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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Jun 04. 2024

서퍼스 파라다이스


  ‘도대체 숙소는 언제쯤 나오는 거지?’


  재이는 금방 나올 줄 알았던 숙소가 보이지 않자 조바심 나기 시작했다. 시드니에서 골드코스트까지 야간 버스로 밤새 달려왔다. 시내에서 다시 서퍼스 파라다이스 숙소까지는 조금만 걸으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그 방향으로 걸었다. 하지만 밤새 불편한 잠을 잔데다 메마른 땡볕에 캐리어까지 끌면서였다. 고작 20분을 걸었는데도 진이 빠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지도를 다시 펼쳤다.      


  ‘분명히 이 방향으로 직진이었는데….’     


  그때 작게 눈에 띄는 숫자가 보였다. ‘2.5km’ 너무 작은 지도에 더 작은 글씨라 미처 보지 못했다.    

 

  ‘하….’     


할 말을 잃었다. 호주 여행 책자에서 이 지역 정보는 몇 페이지에 불과했다. 이제 와 택시를 타자니 아깝기도 하고 버스를 타자니 무슨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할지 막막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충동적으로 시작한 여행이었다. 비행기에서는 꿈이 실현된다는 기쁨에 설레었지만, 막상 여행이 시작되니 언어소통 문제로 머리가 먼저 아팠다. 익숙하지 않은 여정은 몸을 빠르게 지치게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주변에 물어보기로 했다. 그때 건널목에 서 있는 푸근한 인상의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KFC 앞에 세워놓은 할아버지 모형이 떠올랐다.     

 ‘익스큐즈 미, 아이 원투 고 히어….’     


재이는 최대한 순진하고 간절한 표정으로 지도의 한 지점을 보여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 히어! 흠…. 유 칸트 고 히어 온 풋’     


 그는 지도와 그녀, 그녀의 가방을 번갈아 보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아마도 걸어서는 못 간다는 말 같았다. 잠시 고민하더니 여기저기 손짓하며 아까보다 훨씬 빨리 말하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건 포스트오피스, 하우스, 카. 뭐 이런 말이었다. 멍해진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그는 다시 ‘마이 카’라고 강조하고는 맞은편 길 너머를 가리켰다. 아마도 차로 데려다준다는 말 같았다. 재이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미 더위에 지칠 대로 지친 터라 친절한 느낌을 믿어보자며 따라나섰다. 큰길과 작은 길을 지나 맨션처럼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차가 거기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는 다시 멈춰서더니 손으로 위쪽 층수를 가리키며 차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집에 가서 차를 마시자는 건가?’     


 그제야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녀의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부터는 온갖 상상이 시작됐다. 친절한 할아버지가 돌변하여 칼로 위협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차, 생각해보니 호주는 총기 사용 국가다. 한방이면 끝이다.     


 ‘띵!’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는 바로 앞집을 가리키며 자기 집이라고 했다. 문이 열리자 안은 작고 단출한 그저 평범한 집의 모습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더니 싱크대로 가서 정말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홍차였다. 하지만 재이는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안에 수면제를 탔을까 싶어 마시는 시늉만 하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로이’라고 소개했다.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영국에서 태어났고 일본에서 평생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토익 듣기 테스트 같은 그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손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혼자 신이 나 말하던 ‘로이’라는 남자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고는 ‘풋’하고 웃었다. 아마도 재이의 그런 모습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레츠 고’      


 짧게 말하더니 다시 그녀의 캐리어를 들고 주차장으로 갔다. 10여 분가량 걸려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며 재이는 얼른 작별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는 숙소 앞까지 굳이 짐을 끌고 가더니 데스크 직원 앞에서 체크인까지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직원에게 그녀를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전했다. 올해 서른인 재이는 그 말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옆에서 보니 그는 다시 켄터키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로이’는 직원에게서 종이와 펜을 빌리더니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 재이에게 전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는 말과 함께였다.


스트리츠 비치_호주정부관광청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짐은 둔 채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힘이 쭉 빠졌다. 생각해보니 ‘로이’라는 사람은 그저 혼자인 시간이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와의 일들이 현실 같지 않았다. 재이는 한 달 전만 해도 평범하게 회사에 다녔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그녀는 낯선 나라에서 고아가 된 것 같았다. 쉬는 동안 멋지게 살아보고 싶어 선택한 이곳이었다. 여행프로그램을 보며 호주, 그것도 아름다운 해변이 끝없이 펼쳐진 서퍼들의 천국이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그 안에서 바다를 즐기는 자기 모습도 상상했다. 서프보드와 검게 그을린 사람들을 보며 재이는 그제야 자신이 수영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제 그녀에게 천국은 돌아갈 집이었다. 

끝.

 


*** 성북문화원 문예창작 수업에서 합평을 받아 마지막 단락을 삭제했습니다. 도움을 주신 남명희 선생님과 글 동무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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