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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Apr 07. 2023

가족 같은 소리하네

소피 루이스, 가족을 폐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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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이 책을 들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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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족을 사랑한다니 참 다행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은 건 아니다. 그렇지 않겠는가?”


수많은 영화들이 반복해서 말했다. 끊어내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게 가족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같은” 분위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가 족같은” 분위기일 수 있다는 것을,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성장해 온 사람은 끝내 모를 것이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서로 만나면 징그럽게 싸우는 경우들을 보여주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므로,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하고, 다시 사랑해야 하고, 블라블라, 하는 이야기에 솔직히 말하면 좀 지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두 번 보았다. 그리고 아내는 두 번 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내는 이 책을 들고 들어왔다.) 그렇게 징그럽게 싸울 거면, 그냥 서로 좀 떨어져 있는 게 낫지 않나? <더 글로리>에서 가장 충실한 행동대장인 강현남의 삶에서, 그 주취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제거해야 행복하다는 사실을 다들 알면서도, 어째서 현실로 돌아오면 “가족같은” 분위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강현남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행복한 가족을 꾸렸...을까?)


가족이라는 것이 안전하고, 그곳에서 태어나서 길러지고, 그리하여 언제나 마음이 편한 그런 보금자리라는 생각은 어쩌면 좀 한가로운 소리이지 않을까나. 오히려 가족은 ‘그래야만’ 하는데, 그것은 가족이 불만없이 돌아가야만 -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게 무급이라는 것을 군말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상태로 가족이 온전하게 구성되어야만, 자본주의는 무한히 (재생산된) 노동력을 활용하여 잉여를 뽑아낼 수 있으니까. 만약 노동력이 재생산되지 못한다면 - 영광스러운 노동영웅으로서 주당 69시간을 버텨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를 제대로 재생산해내지 못한 가족 구성원의 탓이기도 한 것이다, 이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공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을 점차적으로 후퇴시키면서, 그들(생산 인구)을 끊임없는 노동의 영역에 밀어넣어 죽음에 한 발짝 다가가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죽으면 너희들도 힘들지 않냐 그러니, 죽지 않도록 잘 보살피라는 자본의 무언의 압박이 아니겠냐는 거지.


이게 성공적으로 돌아가려면, 이 ‘가족’에 대한 다양한 환상이 필요하다. 부모는 이래야 해, 자식은 이래야 해, 양육의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가 져야 해 등등. 하지만 부모가 언제 부모 수업이나 받았나? 나이는 많이 먹었어도 덩치 큰 어린아이인 어른들이 한둘인가? 그들중 누군가는 자신을 갈아넣어 훌륭하게 자녀를 양육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도박을 왜 가정이 감당해야 하나? 그것은 이것이 부모의 숭고한 사명이기 때문인...가? 자식의 기쁨은 나의 기쁨, 자식이 잘 되면 나의 기쁨, 블라블라. <금쪽같은 내새끼>는 이 도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드러내면서, 끝내 도박에 참여하기를 요청하는 이데올로기 기능을 수행한다. 자녀 키우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자녀 때문에 부모들의 심신은 얼마나 탈탈 털리고 있습니까? 내가 잘 한다고 아이가 제대로 크는 것도 아닌데요. 하지만, 위대한 멘토와 함께 키운다면 당신도 아이를 세상의 요구에 맞게끔 잘 키워낼 수 있답니다, 그렇다면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예, 뭐 글쎄요, 그렇지요...네 (일단 도망간다)


아니, 결혼지옥도 그렇고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들이 ‘가족의 위기’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예, 하지만 가족이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을까요? 오히려 가족의 위기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그 과정 자체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일부분으로 기능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라고 되물어보자. 가족의 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가족이 [누군가의] 위기인 것이 아닐까? “가족은 이 지구에서 가장 많은 강간과 가장 많은 살인이 일어나는 장소다. 당신에게 날강도짓을 하고, 당신을 괴롭히고, 갈취하고, 조종하고, 구타하고, 원치 않는 접촉을 할 가능성은 그 누구보다 가족이 더 크다.” 왜냐고? 안전하니까. 가족은 밖에서 개입할 여지가 차단된 사적인 공간이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범죄들은 말 그대로 ‘가족’의 문제다. 그리고 보통 그 범죄는, 가족 내의 권력자에 의해 벌어진다. 공적 영역에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자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사적 영역에서는 제왕이 되고 싶은 법인가?


