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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Nov 10. 2022

학원 가지 말고 나랑 놀자

함께 할 수 있을 때 오래오래 함께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나와 동생은 고3 시절 수시로 일찌감치 대학 합격을 했고, 그래서 우리 집에는 수능시험 경험자가 아무도 없다. 수능 시험은  이웃의 이야기일 뿐이었고, 그마저도 나이가 들면서는 매년 돌아오는 수능 날짜조차 아주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저 유난히 날이 추운 11월 어느 날 뉴스를 틀면 오늘이 수능이라는 소식이 쉴 새 없이 나오고, 매년 수능날은 야속하게 추운 건 변함이 없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은 고3으로 보이는 학생들만 보면 내 마음이 괜히 뭉클해지곤 한다. '수능이 얼마 안 남았으니 부담감이 심하겠다'같은 안쓰러움에서 시작해,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에게 그저 교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속으로 뜨거운 응원과 격려를 자꾸만 외치게 되는 것이다. 저 아이들이 입은 교복을 언젠간 내 아이들이 입을 테고, 저 아이들이 앞두고 있는 수능시험이란 거대한 벽을 우리 아이들 또한 마주할 운명임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굳이 고3이 아니어도 나는 교복 입은 학생들만 보면 안쓰럽고 응원해주고 싶고 함에 괜히 뭉클해지곤 한다. 공부가 뭐기에, 대학이 뭐기에, 10대의 에너지를 공부에만 소진해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이제는 더 이상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내 아이들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현진이가 갑자기 친한 친구 몇몇이 다니는 수학학원을 본인도 다녀보고 싶다고 말했다. 학원에 전화를 해보니 테스트를 봐야지만 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하기에, 오늘 테스트를 보러 난생처음 '수학학원'이라는 곳엘 가봤다. 솔직한 첫인상을 말하자면, 내가 학생이라면 결코 다니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은 곳이었다. 정말로 열심히 수학 공부만 해야 할 것 같은 곳, 내 옆자리 친구보다 더 잘해야만 할 것 같은 곳. 정작 현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나는 입구에서부터 지레 겁을 먹어버렸다.


현진이는 곧바로 테스트를 보겠다며 신나게 교실로 들어갔다. 분명 현진이가 교실에 들어가기 전 선생님께서 테스트는 30~40분 정도 걸린다고 하셨는데, 현진이 15분 만에 교실을 뛰쳐나오는 것이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나에게 따라 나오는 선생님께서 '검토 한 번 해보자고 했더니 다 맞았다고 안 한다네요~'라고 하시며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이셨고, 현진이는 덧붙여 '엄마! 되게 쉬워! 나 다 맞았어!'라며 들어갈 때보다 더 신이 나 춤을 춰댔다. 물론 다 맞지 않았다. 몇 개가 틀렸고, 그중에는 정말로 대충 보고 풀었구나 싶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현진이가 아주 잘하는 친구이긴 하지만 많이 덜렁댄다며 그럴수록 아이들과 함께 차분히 하는 수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기로 했다. 매일 주어지는 숙제의 양에 놀란 현진이가 바로 기브업 선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나도 딱히 보낼 마음으로 테스트를 봤던 건 아니라 흔쾌히 오케이를 외쳐 주었다. 물론 막상 수업을 듣다 보면 재미있을 수도 있고, 학원을 다니며 실력이 향상되면 지금보다 더 흥미를 느낄 수도 있고, 그 외 내가 모르는 장점들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직 아이를 공부와 경쟁의 공간으로 떠밀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더 잘하고, 더 인정받고, 그래서 더 편해질 수도 있는 나중을 위해 일곱 살 아이를 일찌감치부터 학원으로 내몰아 각 잡고 공부를 시키기엔, 내가 현진이랑 더 놀고 싶어 도저히 안 되겠다. 다행히 현진이도 그냥 엄마랑 공부하고 싶다는 말로 나와 같은 마음임을 드러내 줬고, 현진이가 또다시 학원을 가고 싶단 말을 하기 전까지는 당분간 우리에게 학원은 없을 예정이다.




현진이는 몇 달 뒤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처럼 성적으로 줄 세워 보여주는 시험은 없어졌다지만, 그래도 수능을 향한 레이스에 올라탄 이상 현진이의 능력치는 당연스레 자주 평가받을 것이다. 평가를 위해서는 경쟁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내가 뭉클해하던 지나가는 동네 고3 학생이 어느샌가 현진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밤늦게까지 공부를 할 테고,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고, 더 잘하기 위해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는 10대의 삶을 현진이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나랑 놀았으면 좋겠다. 고등학생이 되어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왜 일찍부터 좋은 학원을 알아보고 계획을 짜서 선행을 시키고 심화학습을 시키지 않았는지를 원망하기도 한다는 말을 더러 듣곤 했다. 현진이가 절대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못하겠다. 그래도 지금은 나랑 공부하고 나랑 놀았으면 좋겠다. 지금 나랑 보내는 많은 시간이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하고 신났으면 좋겠다.


수능이란 거대한 벽을 앞두고 힘들고 지치고 우울해지는 순간, 현진이에게 무엇이 도움 될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더 좋은 학원, 더 좋은 선생님, 더 많은 공부량, 결국은 더 좋아진 성적... 내가 찾은 답은 그것이 아니다. 가족. 가족과 함께한 행복한 기억, 점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가족의 확고한 사랑에 대한 믿음. 나는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현진이와 쌓아가는 우리의 시간은 분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그 시험을 마주하며 종종 지치고 힘들 현진이의 마음에 커다란 도움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수능을 앞둔 모든 아이들이 노력한 만큼의 제 실력을 발휘하면 좋겠다. 가족들의 굳건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실수에도 좌절하지 않고 의연하게 끝까지 시험을 마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이 수능시험을 마치는 그날까지 아마도 나는 매년 교복을 입은 아이들만 보면 짠한 마음으로 응원을 할 테다. 그리고 현진이가 앞으로 수없이 마주할 온갖 시험을 앞두고 나는 늘 초조하고 안쓰러워하고 울컥하고 대견해할 것이다. 당연한 듯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질 그날이 오기 전까지 안쓰러워하고 대견해하기보다는, 난 그냥 마냥 예뻐만 하고 싶다. 잘 놀고 많이 웃고 싶다. 왜 진작 선행을 시키고 학원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의 무게가, 왜 더 많이 함께 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의 무게보다 결코 크지 않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러니까 후회하더라도 덜 후회하기 위해 나는 현진이랑 지금 잘 놀아야겠다. 이왕 우리가 학원을 포기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더 오래 갖기로 결정한 만큼, 언젠가 시작될 바쁜 공부의 나날이 오기 전까지는 좀 더 신나게 함께 놀아봐야겠다.


아들! 우리 내일은 같이 뭐 하고 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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