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은 한 달이었다.
부모님에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빠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고,
보조 보행기에 의지해 식탁까지 오던 아빠는 이제 더 이상 식탁에 앉지 못했다.
화장실은 더더욱 갈 수 없었다.
이제 아빠는 TV앞 침대에서 세 걸음쯤 떨어진 의자까지도 갈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는 아빠의 의자를 침대 바로 옆에 붙여 놓았다.
아빠의 세상은 이제 침대와 그 옆의 의자.
그리고 저 멀리의 TV뿐이다.
아빠가 쓰러진 지 20년이 되었다.
그 20년 동안 우리 가족은 너무나 많이 바뀐 상황에 혼란스러워하고
싸우고, 울고,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며 지금까지 가족이었다.
그 사이 엄마의 입에서 '요양원'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왔지만
엄마는 매번 아빠를 보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딸인 나는... 주간병인이 아닌 나는...
아빠를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주간병인인 엄마의 딸이기도 한 나는 힘들어하는 엄마를...
아빠의 간병으로 몸이 상하는 엄마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정말 본격적으로 아빠의 요양원을 알아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학교에 출근하는 날 아침.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 눈물이 났다.
수업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울어 부은 눈으로 들어가면 어쩌나,
수업을 하다가 눈물이 나면 어쩌나...
아... 나는 또 결국 내 걱정만 하는구나.
그렇게 폭풍 같은 한 달이 조금 지나고
아빠는 이제 요양원에 산다.
아빠가 가기 며칠 전부터 엄마는 귀도 잘 안 들리는 아빠에게
매일 같은 이야기를 해 준다.
요양원이 어디에 있고 어떤 곳이고
우리가 얼마나 자주 아빠를 보러 갈 것인지
그곳은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매일매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말한다.
애기같은 아빠가 너무 놀라지 않게 자꾸 알려줘야 한다고
그러면서 아빠가 가는 날 엄마는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아빠가 떠나는 날 아빠의 그 눈을 평생을 못 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강하디 강한 엄마에게서 들을 거라고 생각도 못 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가족이었지만 자식인 나는 아빠의 간병에서 늘 제삼자였다.
요양원에 가기 전 한 달 동안 기저귀를 찼던 아빠와 살았지만
엄마는 나에게 절대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겠지...
20년 동안 엄마가 힘들어도 묵묵하게 간병을 했던 건
엄마가 하지 않으면 자식인 내가 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고
자식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빠를 보내는 마음 역시 나보다는 더 복잡할 것이다.
그렇게 엄마는 아침 일찍 아빠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밥도 챙겨주고 간식도 챙겨주고 나갔다.
그리고 요양원에서 아빠를 모시러 왔다.
휠체어에 탄 채 차에 탄 아빠의 뒷모습에 눈물이 났다.
'아빠, 빨리 적응하면 빨리 만날 수 있으니까 잘 지내야 돼'
라는 말을 끝까지 다 하지도 못했다.
담담하게 차에 탄 아빠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저녁에 요양원에서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휠체어에 앉아 체조를 열심히 따라 하는 아빠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궁금했다.
아빠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아빠는 우리를 원망하고 있진 않을까...
아빠는 이제 요양원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