이것은 종교적 믿음에 의해 지탱되는, 독재의 장소라는 지적이 꼭 그렇게 틀린 말인지는 모르겠다. 어슐러 르 귄은 톨스토이의 문장 “모든 행복한 가족은 고만고만하게 행복하고, 불행한 가족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말을 뒤집으며 이렇게 말한다. “행복한 가족”이라는 표현은 그 행복에 막대한 대가가 따랐으며, 보통 그 대가는 누군가가 희생되고 억압당하고, 기회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말이다. 그러니 보통 가족은 불행하고, 아주 기적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이지 않나? 밖에서 보면 행복해 보이겠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끔찍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영화가 있는데, 에... 그만두자. 그런 영화는 한 두개가 아니다. 그러니까 많은 영화들이 위기를 드러내는 아주 상투적인 방법중에 하나가 이것인데, 그것이 뜻하는 바는 이런 위기가 오히려 ’보편적‘ 형태라는 것이지 않겠나.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해 보일 뿐이라니까요, 멀리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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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두 가지 형태의 사회적 압력이 가해진다. 첫번째는 사회가 재생산 노동을 담당하길 포기하고, 모든 공적 책임에서 물러남으로써 가족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번째는,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선 비용이 필요하기에 모든 구성원들이 다 나가서 돈을 벌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선 꽤 진보적인 전진이기도 하다. 여성도 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빈곤‘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더 이상 사회가 감당을 안 해주고 있으니, 맞벌이를 해도 언제나 턱걸이하듯 숨이 차다. 그렇다고 재생산 노동이 사회의 몫으로 돌아갔나? 오히려, 맞벌이와 함께 그것은 온전히 가정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가정에서 재생산 노동은... (생략) 뭐 이런데 정말로 가족이 그러니까 우리가 의지할 그 무언가가, 맞냐고 묻는 게 정말로 이상한지 생각해봐야 하는 거지.


물론 그런 질문들은 수많은 문학작품, 영화, 연극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드러났다. <샤이닝>을 생각해보자. 글 쓰다 미쳐버린 도끼 살인마가 아빠라는 설정은, 꽤 반항적이다. 권위적인 아빠가 가끔씩 진짜로 내 목숨을 앗아갈 것 같다는 경험을 한 사람이 한 둘일까? 그런 집으로 꼭... 돌아가야만 할까? 그냥 우리 이대로 좀 편하게 살 방법은 없을까? 이게 꼭 “퀴어적인 울트라 좌파의 과격한 기행”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오늘날에 가족은 허울을 걷어내고 보면 국가와의 경제적 계약 또는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말이 좀 당신 목에 거슬린다고 하더라도. 가족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영원히 흩어져 살자는 소리도 아니고, 행복해지지 말자는 소리도 아니다. “사랑하는 아이에 대한 헌신이 성인들(특히 여성)의 족쇄가 되는 규범보다 나은 무언가를 상상”하자는 게 뭐 그렇게... 죽일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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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앤다는 가족은 그럼 어떤 것인가? 가족이라는 게 뭐 꼭 억압의 현장이라기보다는 저항의 현장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이것은 ‘전유’의 문제로도 접근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거다. 일반적으로 가족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재생산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라고 하더라도, 어떤 ‘가족’은 전유하여 저항의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발상, 어 뭐랄까 같은 결은 아니지만 <피투자자의 시간>처럼 역방향 공격이 가능한 그런 장소일 수 있다는 거지. 예컨대 지금도 세계의 다양한 폭력의 현장에서 가족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항하는 이들의 단결을 도모하기에 적당한 그런 수단이지 않은가? 가족 폐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이 책에선 두 가지다. 1) 어떤 가족이 좀 특별히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다른 가족을 낭만화하거나 용인할 수도 있다. 2) 모든 가족은 강요된 제도이므로 이것을 열망하고 높이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끝내 폐지되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취하는 건 후자다. “핵가족 모델은 피억압 집단을 국가와 사회, 자본으로부터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가와 사회와 자본이 과거의 노예, 선주민, 밀려 들어오는 이민자, 그 빈약한 보호막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 유산과 처방 때문에 주변화된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 바로 그 백인, 식민 정착자, 부르주아, 이성애, 가부장적 제도이기도 하다. 가족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퍽 당연하게 부여잡는 방패막이다. 우리가 그 방패막이를 내려놓는 데 동의하지 못한다면, 아마 이 전쟁이 영원히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백인들이 흑인 가정의 경계를 침범해 많은 흑인 가정을 파괴하고, 아이들을 위탁돌봄 산업으로 몰아넣은 그 반작용으로 반인종주의가 ‘가족 만들기’ 담론에 경도되는 상황을 지적하며, 이 결손 가정이야말로 백인 가정이 현재 자신들을 완전하다고 상상하고 만족하게 만들면서, 그리고 흑인 가정이 완전한 백인 가정을 선망하게 만들면서 이 체제를 지탱하도록 만든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여기까지가 2장의 내용을 일부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는다. 주말엔 나머지 절반을 읽을 것이다. 다 읽고 나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이 읽는 과정에서만 목소리가 있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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