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는 경계 없는 생활 속에 심리적 테두리를 만들어 준다
출근 시간도, 마감 시한도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뭔가 부족해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고민일 수도 있겠다. 일을 다 그만두고 나니 ‘데드라인’이라는 것이 없어졌다. 정해진 출근 시간도, 제출 마감 시한도, 회의 일정도 없어졌다. 아이 학교와 어린이집을 잘 보내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프리’ 그 자체다. 각종 집안일이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꼭 그날 다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내일 해도 되고, 그 다음날 해도 된다. 집 안이 조금 지저분해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다. 출근을 안 하니까 씻어도 되고 안 씻어도 된다. 육아 친구를 만나면 좋겠지만, 꼭 정해진 시간에 만나야 하는 건 아니다. 기분에 따라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지 않을 때 안 해도 된다. 특정한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정주부의 가장 큰 메리트가 아닐까… 싶지만, 이런 특성 때문에 가정 주부는 또 한 번의 시련을 맞이 하게 된다.
얽매인 시간이 없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이 없어진 건 아니다. 집안 청소와 빨래, 요리 등은 기본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행정일이 은근히 많다. 세금 납부나 은행 업무, 각종 물건을 수리하거나, 보험을 청구하거나 육아와 관련한 정보를 얻는다거나 하는 것이 모두 신경 쓸 일이다. 꼭 오늘 해야 하진 않지만 하지 않으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 집안일이다. 하나하나 쪼개서 보면 어렵지 않은 일인데, 한데 뭉쳐지면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는 큰일이 되어 버린다. 신기한 것이 일을 할 때는 이 모든 일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모든 일을 그만두고 난 후에 더 어렵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시간이 많아졌으니 더 여유롭고 편하게, 더욱 잘 이러한 일을 잘 처리해야 하는데, 일을 그만두는 동시에 이러한 모든 일도 하기가 싫어진다. 더 정확히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게 된다.
일을 할 때는 오히려 잡생각이 없어서 좋았어
그러고 보니, 외부에서 정해준 스케줄로 움직이는 것이 스트레스를 유발하긴 했지만, 그만큼 삶에 긴장감을 제공하고 잡생각을 많이 줄여 주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 가서 정해진 일을 해야 하는 것에 온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다른 고민은 하지 않게 되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아무런 제약이 없이 자유로운 것이 좋기만 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난 자유를 원한다고 하지만, 정말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는 걸까?
아무런 경계와 규칙 없이 하루가 멍하니 흘러가는 걸, 나란 사람은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매일매일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고 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정신은 더욱 분주하고 몸은 더 축 가라앉았다. 생활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가계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매듭을 짓고 싶었다. 나 스스로에게 ‘오늘 하루 이만큼 살았어.’라는 신호를 줄 필요가 있었다. 지난 시간이 그저 덧없이 흘러가지 않았음을 물질성을 가진 대상을 통해 확인해야 했다.
가계부 쓰는 시간 하루 5분의 위력
사실 하루에 가계부를 쓰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5분을 넘지 않는다. 이것도 신기하게 여겨질 테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정리되는 느낌이 든다.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 되면, 7일간의 결산을 하고, 한 달이 지나면 월말 결산을 한다. 월초가 되면 고정비를 정리하며 한 달을 시작하고, 또 하루, 일주일, 한 달 단위로 결산을 한다. 이렇게 짧은 매듭과 매듭을 만들며 생활의 리듬을 만들어 간다. 나는 돈이 얼마 모이는가 보다, 이렇게 서핑하듯이 삶의 리듬을 타며 사는 게 재미있었다. 이러한 반복이 삶에 적당한 변화와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또 하나 가계부를 쓰면서, 생활의 한계를 만들어 사는 것이 의외로 심리적 안정에 도움을 주었다. 감에 의지해 충동적으로 돈을 한정 없이 쓸 때는, 돈을 최대한 아껴 쓴다고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돈을 잘 쓴 게 맞나?’, ‘이 정도 쓰는 게 적당한 것이었나?’, ‘너무 많이 쓴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걱정을 했다. 하지만 애당초 기준이란 게 없었으니, '잘 쓴 게 맞는지', '아낀 것인지 아닌지'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내가 참여하게 된 가계부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하루에 쓸 수 있는 금액을 정해 그 안에서 생활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내가 정한 하루 살기 금액은 2만 원이었다. 여기엔 식비와 외식비, 생필품이 포함된다. 일주일이면 14만 원의 돈이 할당된다. 맨 처음엔 이 돈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마트에 한 번 가서 장을 보면 무조건 십만 원은 훌쩍 넘지 않았던가. 그리고 매일 자잘하게 사는 것이 있다. 얼추 계산해 봐도 일주일에 14만 원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런데 계산해 보면, 이렇게 사용한다 해도 한 달에 70만 원을 식비와 생필품비로 할당하게 된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하루 2만 원 안에서 살기 시작했다. 맨 처음엔 적응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돈을 못 쓴다고 생각하니까 길거리에 먹고 싶은 게 더욱 눈에 들어왔다. 떡도 먹고 싶고, 만두랑 떡볶이도 먹고 싶었다. 닭강정도 먹고 싶고, 빵도 사 먹고 싶어졌다. 이렇게 보니, 정말 거리엔 먹을거리 파는 곳이 많았다. 많은 혼란을 겪고 난 지금 하루 2만 원도 너무 여유롭다고 느껴진다. 물론 하루 2만 원이 넘을 때도 있지만, 다음 날 소비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충을 한다. 그렇게 조절해 가면서 소비를 다듬어 갔다.
규칙과 한계가 있는 삶이 더 나아, 단...
한계가 없이 사는 것이 편하고 좋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이렇게 정해진 규칙과 한계가 있는 것이 더욱 편하게 여겨졌다. 이렇게 정해진 수순대로 돈을 정리하고 주어진 한도가 명확해지다 보니, 돈에 대해 신경을 거의 쓰지 않게 된 것이다.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 거니까 불안해할 필요도 걱정할 여지도 없어진 것이다. 돈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니까, 자연히 정신적인 에너지가 세이브되어 다른 일에 더욱 집중할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러한 글쓰기 같은 것에…
가계부를 쓰는 건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물론 현재 가계부 스터디 모임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이곳의 규칙을 지켜야 하지만, 누가 여기에 가입하라고 한 적이 없다. 언제든 탈퇴가 가능하기도 하다. 그저 나 스스로 규칙과 한계를 정해서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유를 이용해 스스로의 약속을 세우고 지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활의 리듬과 절제가 오히려 나에게 쉴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선사해 주었다. 가계부 쓰기는 나에게 마음 놓고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든든한 테두리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