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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Feb 03. 2019

오슬로의 우울

#6 노르웨이 미술의 중심







오슬로 국립 미술관 미술관 내부.

실내 디자인은 오래되었지만 정갈하고 따뜻한 톤의 분위기다. 

140년이 넘은 건물이라고 하기엔 관리가 무척 잘 된 상태였다.  

플래시를 터트리지않는 촬영은 가능하며 많은 홀마다 도슨트와 경비들이 지키고 있다. 


그림값이 어마어마하거니와 우리나라처럼 그림 앞으로 가지 않도록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지 않아서 이토록 살벌한 경비가 필요한 것 같아 보였다. 



입구 천장에는 자연광이 들어와 채광이 우수하도록 설계되어있고 바로 아래의 바로크 양식으로 보이는 구조물도 인상적이었다. 

이 곳에서 밤까지 있을 수 있다면.

세계의 명화들에 둘러쌓여 고개를 들면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황홀한 경험이 가능하겠지, 란 엉뚱한 상상이 스친다. 

어느곳을 여행하던지 밤하늘을 보고싶다는 욕망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먼저 뭉크와 함께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작품 아픈 소녀(sick girl, 1881)가 눈에 띄었다.

 
이 그림은 19세기 중, 크리스티아나(현재 오슬로)를 휩쓸었던 폐렴의 놀랄 만한 직접적 기록이다. 어린 소녀의 병약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누구에게나 죽음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이 그림은 마치 사진처럼 보이는 사실적인 화풍을 통해 이 시기의 노르웨이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창백함이 날카롭게 서 있는 이 그림이 이 소녀의 영정앞에 놓이지 않았었기를.'


아픈 소녀의 두 눈 밑에 보이는 붉은 자국이 소녀가 들고있는, 잘려지고 시들어 잎을 떨구는 분홍 장미와 묘한 동질감으로 엮여지며 이미 죽어 없어진 그림 속 소녀에게 동정어린 감정을 갖게 만든다.



설명서는 섬세하면서도 간단하게 부착되어있다. 

Olaf schou, 올라프 쇼 라는 사람이 1909년에 기증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아마도 fra이란 단어는 from의 노르웨이어가 아닐까?

기증자의 이름도 적혀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찾아보니 gave는 give의 과거분사가 아니라 gift의 노르웨이어였다. 





*INFO 크리스티안 크로그 (CHRISTIAN KROHG 1852.8.13 ~ 1925.10.16)

크로그의 명성은 나중에 노르웨이의 가장 위대한 화가가 되었던 제자 에드바르드 뭉크의 명성에 가려졌다. 1909년부터 1925년까지 오슬로 미술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뭉크를 가르쳤던 크로그는 뭉크의 스승이자 좋은 조언자였다.특히 뭉크의 그림 <아픈 아이>(1885)가 누나 소피의 죽음에 대한 화가의 감정을 심리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을 때도 크로그는 뭉크의 편이 되어주었다. 사실주의와 사회주의적 경향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빈민이나 병자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사회의 취약한 부분을 묘사했다.     



뭉크의 그림과 더불어 보고싶었던

하랄드 솔베르그의 여름밤. (캔버스에 유채. 114x136cm. 1899년)
밤에 대한 사진과 그림에 유독 애착이 있는 나는 이 그림을 평소에도 무척 좋아했었다. 

인간의 삶의 터전에서 바라본 대자연의 밤. 
 
솔베르그는 아마도
잠이 오지 않는 초여름의 저녁,
울타리엔 제라늄이 만발하고 창틀엔 담쟁이가 오르는
이 아름다운 테라스에 앉아 옆엔 내린 커피를 두고 가끔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자신의 하루를 마감케 해주던 밤을 붓으로 한땀한땀 묘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100년 후.
티비와 스마트폰, 또 무섭게 돋아난 콘크리트 숲이 앗아간 
이 그림을 마주하는 우리 현대인들의 저녁을 그때의 그는 상상해 낼 수 있었을까. 

계속해서 추구했다면 보다 낭만적이었을,
100년 전 솔베르그가 추구했던 자연적 삶이
삭막함에 갇혀 낭만까지 일회용이 되어버린 우리 현대인들에게 온전히 전가될 수 없을까. 


*INFO 하랄드 솔베르그 HARALD SOHLBERG 1869년 ~ 1935년
솔베르그는 크리스티아나(현재 오슬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바람대로 1885년 장식화가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고자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890년 스벤 요르겐센에게 사사하면서, 그는 풍경에 심오하고 독창적인 느낌을 공개했다. 대부분을 자연 속에 혼자 은둔, 처음에는 니테달, 여름에는 오스트레 가우달에서 점묘주의를 실험했다.
1895~1896년 파리와 독일 바이마르의 프리토프 스미스 아래서 풍경화에 집중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았다. 솔베르그는 1891년 결혼, 아내와 노르웨이 중부 산 지역에서 살면서 「론덴산의 겨울 밤」 첫 작품을 시작했다.
1902년부터 구리 광산지 러로스와 조그만 마을 차링빅에 안주했지만, 1910년 크리스티아나로 완전히 옮겼다. 여러 변형으로 그린 「론덴산의 겨울밤
(1913~14)」를 마침내 완성하고 노르웨이와 샌프란시스코의 전시에서 각각 금상을 받았다.  





<뭉크 [Madonna 2] 유화 91x70.5, 1894~1895>


그리고 드디어, 뭉크 관. 

사랑해마지않던 그림. 
뭉크의 마돈나를 만났다.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

그가 기침처럼 내뱉었던 고백은 그가 유년기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이, 아니 우리 인간의 삶이 죽음과 긴밀하게 맞닿아있음을, 여러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되었음을 함축하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았다 여겨진다. 

과거 예술과 미술에서의 마돈나는 성스러운 대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내가 생각하는 마돈나는 섹슈얼리티와 죽음을 함께 지니고 있는 죽음의 여신이요!" 라는 개인적 견해를이 그림을 통해서 선언하고 있다.   



"당신의 입술은 잘 익은 과일처럼 분홍색을 띠고있다.
쾌락의 고통 때문인지 당신은 살짝 입술을 벌리고 시체처럼 미소 짓는다. 
이 순간 생명은 죽음과 악수하고 지나간 세대와 미래 세대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다" - 뭉크




성과 죽음 그리고 탄생은 어디가 끝이고 처음인지 알 수 없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 처럼 연결되고 순환되고 있음을 그가 겪은 삶으로, 그가 한 말들로, 그가 그려낸 여러 그림들로 증명된다. 

뭉크의 마돈나는 채색석판화 버전으로 하나 더 존재하는데 죽음과 탄생이 섹슈얼리티에서 부여된다는 그의 관점을 석판화 왼편에 작게 해골같은 태아를 그려 넣음으로써 좀 더 부각시켜 놓았다.

그 석판화는 오슬로 뭉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뭉크의 필체, 싸인>


싸인의 색, 필체에서도 그의 성격이 묻어나는 것 같다. 



액자에 부착되어있는 명판을 보니 아니, 여기에도 '올라프 쇼'가 기증했다는 글이 적혀있다. 

찾아보니 올라프 쇼는 1900년대의 미술품 수집가였으며 뭉크의 작품을 비롯해 노르웨이 화가의 작품 115점을 노르웨이 미술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뭉크 작품의 80%는 민간인이 기증했다고 하니, 

비록 역사가 길지않은 나라지만 풍부한 예술과 문화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을,

이것이 나라를 아끼는 국민들의 큰 공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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