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계보를 끊는 법

영화 <디아워스>

by 한들

(스포일러 포함)


이 영화는 우울할 때는 보면 안 된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영화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거나 힘들 때는 보지 않는 것을 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자 한다면, 너무 몰입하진 않길 바란다. 그러는 사람도 없을 텐데, 괜한 걱정인지 모르겠다.


https://youtu.be/bwC7_Lj9jKE

영화 <디아워스> ost




이 영화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여럿 등장한다. 영화 첫 장면이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버지니아는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돌을 잔뜩 집어넣고 흐르는 강물로 걸어 들어간다. 죽기 직전에 사랑하는 남편 레너드에게 멋진 유서를 남기고 평소 산책을 하는 것처럼 유유히 집을 빠져나간다.

이 즈음, 버지니아는‘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작품을 쓰고 있었다.


1950년대 미국 서부의 중산층 가정,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을 읽는 한 여자 로라도 죽고 싶은 사람 중에 하나이다. 로라는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아들과 케이크를 굽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로라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로라는 아들을 이웃집에 맡겨 놓고, 한 호텔방을 찾아가 혼자 죽으려고 한다. 결국에는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가지만, 둘째 딸을 낳은 후 집을 나가 버린다.


2000년대 미국 뉴욕.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클라리사가 애인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를 준비한다. 이 시간 대에서는 여자가 아니라, 클라리사의 애인인 리처드가 창밖으로 몸을 던져 죽게 된다. 후에 밝혀진 사실. 리처드는 로라의 아들이라는 것.


이렇게 이 영화에서는 죽고 싶은 심정을 가진 사람의 감정과 실제로 죽는 모습을 담고 있다. 영화 보는 내내 ‘우울’, ‘죽음 충동’, ‘자살’을 생각해야 한다.

전쟁이나 액션 영화를 보면, 수없이 많은 사람이 총이나 칼에 맞아서 죽는다. 영화에서 사람 죽는 건 일도 아니다. 진짜가 아니라 다 꾸며낸 허상이니까 그리 충격적이지 않다. 이 영화에서는 고작(?) 두 명의 사람이 죽는데 마음이 이렇게 무거울 수가.

적막함 속에서 벗어나려 강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


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에도 자살하는 사람이 참 많다. 통계를 봐도 그렇고, 연예인의 죽음 소식도 종종 나오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살짝 안타까워하고 넘겼는데, 막상 내가 알던 사람이 죽으니까 몸으로 끼쳐오는 감각이 달랐다.


내 주위에서 무려 세 명이 목숨을 끊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참 동안을 힘들어했었다.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를 할 자리가 생겼다 하면,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했다. 내 안의 고통을 점점 바깥으로 밀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뜻밖에도 다른 사람들이 겪은 죽음에 대해 듣게 되었다.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아들의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 베스트 프렌드가 갑자기 차 사고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평소 알던 후배가 마지막 메시지를 자신에게 남겨놓고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


나만 유일하게 겪은 고통일 것이라 여겨 힘들게 털어놓았는데, 죽음은 나뿐 아니라 모두의 곁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은 흔한 것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해. 오래 슬퍼할 필요 없어’라고 말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고통이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 죽은 사람과 남겨진 사람 모두가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슬픔은 그 사람이 생을 끝낸다고 해서 결코 끝나지 않는다. 버지니아의 슬픔은 로라에게로, 로라의 슬픔은 리처드에게로 전달된다. 리처드의 슬픔은 아마도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어져 흐를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나의 슬픔 또한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해결되지 않은 슬픔이 나에게 이어져 소용돌이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슬픔을 해소하지 못하고 먼저 돌아간 사람의 슬픔이 나에게 와 알아 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슬픔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어찌할 바 몰라 서성대고 있지만 말이다.


스스로 세상을 먼저 떠난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어쩌면 그것은 온전히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슬픔이 세월을 타고 켜켜이 묵혀졌다가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실려 들어가 그 사람 안에서 너무 커져 버려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스스로 생을 중단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아닐까.

완벽한 삶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로라


친구가 죽고 나니, 나에게 또한 죽음이란 존재가 불쑥 솟아올라왔다. 한 동안 잠잠하게 모른 척하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웠던 사람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우연일지, 필연일지 모르겠는데, 작년에 한 공부모임에 들어가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책을 읽으며 죽음에 대해 한참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티벳 불교의 경전 중 하나로, ‘단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신비로운 텍스트이다. 여기에는 현대인의 이성적 논리로는 납득이 안 되는 다양한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증명할 길은 없고, 그러할 필요도 잘 모르겠다. 다만 죽음을 대하는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들으면, 인간의 존재에 대한 몇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단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대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책 <티벳 사자의 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까르마’라는 개념이었다. 까르마라는 것은 업보라고도 하는데,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포함하는 모든 소행을 말한다. 지금의 나를 결정하는 것은 첩첩이 쌓인 이전 생의 카르마라고 한다. 그러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 아니고, 이전 생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전 생이라는 것은 뭘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 살았던 또 다른 나일까? 티브이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전생’을 말하는 것일까? 조선시대의 나, 고려시대의 나, 삼국 시대의 나?

