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아내의 외출>
어느 날, 서점을 배회하다 ‘엄마됨을 후회함’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을 엄마가 되기 전에 발견한 것인지, 그 이후인지 잘 모르겠다. 책 발간 시점을 확인해 보니 2016년 인 것을 보니, 엄마가 되고 난 시점에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엄마가 되기 전에는 이런 책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것 같다. 엄마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막연한 이미지와 환상 같은 것이 엄마의 삶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준비 없이 시작했으니, 후회를 할 수도 있다. 물론 되돌릴 순 없다 해도.
엄마가 되기 전에는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설렘과 불안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아이를 보면,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앙증맞고 귀여웠다. 어린 사촌 동생들이 집에 놀러 오면 예뻤다. 사촌 언니의 아이가 엄마한테 착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저런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언니가 대단해 보였다.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보면, 어린아이를 가진 친구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것과 같다’고 주인공 리즈에게 말한다. 리즈는 아이를 낳는 대신 이혼을 했고, 여행을 떠난다. 그 말은 나의 가슴속에도 콕 박혔다. 문신은 다시 지울 수 있지만, 아이는 어떻게 지울까. 그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나에겐 넘사벽의 영역으로 느껴졌다.
결혼을 하기는 했는데, 아이를 낳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평소 겁이 많은 나는 감히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다. 나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겠는데, 다른 인간을 챙기며 살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주어진 숙제도 있었다. 박사 수료를 하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아이를 낳으면 졸업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하던 일도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 많은 것을 손에서 놓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결국 어정쩡한 상황에서 아이를 갖게 되었다. 내심 아이를 갖고 싶었는데 수많은 두려움의 먹구름 때문에 의식을 갖고 결단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을, 무의식이 은연중에 답을 내려 주었던 것이다. 똘똘한 우리 아이는 제 몫의 생을 챙겨서 야무지게 태어났다. 덩달아 나에게 ‘엄마’라는 호칭이 생겼다. 참으로 어색하고 이상했다. 갑자기 중력이 더 세진 느낌이었다.
아이를 기르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저기 좇아 다니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놀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걸 알게 되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내가 알던 세상과 다른 세상을 알게 되어,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 흥미로웠다. 세상 구경, 사람 구경하는 재미로 한참을 살았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으니, 집 안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게 되었다. 잠깐 학교에 나갔다 오는 것도 힘들었다. 조금 있자면 젖이 불어서 화장실 가서 짜내야 했다. 아이가 엄청 울어서 남편이 뒷 좌석 카시트에 울어재끼는 아이를 태우고 학교까지 달려오는 일도 있었다. 그제야 엄마라는 존재가 어딘가로 움직이려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둘째를 낳고 나서는 완전히 빼박(?)이 되었다. 모든 일을 손에서 놓아야 했다. 내가 무언가를 하겠다고 밖에 나가자면 아이 둘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는데, 그 정도의 비용을 벌어올 자신이 없었다. 아이를 둘 씩이나 누군가에게 맡겨놓고 일을 하는 것이 괜찮은가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고 말이다. 이 지점에서 혼자 밖에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지만, 집안에서 살림만 하는 나 자신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전업주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멍하고 슬펐다.
영화 <내 아내의 외출>에서 나오는 ‘타라’가 딱 이 시점에 와 있었다. 깔끔하고 번듯한 집에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타라.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데,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피부는 핏기가 없이 까칠해 보인다. 남편인 마크는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일도 잘한다. 아내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아침마다 섹스도 꼬박꼬박 챙겨가며 하는 성실한 남편이다. 남편은 이 결혼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았을 때, 참으로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스위트홈인 것이 맞다. 타라만 잘 버틴다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타라도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숨을 꾹꾹 눌러 참고 산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등원시킨다. 그런 후, 타라는 방황을 시작한다. 시내에 나가 목적지도 없이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을 한다. 이 시간에 잠시 숨도 쉬고 주위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곧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은 오고야 만다. 어질러진 집안은 치워도 치워도 정돈되지 않고,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고, 남편은 자기 삶에 집중하며 살아간다. 다시 아침.
답답한 마음에 타라는 엄마를 찾아간다. ‘사는 게 힘들다’며 심정을 토로하지만, 타라의 엄마는 ‘아이 키우는 엄마는 다 그렇게 산다. 그래도 너는 나보다는 상황이 낫지 않냐’라고 대답한다. 자신의 엄마에게도 기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타라는 실망한다. 타라는 친구도 없어 보인다. 다시 남편에게 희망을 걸고, 타피스트리 수업을 듣고 싶다고 요청한다. 남편은 시간과 비용을 이야기하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 부분에서 타라는 절망을 하고야 만다.
평소와 같은 일상이 펼쳐졌다. 그런데 아이들이 칭얼대기 시작하자 갑자기 화가 올라와서 타라는 아이에게 욕하며 소리를 치고야 만다. 그런 자신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 두 아이에게 애걸하며 사과를 한다. 타라가 선을 넘었다. 다음 날 아침, 타라는 아침을 준비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갑자기 집을 나가 버린다. 머릿속의 퓨즈가 ‘펑’하고 나가버린 것이다.
