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생활에 대한 환상 플레이
숲에서 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코로나가 시작되고 캠핑을 자주 갔다. 캠핑이라고 해 봐야 친정아버지 벌장에 가서 텐트 치고 자고 오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말이다. 친정아버지께서는 양봉을 하신다. 포천에 산을 가지고 있는 친구분의 땅을 빌려서 벌을 치고 계신다. 바쁠 때는 잘 가보지 않았었는데, 코로나 시국에 딱히 갈 곳이 없어지자 벌장에 자주 놀러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나면 기분이 새로워졌다. 산에 도착해서 몸 써서 텐트 치고, 마을 근처 한 바퀴 산책을 돌면 굳었던 몸이 풀리는 듯했다. 저녁에는 지붕이 없는 야외에서 불 피워 고기랑 마시멜로우를 구워 먹었다. 하늘의 별도 보고, 바람도 쐬고 나면 일주일 동안 얹혔던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이렇게 하는 것도 좋은데, 아예 산속에서 살면 기분이 더 상쾌해지지 않을까. 시골에 가기로 막상 결정을 하고 나니까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시간이 날 때마다 시골 생활에 대한 영상을 감상하였다. 아름다운 전원 풍경, 여유롭게 맛있는 것을 요리해 먹는 모습, 텃밭에서 채소를 심어 거두는 모습… 그 모든 것이 평화롭고 좋아 보였다.
한적한 곳에서 간소하게 살면, 삶의 무게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육아에 대한 중압감과 돈에 대한 걱정,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나무와 풀과 흙의 생명력이 나에게도 와닿아 나의 괴로움을 안아주지 않을까.
내가 숲을 찾아간 것은 삶의 본질적인 모습들만을 마주하며 인생을 보다 진지하게 살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내게 가르치려 한 것들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권혁 편역, 2015, 처음 읽는 월든, 돋을새김, 55쪽)
소로는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숲을 찾았다고 했다. 본질이란 무엇인가. 있으면 좋은 것은 모두 떼어내고 난 후 남겨진, 없어선 안 되는 것의 모둠이다. 엉뚱한 것에 현혹되어 시간과 노력을 쏟지 말고 정말 중요한 것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한 최적의 장소가 바로 ‘숲’이다. 숲에는 진짜 무언가 있는 것일까? 숲에 가면 삶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고 깨달음을 얻고 더욱 진정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이미 오랜 시간 숲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미 도인이 다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과연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나도 그들과 같아질 수 있을까. 어떻게 살게 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일까.
기다리는 동안 여러 상상을 해 보았다. 자연과 함께 어울리면서 평화롭고 소소하게 보내는 일상을 말이다. 최소한의 짐만을 가지고 소박하게 살림을 해 볼 것이다. 간소하지만 맛있는 음식도 해 먹으면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뛰어놀고, 아토피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너무 많은 기대일까.
우선은 지쳐있는 나의 마음이 쉴 수 있길 바랐다.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숙제가 하나 있었다. 마을에서 쓸 별명을 정해야 한다. 이 마을을 소개해준 지인의 별명은 ‘앤’이다. 옛날부터 빨강머리 앤이 좋다고 했었다. 남편의 별명은 ‘켠’인데, 본명을 빨리 발음해서 붙인 별명이다. 그 옆집에 사시는 분의 별명은 ‘전사’이다. ‘싸움을 좋아하나?’ 싶었지만, ‘마법전사 미르가온’에서 ‘전사’를 따왔다고 했다. 남편의 별명이 ‘마법’이다. 아이들은 따로 별명을 붙이지 않았는데, 실제 아이들 이름이 첫째 아들 ‘미르’, 둘째 딸 ‘가온’이다. 이렇게 지었지만 이름이 참 예쁘다. 그 옆집에 사는 분의 별명은 ‘원추리’이다. 맨 처음엔 ‘메추리’가 연상됐으나, 원추리는 백합 비슷한 모양에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예쁜 꽃의 이름이었다.
다들 특색 있고 딱 어울리는 별명을 지은 것 같은데, 나는 어떤 이름을 지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한 번 짓고 나면 사람들이 수없이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를 것이다. 결국 그 이름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 버릴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고민 끝에 정해진 별명은 ‘한들’이다. 맨 처음 이 단어를 떠올린 것은 봄의 풀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봄바람에 살랑살랑 움직이는 얇은 풀대를 보면서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늘 흔들리는 나의 모습이 말이다. 한방은 없지만 자잘하게 방황하는 캐릭터. 큰 바람에 꺾여버리는 큰 나무와는 별로 상관없고, 선선한 바람에 쉼 없이 한들한들 흔들리는 풀꽃이 바로 나이지 싶었다.
더불어 산에 올라가면 많은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집착도 미움도 욕심도… 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이러한들 어떠하리, 저러한들 어떠하리’의 정신으로 한동안 살아가고자 했다.(정치사상과는 무관함) 정말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숲은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마법의 공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