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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버들 Apr 07. 2022

연분홍 연필깎이

   


중학교  1학년쯤 연필깎이를 선물 받았다. 연분홍의 작은 연필깎이는 너무 귀엽고 이뻤다. 형부가 외국 출장을 다녀오면서 사 온 연필깎이는 나에게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80년대 초반 나라 경제가 일어나기 시작할 무렵 우리 집도 조금씩 살림이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리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때까지도 연필깎이를 가져보지 못했다. 대부분 학생들은 검은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접이식 칼(도루코 문구도 새마을 칼)을 필통에 다니고 다닐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부모님한테 연필깎이를 사달라고 말한 기억이 없다. 그 외에도 특별히 무엇을 사달라고 떼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말수가 적었고 수줍음을 많이 탔다.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교과서 몇 페이지 읽어보라고 하면 나는 책을 더듬더듬 읽었다. 공포 그 자체였다. 다 읽고 자리에 앉으면 그때부터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에 방망이질하는 것처럼 쿵쾅거렸다. 참 바보스러운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두렵고 수줍음이 많았을까. 아마도 어린 시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성격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연분홍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었다. 삭삭 부드럽게 깎아져 나갔다. 연필은 지그재그 무늬를 만들며 깎아지는 껍질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은 채 아래통으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뾰쪽하면서 날렵한 모습을 한 연필심. 날카로운 연필심의 끝 깔끔하다. 필통 안에 예쁘게 깎인 연필을 가지런히 넣으면서 기분이 한껏 좋아졌던 기억이 난다.  왠지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선물 받은 연필깎이는 채 몇 달도 안되어 사라졌다. 함부로 의심해서는 안 되지만 그날, 친구가 간 뒤로 연필깎이는 볼 수 없었다. 우연히 반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와 같이 놀게 되었다. 친구에게 연필깎이를 보여주면서 자랑을 했을 것이다. 나에게 귀한 물건이었기에. 친구가 집으로 돌아간 후 책상 위에 있어야 할 연필깎이가 보이지 않았다. 내 성격에 말을 할 수 없었다. 심증은 있었는데 물증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친구 집에 놀러 가서 확인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그 친구 집으로 놀러 갔다. 시장 한가운데 가게 뒤쪽에 있는 작은집이었다. ㅁ자 모양에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작은 방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사는 것 같았다. 우리 집보다  형편이 더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친구의 방으로 들어가 살짝살짝 두리번거리면서 눈으로 연필깎이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끝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친구는 연필깎이를 보이는 곳에 놓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필기도구들이 흔하게 넘쳐날 때가 아니었다. 외제 필기도구는 더더욱 귀한 대접을 받을 때였다. 친구가  보이는데 놨다면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어디서 난 것인지 물어봤을 것이다.

   

그 이후, 난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몇 번 만져보지도 못한 귀한 연필깎이가 사라진 후 친구를 친구로 보지 못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초중고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도 기억 못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친구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다. 어쩜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친구를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그때의 연필깎이만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연필깎이를 사용한다. 10년째 사용하고 있는 젖소 무늬의 귀여운 연필깎이는 아직까지도 큰 고장이 없다.  자동보다는 수동이 좋아 수동을 사용한다. 샤프, 볼펜 등 다른 필기구도 많지만 간혹 연필로 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어 돌린다. 돌아가면서 드르륵 소리와 함께 깎아지는 느낌이 좋다. 깎아진 검은 심을 본다. 창처럼 날카로운 연필심 끝을 종이 위에 댄다. 



머뭇거리며 검은 심은 무엇인가 쓰고 싶어진다

걸어가는 어린 여자아이 종아리에 박혀 흑연의 검은 점을 찍어본다

타투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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