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로하엘린 Aug 27. 2024

핑크빛 자리

-매너에는 예외가 없게


몸 상태가 안 좋았던 어느 날 지하철에 탔다.

아쉽게도 빈자리는 없었고 내 앞의 임산부 배려석에는 젊은 여성이 앉아있다.

깔끔하고 세련된 복장과 꼬아 앉은 무릎 위에 다소곳한 프라다 백과 앞머리를 내리고도 풍성한 머리숱. 마스크를 쓴 채로도 미인이다. 임산부라고 하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그런 그녀가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다... 뻔뻔하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힐끔 바라보았는데 몇 정거장 뒤에 그녀가 내린다. 순식간의 사태 전환. 핑크빛 빈자리를 바라보다 2초 뒤 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임산부처럼 보이고 싶다는 찰나의 생각과 이어지는 부끄러움에 가방과 텀블러 백을 슬그머니 배 앞에 올려둔다. 태연히 앉아있던 그녀를 속으로 마음껏 손가락질하던 나는 2초 만에 위선자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그녀는 젊은 임산부였을 수도 있지만 나는 명명백백하게 임산부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앉아있던 그 젊은 여성이 유독 얄미워 보였던 것은 그 여성이 유독, 예쁘고 깔끔했기 때문일까?

그 자리에 임산부는 아니지만 후덕하고 후줄근한 어느 다른 여인이나 서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약골의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면 얄미움은 덜했을까? 겉모습으로 판단받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겉모습으로 사람 판단하기를 숨 쉬듯 하며 산다.


어쨌거나. 앉으니까 허리의 힘이 풀어지며 뻐근함이 사라지고 편안함을 느꼈다. 마음의 불편함보다 몸의 편안함이 더 큰 순간을 느끼며 한숨을 쉰다. 1초보단 길었던 망설임과 3초보다는 짧았던 타협.

나는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몇 분 전에서 너무 멀리 와있었다. 순식간에 마음이 변하고 상황도 변하고 또 다른 어떤 것도 변해버린다.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변명은 하고 싶은 마음으로 평소 이런 상황이 있을 때 나도 앉지 않고 자리를 비워둔다는 점을 알린다. 자리가 났어도 거기에 앉지 않을 때의 나는 부끄럽게도 잔잔한 우월감(당연한 것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확실히 부끄럽다)을 느낀다. 하지만 오늘은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았기에 예외적으로(예외란 말은 참 편리하다) 이렇게 내 몸뚱이의 편리를 위해 뻔뻔하고 무식해지기를 택하고 말았다. 자리에 앉은 나는. 이것은 진정한 내가 결코 아니라는 듯이 마음속부터 바리케이드를 친다. 앞에 선 사람들 혹은 건너편 혹은 옆자리의 사람들의 경멸이 담겼을지 모를 기운을 외면하면서 눈을 내리깔고 앉아 바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려 본다. 뭐 어쩌면 그들은 나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윽고 어느 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며 내 옆 일반석도 비자 나는 얼른 옆자리로 옮겨 앉았고 다시 두 정거장을 지나기 전에 그 핑크 자리는 60-7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와서 채웠다.

아까 느껴지던 얄미움을 그 순간 거의 느낄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지은 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할머니로 보일 수도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어찌 됐건 나는 앞으로 예외는 두지 말자고 다짐했다.



한 정거장보다는 길었고 두 정거장보다는 짧았던 핑크빛의 그 빈자리가 나를 철학케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