내 머릿속의 퓨즈가 나갔던, 그날이 기억난다. 코로나 때문에 두 아이 모두 데리고 있어야 했다. 평소와 같은 날이었는데, 두 아이가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칭얼거리면서 ‘엄마~, 엄마~’라고 부르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다행히 아이들에게 욕을 하진 않았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남편한테 전화를 걸어서 아이들 좀 봐달라고 했다. 이러다가 큰일 날 것 같아서 울면서 병원에 갔다. 이러저러한 검사를 했고, 약을 받아와서 먹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내 의지와는 달리 기분이 들쑥날쑥했고, 밤에 잠을 잘 수 없거나 하루 종일 자거나 했다. 이러한 상태를 회복하는데 한참이 걸렸고, 어쩌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위안이 되는 것은,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데 애기 엄마들이 종종 보였다는 것...
타라는 병원에 가는 대신, 기차를 타고 프랑스로 넘어갔다. 유럽이라 가능하다. 기차 타고 외국으로 가는 것이. (타라는 영국 사람이다) 사실 이전까지 영화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집을 나가서 표를 끊으면서 주인공의 이름이 ‘타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이름이 불리지 않는 무명의 존재로 비쳤던 것.
프랑스에 간 타라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녔다. 평소 좋아했던 타피스트리 전시도 마음껏 보았다. 그곳에서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알고 보니, 그 남자도 아닌 척했지만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타라의 환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게다가 길거리에서 아이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집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결국 집과 떼어질 수 없다는 것을 무참히 깨닫는다.
내가 집에서 벗어난다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젠장. 떠오르는 곳이 없다. 갈 수 있는 곳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다. 어느새 생활 영역이 정해져 버렸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은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내가 선택했던 것이 시골로 가는 것이었다. 빡빡하게 짜인 시스템에서 벗어나 잠깐 숨 쉴 틈을 시골에서 발견해 보고 싶었다. 타라와는 다르게 두 아이를 모두 데리고 가서, 그곳이 다시 집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더 나아가,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는 무의미한 질문을 던져본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이 마흔을 넘긴 나. 결혼을 할 즈음에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결국 유학을 가서 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동남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유학을 못 갔다면, 국내에서 강의를 하고 논문과 연구보고서를 쓰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만나 연애를 하고 헤어질지도. 만날 남자가 없으면 그냥 혼자 지내거나, 결혼하지 않은 친구를 만나 놀러 다녔을지도. 등산회에 들어서 토요일마다 산 타러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밤새도록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을 테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면서 저녁 시간을 조용하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결혼했는데, 나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안해할지도.
영화 속 타라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돌아가지 아니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밤거리를 위태롭게 걸어 다니다, 정신을 잃고 만다. 일어났더니 낯선 집이었다. 나이 든 여성이 타라를 보고 구해주었다. 세상에 가장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타라가 불쌍해 보였다고 한다. 이 낯선 여성은 타라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 보라고 격려해 준다. 그리하여 타라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후 타라는 어떻게 살게 되었을까? 물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우선 주변 사람들이 타라를 당연하게 놓여있는 조각상처럼 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타라 또한 자신을 그러한 방식으로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반복되는 일상에는 변함이 없을 수도 있지만, 출구를 발견한 타라는 보다 열린 마음으로 일상을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타라는 무미건조하고 비어있는 삶을 살며,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한 것이었을까?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타라의 모습을 보며 폭풍 동감을 했던 나는,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하는 것일까?
가끔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한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영문을 모를 때가 있다. 결혼을 결심했던 스물아홉 살의 나로 돌아가면 결코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 때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부장제 시스템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 간 나를 탓해본다. ‘그러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간의 개고생(?)도 없었을 것이 아니냐’고 타박도 해본다.
그런 어지러운 마음이 한껏 들끓고 나면, 찜기의 열기가 푹 빠져버리는 것처럼 마음이 풀썩 가라앉는다. 제정신을 차리게 되고 집안과 아이와 남편을 둘러보게 된다. 집안은 대충 치우고, 아이들에게 게임시켜주고, 남편에게 김치찌개를 끓여주면 만사가 다 잘 풀린다. 세상 사는 게 뭐 별거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너무 잘하려는 마음 때문에 모든 후회가 먹구름처럼 솟아나는 것일지도.
세상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김정운 작가는 후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해본 것에 대한 후회,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인생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후회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더 좋다고 한다. 해 본 것에 대한 후회는 벌어진 현재에 대한 불만만 다루면 되는데, 해보지 않는 것에 대한 후회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네버엔딩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엄마가 된 것에 대한 후회만 하고 끝마치려고 한다. 엄마가 되어보지 않은 채, ‘왜 나는 엄마가 되지 않았을까?’ 고민하는 게 더 괴로울 것 같다. 아예 엄마가 될 생각이 없었다면 모를까, 되어보고 싶은 마음이 반쯤 있을 때는 해보고 후회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나.
문득 이런 후회하는 마음을 남편이나 아이가 알면 섭섭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많은 엄마들이 이런 점 때문에 불만을 토로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특히 아이들이 정신적인 충격을 받지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문제는 그런 이유로 말을 하지 않다가 혼자서 펑 터져 버리는 것이다. 엄마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외출이 아닌 가출을 해 버리면 그게 더 곤란하다.
엄마도 불완전한 사람이고, 힘들어하기도 하고, 가끔은 혼자이고 싶기도 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공유하고 인정시키는 것이 다른 가족에게 더욱 안정감을 주는 일일지 모른다. 엄마가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므로.
엄마도 남편이나 아이를 믿어야 한다. 완벽하지 않은 채, 흐트러지고 아프고 엉뚱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여전히 그들은 아내를, 엄마를 기다리고 사랑하리라는 점은 너무나도 자명하지 않나. 그러니 엄마 스스로 폭주하기 전에 자신에게 외출을 허하라.
그러는 나도 외출을 좀 해야겠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