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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구의 삶 Jan 24. 2023

슬픔이 작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내 안의 슬픔을 잠재우는 법

이 세상천지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있을까? 

'힘듦'에도 내기가 있다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살아갈 날들이 버거워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밥을 먹다가도 눈물이 났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눈물 콧물이 멈추질 않아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게 참 다행이다 싶었던 때. 


눈물이 자꾸 흐르던 그 시기에도 난 출근을 했고, 일상을 이어나갔다. 

무슨 정신으로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걸음을 걸었을까.

그때의 나는 매일을 이렇게 견뎌냈던 것 같다.

하나. 나 힘든 거 맞아, 매일 인정했다. 

나보다 힘든 사람 더 많잖아? 이런 위로는 소용없었다. 남과의 비교로 얻는 위안은 약효가 없었으니까. 

'여기 나보다 힘든 사람 있어?' 크게 외치며 내 슬픔을 인정했다.

인정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둘, 한 발짝 뒤에서 슬픔을 바라봤다. 

매일 저녁 하루종일 힘들었던 나를 떠올렸다.

내가 겪었던 '슬픈 일'은 끝을 모르는 기약 없는 일이었는데 그 안에 있다 보면 도저히 일상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겪는 슬픔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애썼다.


이건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알프레드 칸터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방법이기도 했다.

알프레드 칸터는 자신이 겪는 공포의 상황들을 그림으로 그려내면서 

관찰자로서 그 상황들을 받아들이려 했고, 이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내가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하여서 생존에의 본능을 밖으로 이끌어 냈고,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찰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최소한 몇몇의 순간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나를 분리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해 주었다. - Kantor, 1971




그렇게 내 슬픔을 밖에서 바라볼 때면

이 슬픔이 언젠간 작아지고 잠잠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나를 압도할 만큼 크지만

마침내 내가 다독일 수 있는 크기로 작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슬픔이 작아질 때까지 계속 기다렸다.

내 안의 슬픔과 마주했을 때, 그건 또 다른 여린 나였다. 그런 나를 안아줄 사람은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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