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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버들 Jun 23. 2022

걷다가  잠시 겨울 제주역에 머물렀다


여기에 있다. 걷고 걷다가 여기에 머물렀다. 세명의 여자는 시간의 흐름에 우연히 어쩜 필연으로 이곳에 도착했다.  발길이 곧 여행이자 순례가 된  그녀, 문학을 사랑하여 시인이 된 그녀, 시라는 판도라 상자 때문에 생각에 빠진  그녀. 성격도 색깔도 다른 그녀들. 그렇게 세명의 여자는 보름간의 시간을 공유했다.




숙소는 산속의 한가운데. 지중해풍으로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열쇠를 꽂아 열었다. 연 순간 특유의 숙박 집 냄새가 났다. 겉과 마찬가지로 나비의 양각 무늬 그리고 가구가 없는, 가구의 형태를 가진, 벽과 서랍이 붙어 있었다. 주인장은 예술인이라고 한다. 어떤 예술인인지는 모른다. 다만 예술 감각이 좀 남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여기서 시간과 공간을 소유하게 되었다.


밤새 눈이 내렸다. 겨울, 자주 내리지 않는다는 곳에 눈이 내렸다. 푹푹 쌓인 눈 속에 두 발을 찍어본다. 선명한 발자국의 흔적, 오롯이 그 시간만큼 눈을 걷어냈다. 뒤를 돌아보니 눈이 하얗다. 30cm 깊이의 발자국을 따라 고양이가 폴짝 뛰어 그 구멍으로 따라온다.  이 집에 살고 있고 고양이. 이름은 ‘먼지’, 이름 참 이쁘다. 먼지는 가까운 사람들보다 살을 맞대고 사는 사이보다 더 가까이 소리 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더 성가신 먼지이다. 털어도 치워도 그 자리에 있고 쌓이고 어느새인가 사라진다. 가끔 묶은 때처럼 억지로 그 자리에 붙어 있는 먼지는 얄궂다.


어쩜 이곳은 먼지 같은 숙소인지 모르겠다. 많은 손님이 거쳐 가는 곳. 행복, 추억, 서운함, 미련 등을 담고 또는 놓고 가는 곳. 다시 올 수도 있고 기억의 한 가닥에 작은 점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장소. 먼지가 따라온다. 배가 고파서인지 아니면 사람이 그리워서인지 알 수 없지만 먼지를 본다. 조금의 먹을거리를 주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쳐주었다. 눈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먼지 옆을 지나는 개 한 마리가 나를 본다. 순하게 생긴 진돗개, 개 이름은 ‘모모’.


모모가 앞에 앉는다. 배가 불룩하다. 배 속에 새끼가 있다고 한다. 한 마리가 아닌 듯 배는 불규칙하게 튀어나와 있다. 새끼로 인해 얼굴이 작아진 모모에게 먹을 수 있는 것을 주기 위해 주방을 훑어보았다. 바닥과 하나인 일체형 테이블 위에  참치 통조림 두 개가 있다.  약간에 고민 후 저녁 김치찌개를 포기했다.  통조림 하나를 집어 뜨거운 밥을 말아 모모와 먼지에게 주었다.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다.  자기 그릇을 깨끗이 치운 모모는 먼지의 밥도 차지해 먹는다.


제주, 눈길을 내며 달렸다, ⓒ 홍홍


삼 일째 눈이 내린다. 눈사람을 만들었다. 길을 내었다. 눈길을 달렸다. 여기는 우리나라가 아닌 듯 눈의 세상이다. 도시와 다르게 제설작업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아 길도 들도 산도 눈으로 덮여 있다. 이 눈이 녹으면 2주의 시간과 공간도 같이 녹아내릴 것이다. 먼지와 모모의 시간도.




잠시 머물렀던 그녀들의 시간도 투명한 눈 결정체가 되어  소복이 쌓이고 녹아내린다.  조용하게, 각기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꿈과 미지의 곳으로. 제주 기차역 플랫품에 그녀들의 발자국만 남긴 채.




* 사진 1. 알베르토 자코메티 < 걸어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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