내가 생각하기에 전생은 나와 연관된 존재에게 축적된 기억과 습관을 모두 총칭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세계와 우리나라의 문화일 수도 있고, 생물학적 유전일 수도 있고, 우리 집안 조상이 남기고 간 흔적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결정하고 있다. 좋게 남겨진 것은 나에게 좋은 면으로, 나쁘게 남겨진 것은 나에게 나쁜 면으로 작용하여 현생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버지니아의 죽고 싶은 심정은 로라에게 소설을 통해 이어지고 로라의 생물학적 유전과 가정사는 리처드에게 이어진다. 이 반복되는 과정이 윤회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죽음은 결코 사건을 종결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할 수 없다. 누구누구라고 불리던 몸은 사라졌지만, 카르마는 남아서 어딘가 누군가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 다음 회차를 플레이하게 만드는 끈질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밖으로 뛰쳐 나가고 싶어하는 버지니아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내가 먼저 간 사람의 슬픔을 이어받아 죽는다면 그 슬픔은 어디로 가겠는가?’ 나의 카르마를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로 이어져 갈 것이다. 가깝게는 딸과 아들에게, 남편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음… 내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왠지 다행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왜 서글픔도 느껴지는지…?)


한참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끝에, 철부지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면 정신이 번쩍 들곤 한다. 아이들에게 깊고 깊은 상실의 아픔을 유산으로 남겨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멘털을 부여잡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이전 세대에서 물려받은 깊은 부정적인 생각 습관과 고통의 상처를 남겨주고 싶지 않아 고군분투하곤 한다. 그냥 내 삶의 영역 안에서 보고 배운 대로 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으므로, 계속 세상에 나가 사람을 만나거나 책으로 공부를 한다. 어쩌면 나는 부정적인 카르마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나 보다. 온몸으로 저항하고 버티면 흐름을 중지시키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죽음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럴 바에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며 제대로 살자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는 작중에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 남은 사람이 삶의 가치를 더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한다. 버지니아는 슬픔에 겨워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생을 더욱 살아있게 살라’는 메시지를 자신의 몸을 던져 전달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가까이 알던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진하게 알게 되는 명확한 사실. 삶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너무도 당연해서 매일 잊어버리는 사실이다. 그보다 더 새롭게 깨달은 것은, 죽음을 앞두고도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을 앞두게 되면 무언가 대단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다르게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원래 하던 생각의 방식이 있고, 하던 일이 있고, 살던 가락이 있기에… 나같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러면서 나도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다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원래 살던 대로 살아가게 된다. 심지어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어떤 죽은 사람은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한참을 이 세상에 남아 떠돌아다닌다고 한다. 대신 몸이 없기 때문에 그 영혼은 더욱더 심하게 휙휙 휘둘리며 왔다 갔다 한다. 삐걱거리는 육체와 현실이 정신을 붙잡아 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반면 죽음을 깨달은 사람은 과거에 대한 미련을 단번에 버리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변화한다.


죽음 앞에서도 변하기 힘든 사람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 나도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주어진 것에 집착하기는 마찬가지다. 직접 죽을 때가 되어야 알게 되는 것인가... 그리되기 전에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도대체 ‘사는 것처럼 사는 게 뭘까?’ 로라처럼 두 아이를 놔두고 집을 나가는 것일까. 두 아이가 없는 삶은 행복했을까. 아니, 전혀 다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다른 곳에 가서도 같은 생각, 같은 반응, 같은 행동을 하며 살면, 노상 같은 삶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과는 다른 생각, 다른 반응, 다른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게 뭔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 너무나 무지하다. 슬픔이 아니라면, 그 자리엔 무엇이 와야 하는가? 기쁨과 충만함을 느끼는 삶, 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삶,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삶, 상처를 보듬고 살아내는 삶에 대한 지식과 기술, 노하우를 익힐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아직까지 내용이 텅~비어 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미지만 둥둥 떠다니고, 구체성이 부족하다. 내가 배우고 연구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거 아닐까?


옛 애인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준비하는 클라리사


아마도, 앞으로도 나는 종종 죽음의 환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죽은 이들-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꿈속에 나와 기분이 들뜰 것이다. 눈을 뜨면, 밋밋하게 펼쳐진 현실 앞에 서글픔이 몰려올 것이다. 가끔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져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고, 이런 상태로 방치한 세상을 저주하고 싶어질 것이다. 주머니 속에 돌을 집어넣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버지니아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험한 생각의 소용돌이 속을 허우적대다가, 결국에는 여기에서 빠져나가는 구멍에서 비쳐 드는 빛을 조금씩 조금씩 발견하게 되면 좋겠다. 그 구멍이 조금씩 커져서 의미 있는 균열을 일으켰으면 좋겠고, 그 부서진 벽 너머의 세상에서 새롭게 생을 시작하고 싶다. 그 세상 너머에는 어떤 생이 펼쳐질 것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먹고, 어떻게 자고, 어떻게 만날까? 아마도 이러한 상상이 이전에 쌓여왔던 슬픔의 계보를 끊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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