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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May 10. 2023

소셜미디어라는 ‘초가공식품’

23. 05. 09.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핸드폰이 실제로 바지 주머니에 없는데도 진동이 느껴져서 몇 번이고 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는 경험을 해본 적 있나? 나는 한동안 이 ‘유령 진동’에 시달렸다. 눈앞에 핸드폰이 보이지 않으면 중요한 전화나 문자를 놓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주기적으로 핸드폰의 위치를 확인하라는 듯 허벅지 바깥쪽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마다 나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주머니에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공포를 느꼈다. 잃어버렸나? 그러게 잘 보이는 데에 뒀어야지. 그 사이에 중요한 업무 연락이 오면 어쩌지? 대답을 빨리 해야 하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쯤, 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틈새 어딘가에 꽂힌 핸드폰을 발견한다. 부리나케 달려가서 어두운 화면을 두드리면, 배터리조차 닳지 않은 심심한 알림 창을 마주한다.


중독자의 증상이었다. 언제나 내 주의력의 일부는 핸드폰을 향해 있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도 핸드폰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진동과 불빛을 감지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금 사람들이 기계 너머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삶과 일의 경계가 흐릿한 직업은 이 중독을 정당화하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상대방도 일하고 있으니까, 연락이 올 데가 있으니까, 빠르게 결정해야 하니까 같은 말들을 레퍼토리처럼 되뇌었다. 물론 그 와중에 나는 화면에 손가락을 대고 살짝 아래로 쓸어내린 후, 타임라인을 채우는 새로운 트윗들을 빠르게 훑는다. 새로운 것이 없어도, 언젠가는 새로운 것이 등장할 것이라는 신실한 종교적 믿음은 언제나 응답받았다. 종교적 신실함이 가이사의 세계의 불성실함으로 이어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만해지고, 실수가 늘었다. 오늘이 되도록.


그래서 이 책을 사서 첫 장을 펼쳐보는 데 며칠이 걸렸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끊임없이 옷 여기저기를 잡아당기며 불편해하듯, 새로 맡은 일은 안 그래도 허약한 나의 집중력을 끊임없이 흐트러트렸다. 변명을 하자면 처음 해보는 일이라 사실 서툴렀다. 잔뜩 움츠린 채로 도화선에 붙은 불길만 간신히 잡는 날들이었다. 그래도 살기 위해 며칠 전 읽었던 <음식 중독>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을 시작부터 마주하니, 마치 은신처로 돌아온 것 같이 편안했다. (요한 하리가 <전쟁과 평화> 3권의 마지막 장을 읽고 눈물을 흘린 것과 같이...) <음식 중독>의 저자 마이클 모스는 우리가 음식에 탐닉하는 것이 개인의 자제력 부족 때문이라기보단, 끊임없이 먹어치우도록 개발된 ‘초가공식품’들이 만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이 책의 저자 요한 하리도 ‘집중력’에 대해 비슷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집중력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극적으로 강화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시스템의 문제를 습관의 개조라는 개인적 태도의 변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잘못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점점 더 짧게 주목한다. 수네 레만과 그의 연구팀은 8년 분량의 트위터 데이터를 분석해 사람들이 한 주제를 얼마나 오래 이야기했는지 측정하고 해마다 얼마만큼 늘고 줄었는지를 확인했다. 결과는 명료했다. 2013년 가장 많이 논의된 상위 50개 주제에 대해, 한 주제당 사람들은 17.5시간을 머물렀지만 2016년이 되자 11.9시간으로 감소했다. 사람들은 더 빨리 싫증내기 시작했다. 집중력이 밀물처럼 들어오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왜 그럴까? 연구팀의 결론은 정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는 거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차원에서 깊이를 희생하고 있다는 겁니다... 깊이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깊이는 사색을 요구해요. 모든 것을 다 따라잡아야 하고 늘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면 깊이를 가질 시간이 없어져요.”


우리의 뇌는 미신적인 믿음과 달리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 컴퓨터처럼 일을 동시에 해내는 게 아니, 아주 빠른 속도로 일을 번갈아 하는 “저글링”을 할 뿐이다. 이 일을 하다가, 저 일을 하는 전환의 과정마다 끊임없이 집중력의 ‘누수’가 발생한다. 책을 읽다가 문자에 답을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다시 돌아와 책을 읽으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전환 비용은 언제나 발생한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동시에 여러 일을 하지만, 정작 뇌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집중력을 낭비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다. “매일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으면서 늘씬하기를 바라는 것만큼 불가능한 꿈”의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폭탄처럼 쏟아지는 정보들 앞에서 보통 사람들의 게이트 키핑 능력은 무력해진다. 안간힘을 쓰면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검토한다 해도 여전히 확인하지 못한 정보들은 당신이 편안히 잠들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혹시 미처 확인하지 못한 정보에 내가 놓친 중요한 내용이 있으면 어쩌지? 불안감에 다시 감았던 눈을 뜨고 타임라인을 쓸어내리지만,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걱정에 잠을 설치기 일쑤다. 그렇게 설친 잠은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카페인을 중독자처럼 들이켜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사람들, 각종 심혈관계 질환과 과로사, 집중력 상실과 국소적 수면과 같은 부작용 말이다. 수면 연구를 진행한 찰스 체이슬러는 왜 이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모두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의 경제체제는 잠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집중력 부진은 로드킬일 뿐이에요. 그저 사업의 대가일 뿐이죠. “ 그래, 잠에 든 사람은 돈을 쓰지 않으니까.


