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이의 여자 친구가 바뀌었다. 반은 다르지만 집이 가까워 사적으로 자주 만나던 A에서, 같은 반에서 매일 마주치다 보니 어느 순간 급속도로 가까워진 B로. 요즘 B와 특히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선생님을 통해 들었으나,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옮겨가는 줄은 몰랐었다. 어느 날 유치원을 다녀온 현진이가 '나 이제 B랑 결혼하기로 했어!'라고 외치는 순간 나는 헛웃음부터 났다. 아이들은 심지어 결혼을 약속했다던 여자 친구마저 이렇게 호떡 뒤집듯 쉽게 바꿀 수 있단 사실이 귀엽고도 놀라웠다.
현진이는 어느 일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오늘 B랑 결혼하는 꿈을 꿨다며, 내일 유치원에 가면 A에게는 결혼을 취소하자고 말하고 B에게는 나랑 결혼할 건지 의사를 물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여린 일곱 살 여자아이의 마음이 혹시라도 다칠까 걱정돼,다 같이 좋은 친구이니 굳이 취소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현진이를 말렸더랬다. 그런데 그간 A의 마음도 비슷했던 건지 며칠 뒤 같은 반 다른 친구랑 결혼하고 싶다며 결혼을 취소하자는 말을 A가 먼저 꺼냈단다. 현진이는 아주 신나는 마음으로 '그래!'를 외치고 그 길로 B에게 결혼하자고 얘기했고 B는 단박에 승낙했다. 아이들의 결혼 상대가 순식간에 바뀐 전말이다. 상처받을까 걱정했던 어른의 마음이 무색하게도, 쉽고도 간편하게 말 한마디로 아주 쿨하게.
만약 나였다면, 내가 현진이었다면, 아무리 마음이 B로 옮겨가고 있었더라도 결혼을 취소하자는 말을 상대에게 먼저 들으면 괜히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을까. 나도 같은 마음이었는데 엄마가 말리는 바람에 '너보다 다른 친구가 더 좋아졌어'라는 말을 먼저 들은 것이 분하지는 않았을까. 현진이는 달랐다. 굳이 자존심을 내세울 것도 없이 친구가 같은 마음이었단 게 반가웠을 뿐이었다. 나라면 충분히 속상하거나 상처받았을 일이 아이에게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일이었단 사실에, 실은 속으로 여러 번 감탄했다. 쉽다. 참 쉽다. 앞으로도 그렇게 쉬웠으면. 구태여 깊고 어두운 곳까지 파고들거나 계산하고 해석하고 곱씹지 말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쉬웠으면.
가끔 현진이가 장난을 치거나 본인의 분노를 표현할 때, 너무 얼토당토않아서 차마 교정해주기도 어이가 없는 무례가 묻어나는 순간이 있다. 묘하게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마음먹고 상대를 공격하려 내뱉는 말은 아니라, 굳이 그 말을 지적하는 내가 더 치사하고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말. 나는 그것이 아직 어리고 깨끗한 아이의 마음이라 가능한 날 것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굳이 내가 바로잡아주지 않아도 자라면서 그 말은 자연스레 정제될 것이다. 그럼에도 현진이가 더 많이 자라 내 앞에서 말을 거르고 있음이 확실하게 느껴지면 몹시 서운할 것도 같다. 내 아들이 컸구나. 굳이 여러 번 거르지 않고 돌려 말하지 않던 너의 어린 말들을 이제는 들을 수 없구나. 나와의 말이 옛날처럼 쉽지는 않아졌구나.
당연한 일에도 서운해지는 엄마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실은 특히 나에겐 더 그렇다. 나는 유독 말에 예민한 사람이라, 쉽게 툭툭 내뱉는 다른 사람의 말이 가슴에 깊게 박히고 오래 남는다. 상대의 말투가 조금만 달라져도 생각이 많아지고, 용인할 법한 거친 말에도 쉽게 얼굴이 찌푸려지고, 기분을 나쁘게 하려는 목적이 확실해 보이는 못된 말은 마음에 짙은 흉터를 낸 채 한참을 머물곤 한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현진이가 나에게 말을 할 때의 미세한 변화도 쉽게 알아차릴 것이고, 그래서 쉽게 아쉬워하거나 서운해 할 수도, 별 것 아닌 말에도 혼자 곱씹으며 거듭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바라고 있다. 현진이가 이것만은 나를 닮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으면 좋겠다고. 현진이의 말이 정제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라지만, 현진이가 하는 말과는 별개로 다른 사람의 말에는 여전히 쉬운 마음이면 좋겠다. 결혼을 취소한단 말이 아무렇지 않았던 것처럼, 다른 친구들의 NO가 잠깐 서운하고 마는 별 것 아닌 일인 것처럼, 남자 친구들의 거친 말투가 종종 웃겨 죽는 일인 지금처럼, 현진이가 다른 사람의 말에는 늘 쉬우면 좋겠다. 들리는 말이 쉬우면, 현진이도 다른 사람을 너무 많이 생각하느라 하고 싶은 말을 지나치게 거르지만은 않을 테지. 나에게는 없었고 그래서 때때로 힘들었던 '거침없음'이 현진이한테는 보일 수도 있을 테지. 그렇게 늘 바란다. 쉽길. 별 것 아니길. 금방 잊어버리길.
오늘 현진이는 새로운 여자 친구인 B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B의 엄마가 준비해주신 마카롱을 함께 만들고, 방문에 '들어오지 마시오'를 써붙인 채 문을 꼭 닫고 한참을 놀기도 하고, 아빠들을 불러 게임을 하기도 했다. 친구와 함께 하는 내내 현진이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다른 친구의 상처가 걱정돼 여자 친구 바꾸기를 말렸던 내 모습이 민망할 정도로 둘은 아주 잘 맞았다. 너희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었는데. 더 잘 맞는 친구를 찾았단 건 어쩌면 축하해 줄 일이었는데. 현진이가 거침없지 못하게 막을 일이 아니었는데. 이젠 그러지 말아야겠다. 노는 모습을 보아하니 현진이와 B의 사이는 꽤 오래 돈독할 것 같지만, 혹시나 현진이가 마음을 훌떡 뒤집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걱정하지 않고 '파이팅!'을 외쳐줘야겠다. 현진이 앞에선 나도 쉬워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