용어인데 우리말로는 아직 정식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대충 설명하자면 자폐증이 있는 사람이 뭔가를 하고 있을 때, 혹은 뭔가를 하지 않고 있을 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현상이다. 내 경우는 정식으로 자폐증 진단을 받지는 않았지만 영어/한국어로 된 여러 건의 온라인 자폐증 테스트에서 자폐증 환자에 해당하는 수치가 나온 바 있고, 'autistic inertia'에 해당하는 경험을 여러 번 겪은 적 있다. *




오늘 저녁에야 감기약 생각이 떠올랐다. 테라플루를 뜨거운 물에 타서 호로록 마셨다.


그런 탓에 감기약은 생각조차 못 하고 평소처럼 저녁 약과 영양제를 먹고 침대에 누웠는데 이상하게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코는 계속 막혔다가 뚫렸다가를 반복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서너 시까지 정신이 반짝반짝하게 깨어 있었다. 휴대폰과 태블릿을 붙잡고 뭔가를 하다가, 또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다 포기하고, 또다시 휴대폰과 태블릿을 잡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간신히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났더니 이제는 어깨까지 아팠다. 정확히는 팔을 어깨 위로 올릴 때마다 아픔이 느껴졌다. 그래, 몸살 없는 환절기 감기는 말이 안 되지. 감기는 그렇게 친절한 존재가 못 되니까. 어깨도 삐걱삐걱. 목소리도 삐걱삐걱.


역시나 오늘은 온종일 목이 아프고 가끔씩 걸쭉한 기침이나 재채기가 나왔다. 목에서는 비릿한 맛이 올라왔다. 식사를 했더니 내려가다가 걸린 것처럼 영 더부룩했다. 이 얼마 만에 겪는 느낌인가. 어린 시절에는 여름에서 가울로 넘어가는 환절기마다 독한 감기에 걸려서 말을 하기조차 힘들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일은 사라졌지만 안 그래도 천식 병자인 나는 한 번 감기에 걸리면 오래 앓는 편이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고 침대로 갔더니 고양이들이 찰싹 달라붙어서 자고 있었다. 전기요를 켜고 옆에 눕자 고양이들은 내 좌우로 바짝 달라붙었다. 전기요보다 더 따스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전해져 왔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문득 생각이 났다. '아, 감기약!' 심지어 집에는 따뜻한 물에 타 마시는 테라플루 감기약과 예전에 직구한 알약 감기약이 충분히 있었다. 아,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 이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행히 약을 먹은 보람이 있었는지 기침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이대로 가면 내일은 조금 더 양호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욱 잘 보살피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고. 특히 독립을 선택해서 혼자 지내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몸이 좋지 않아서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순간이면 우리가 직접 그 누군가가 되어야만 할 때도 있다고. '혼자 살면 아플 때 손해 보는 느낌이야'가 아닌 '이런 순간이라도 어설프게나마 자신을 보살필 수 있는 내가 자랑스러워'라고 느끼고 싶다. 내게는 내가 있다. 그걸로 충분하면 좋겠다. (감기야, 떨어져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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