요한 하리는 집중력 부족이 야기하는 다양한 부작용들을 탐색한다. 긴 글을 읽는 능력이 떨어져 문장을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그리하여 취미로서의 독서 영역이 급격히 축소되는 상황들이나 우리의 창의성을 활성화시키는 딴생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들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대 테크 기업의 계산된 결과임을 증명하려 시도한다. 문해력 하락, 소아 ADHD의 증가, 정치적 극단화와 탈진실 시대의 도래와 같은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 양상을 '집중력 상실을 유발하는 세계'라는 키워드 아래 한 데 묶겠다는 야심찬 시도다. (이 부분은 프랭클린 포어의 <생각을 빼앗긴 세계>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다.) 사용자의 시선이 더 오래 머무르게 만들기 위해 그들은 자본을 투여해 다양한 연구와 기술을 자신들의 앱에 적용했다. 이용자가 머무는 동안 제공하는 정보들을 취합해 취향을 세분화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눌러봄직한 내용을 끊임없이 제공함으로써 앱에 머무는 시간을 극대화하려 시도한다. ‘알고리즘’의 마법에 다 한 번씩은 사로잡혀본 적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틱톡과 같은 짧은 영상은 그 영상을 보는 데 들일 시간 비용을 최소화시켜 무한히 스크롤을 이용자가 내리게끔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인스타와 유튜브는 릴스와 쇼츠라는 방식으로 이 '선도적' 기술을 차용했다)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SNS에 무언가를 게시하는 사람도 똑같은 집중력 상실에 시달린다. 누구도 정답을 모르는 ‘알고리즘’의 가호를 받기 위해서 콘텐츠를 올리는 사람들은 유혹의 기술을 끊임없이 습득하고 적용해야 한다. 썸네일을 살짝 바꿔보거나, 제목을 더 ‘섹시하게’ 뽑아보는 건 감내할만한 수준일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주기적으로 콘텐츠를 올려야 이용자들에게 노출이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소리를 더 크게 지르든지, 아니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매번 소리를 질러서 지나가는 사람이 알아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거지. 올리면 끝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지, 초기 이용자 유입 곡선이 맘에 들게 뽑히는지 계속 초조하게 확인해야 한다. 1시간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어디까지 노출되고 있는지 실시간 그래프를 확인하듯 점검하는 일은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탄 것처럼 한 번 시작하면 그만둘 수 없다. 올리는 이도 보는 이도 자유롭지 않다면, 집중력의 주도권은 대체 누구의 몫인 걸까?


하나 독특한 점, 요한 하리는 이러한 집중력의 분산이 민주주의 시스템을 망가트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가 봉착한 꽤 많은 문제적 상황들을 해결하려면, 장기간에 걸친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구별해 내고, 해결책과 책임을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려면 시민들이 하나의 주제에 오래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매체들은 사람들의 집중력을 빼앗아 사유화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고, 이용자들이 만족할만한 대안적 현실을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우리는 그 매체들이 제공하는 스펙터클에 끊임없이 눈알을 굴리며 집중력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전방을 주시하지 않고 운전하면 언젠가 사고가 나듯, 시민의 주의력을 끊임없이 분산시키는 세계의 민주주의는 당면한 사회-정치적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집중력의 회복을 긴박하게 요구하고, 또한 집단적으로 행동하라 요구하는 이유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불행이 아니다. 함께 사는 이 세계의 불행이다.


인터넷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방식의 ‘디지털 디톡스’를 수행해 본 요한 하리는, 이 방법에 모두가 동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아미시 공동체에 들어가 영원히 기술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것보다, 대다수 사람에게 이러한 노력이 단기적 해결책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노동계급 출신이다. 나를 키워준 할머니는 화장실을 청소했고, 내 아버지는 운전기사였다. 그분들에게 집중력 문제의 해결책은 일을 그만두고 해변 오두막에 가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악질적인 모욕이 될 터였다.” 개인적 해결책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그 수단을 실행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을 손쉽게 비난하는 데 동의하기 쉽다. 우리가 빼앗긴 '몰입 flow'의 능력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한 하리는 ‘집단적’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일에 지쳐 주의를 제대로 기울일 수 없는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노동 시간을 줄이고, 테크 기업이 개인정보에 접근할 권리를 제한하고, 어린아이들이 방에서 나와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려면 디지털 디톡스만으론 부족하니까. 그리고 우리는 아주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에 당면해 있다. 기후위기, 우리가 집단적으로 ‘집중력 되찾기’에 나서야 하는 절박한 이유다.


누군가는 이 산만한 미디어 환경을 새로운 시장인 것인 양 ‘주목경제’라 이름 붙였지만, 허울 좋은 이름을 걷어내고 나면 누군가의 시선과 관심을 빼앗아 내게 돌리기 위해 벌이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드러난다. 금방 싫증 낼 사람들이 두려워 진득하게 진지한 이야기를 내놓기보다 더 짧고 강렬하게 도파민 분출을 자극하는 짧은 길이의 영상으로 선회한다. 누구도 듣지 않는 이야기는 아무리 좋은 내용이어도 의미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에 언제나 고개를 한 번 위아래로 끄덕거렸다가, 그래서 우리가 그런 시선을 잘 전유해서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고개의 축선이 달라진다. <피투자자의 시간>을 읽으면서 느꼈던 약간의 당혹감, 그러니까 우리를 지배하는 수단들을 역으로 전유하려는 시도의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수단을 제대로 활용할 목적을 제대로 노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수단이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적절한지에 대해 답이 애매하다는 그 느낌을 내가 속한 일터에서도 똑같이 느낀다. 진정으로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누군가의 집중력을 도난하고 있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하지만 이러면서도 오랜만에 올리는 글을 누구도 보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나는 대체 무엇인가, 꽤나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 이 글은 PD저널에 제출한 글의 수정 전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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