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가려고 하는 지향점은 어디일지
지난 한 해 동안 5도 2촌 생활을 했다. 주중 5일은 도시에, 주말 2일은 시골에 사는 것이다. 꽤 먼 거리였지만 주말이면 여지없이 시골로 향했다. 도시와 시골을 왔다 갔다 하면서, 두 공간의 격차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두 공간에선 다른 방식으로 소비생활을 하게 된다는 걸…
단적으로, 시골에서 무지출은 어렵지 않다. 물론 시골에도 택배가 되고, 차를 타고 나가면 얼마든지 마트나 시장에 갈 수 있으니 소비를 하자면 불가능하진 않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무얼 사지 않아도 그런대로 마음의 갈등 없이 잘 지낼 수 있다.
시골집에 들어가기 전에, 주말 먹거리를 준비하면 주말 내내 무지출 하며 지낼 수 있다. 아니, 무지출로 지낼 수밖에 없다. 일단 마을에 들어가면 무언가를 사기가 힘들다. 근처에 편의점이나 마트가 없으니 소소한 물품 하나가 필요하다고 해서 훌쩍 갔다 오기엔 부담스럽다.
물론 배달도 되지 않는다. 치킨을 집에서 먹으려면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먼저 이웃 중에 치킨을 먹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본다. 시내에 있는 치킨집에 전화를 걸고, 차를 타고 나가 30분을 달려 픽업을 하고, 다시 돌아와 이웃에 배달을 한 후, 차갑게 식은 치느님을 영접(?) 한다. 이 길고 긴 절차를 떠올리자면, 그냥 집에서 해 먹자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배달음식은 집밥을 해 먹기 귀찮을 때 선택하는 것인데, 이건 배달음식 먹는 게 더 귀찮으니 집밥을 선택하게 되는 상황이다.
아이들도 물론 무얼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사탕이나 초콜릿 하나를 사자면 차 타고 30분을 달려 나가야 한다는 걸 아니까 말이다. 그래도 간식이 먹고 싶으니까, 과자 대신 라이스페이퍼를 튀겨 먹거나 우유에 꿀을 타서 달달하게 마시곤 했다. 과일도 더 많이 먹게 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시골에서는 무지출하는 것이 아주 쉽다. 그야말로 ‘시스템적으로’ 무지출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도시는 무지출이 불가능한 환경이다. 가는 걸음걸음마다 소비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상업지구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나마 한적한 편인데, 그럼에도 무지출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 꽤 힘들다.
집 앞에는 적당한 크기의 마트가 있고, 유명 브랜드 빵집이, 무인 문구점이, 그리고 커피 전문점이 나란히 붙어 있다. 마트에는 갓 조리한 치킨, 돈가스, 새우튀김, 잡채, 연어초밥, 김밥 등이 매대에 늘 올라와 있어 슬쩍 들어 장바구니에 넣으면 바로 먹을 수 있다.
빵집에는 입에 베어 무는 순간 달달함이 온 입안을 감도는 부드러운 다양한 빵이 가득하다. 무인 문구점에는 필요는 없지만 괜히 하나씩 사고픈 아기자기한 물품이 가득하다. 커피 전문점에서는 커피 향이 퍼져 나오고, 내가 좋아하는 카페라테가 항시 대기 중이다. 이 작은 상가 하나에도 이렇게 살 거리가 그득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24시간 운영되는 무인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있다. 정말로 싼 가격으로 제공되는 갖가지 아이스크림. 하나하나 고르다 보면 어느새 한 봉다리(?)를 집어 들게 된다. 겨울철 붕어빵 트럭도 그 앞에 자리를 떡하니 차지를 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 집은 그 유명한 ‘붕세권(?)’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모퉁이를 돌면 편의점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이쯤 되면 아이는 초콜릿과 작은 장난감이 함께 들어 있는 간식을 사지 않고 이 거리를 지나칠 수가 없어진다. 사고 싶은 마음이 폭발하고, 그걸 좌절시키면 엄청난 울분이 터져 나온다. 나도 안다. 그 마음을… 나도 사고 싶거든.
그 모든 장소를 뒤로 하고, 단 하나의 물품도 사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는 건 ‘미션 임파서블’을 능가한다. 아무것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정신을 한 데로 모아야 한다. 달달함과 고소함과 바삭함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몸이 그것들로 몸을 채우라고 아우성쳐도 외면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가끔 도시에서 무지출을 하는 건 ‘정신 수행의 과정이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정신을 갖기 위해 매 순간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정신수행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의문이 올라오곤 한다. 기독교에서는 구원과 사랑, 불교에서는 깨달음과 자비를 추구한다. 짠테크를 하며 지출하지 않는 고행은 결국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맨 처음 가계부를 왜 쓰려고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내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자유’를 얻고 싶었다. 특히 돈에 있어서. 돈에 휘둘리지 않고 구애받지 않으며 살고 싶었다. 돈 때문에 내 삶의 여정이 바뀌지 않길 바랐던 것이다. 돈 때문에 비참해지지 않길, 돈 때문에 원하지 않는 상황에 처해지지 않길.
그렇다면 가계부를 쓰고 지출을 하지 않으면 자유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일상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아직 오지 않은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며 위안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거는 것이 남는 게 아닌 걸까.
이 두 가지의 길 앞에서 마음이 이리 기울기도 하고 저리 기울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자꾸 무언가를 사라고 갖은 수단을 이용해 부추기고, 또 한쪽에서는 더 큰 부를 이루기 위해서 아껴야 한다고 말한다. 두 가지의 길 모두 돈을 중심에 둔 길이다. 이 두 트랙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 걸까?
내 마음은 아직 두 트랙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 돈을 떼어놓고 살아가는 일상을 상상하기 어렵고, 앞으로의 내 장래도 돈을 기준으로 결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그 답을 제시하긴 어려울 것 같다. 가계부를 쓰는 것이 삶을 행복으로 데리고 갈지, 당장의 행복을 앗아가는 소외의 도구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가계부를 써 나가고 있는 것일까? 이 가계부가 나를 날아오르게 하는가, 나를 짓누르고 있는가.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이 또한 가계부를 쓰면서 얻은 질문이니, 가계부를 써 나가면서 답을 구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