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문희 May 04. 2023

논픽션, 이야기형이랄까

230504

  책을 잘 쓰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진통을 겪고 있다. 도저히 인터뷰할 인물이 안 떠오른다. 크리스는 언론계 거물 조갑제를 인터뷰했고, 전현진 선배는 김당을 만날 예정이다. 이지훈 선배는 르포 작가 희정과 약속을 잡았다고. 나는 누구를 하나.



  생각해 보면 이 고난은 애초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논픽션 작가'를 인터뷰한다고 주변에 대충 말은 했지만, 염두하는 논픽션이 그냥 논픽션이 아닌 탓이다. <총, 균, 쇠> 같은 교양서는 뺀다. <임계장 이야기>처럼 실화 바탕이지만 에세이 성격이 더 강한 책도 제외한다. 평전, 자서전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에세이형, 역사서형과 구분되는 이야기형 논픽션이랄까. 사실 취재를 바탕에 깔되, 서사적 짜임새를 가진 책이어야 한다. 나든 남이든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 그가 어떤 사건을 겪으며 변화하는 이야기가 좋다. 장강명 작가는 "나는 개인적으로 논픽션을 ‘소설 같은 구성이지만 허구가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 한 책’으로 정의한다"고 썼는데, 내 분류상 그는 논픽션의 범위를 너무 좁게 잡았다. 논픽션이란 정의상 픽션이 아닌 글의 집합. 다종다양한 논픽션 가운데 '이야기형'은 일부일 뿐이다.

  처음엔 대충 '내러티브 논픽션'이라고 정리하고 인터뷰이 탐색을 시작했다. 근데 갈수록 작가 선정에서 충돌이 생기는 거다. 찾기 어려워서 그렇겠거니 싶은데, 내러티브가 뭔지, 내러티브의 수준이 한 책에서 어느정도로 나타나야 하는지 구상도 각자 다른 것 같다. 대충 정한 말일 뿐, 사회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딱 정립된 개념도 없다. 톰 울프가 말하는 '뉴 저널리즘'이라면 글쎄 꼭 그건 아니고요. 누군가는 "팩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소설적 요소를 가미했다"는데, 취재는 안되지만 전체 맥락에서 대사를 추정하는 등 행위가 용납되는지 그 여부와 범위도 각자 생각이 다르고. 이야기의 중심 인물은 꼭 한명이어야 하나? 아니어도 된다면 몇명까지 괜찮은가? 사람이어야만 하는가? 우리만의 정의를 일단 해두고, 인터뷰이의 서술이 우리 정의와 꼭 맞지 않을 때 뭐가 다른지, 다른데도 왜 이 사람을 다루는지 써두는 식으로 하면 되지 않나- 생각하며 결국 대충 넘어갔다. 느슨하게 정의하면 여러 하위 분류가 가능할 것이니.


  참고차 써두자면, 비슷한 정의를 시도한 이들이 앞서 없지 않았다. 나랑은 좀 생각이 다른 면도 있지만, 재밌는 분류라고 생각. 소설가 임현은 정보전달 위주의 논픽션을 '저널리즘적'이라고 했는데, 저널리즘도 범위가 넓기 때문에 이렇게 쓰면 개념에 혼동이 생긴다. '크리에이티브 논픽션'이란 말은 꽤 재밌다만...


  임현 작가는 “저널리즘적인 논픽션이 아니라,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을 주축으로 삼는 ‘크리에이티브 논픽션’이라 하는데 이걸 에픽을 통해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69/0000544173?sid=103


  논픽션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정의하지 않는다. ‘픽션이 아닌 글’을 모두 가리킨다. 한국 출판시장에서 논픽션은 거의 다 설명과 간단한 체험을 곁들여 개념을 전하는 ‘에세이 논픽션’이다. 가령 말콤 글래드웰의 에세이도 논픽션이다. 누군가(인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한다는 이야기 구조를 가진 논픽션이 있다. 이야기 논픽션이다. 미국 저널리즘과 출판계에서 ‘이야기 논픽션’(narrative nonfiction)으로 불린다. 뭔가 어려운 말 같지만, 사건 르포, 전기와 자서전·회고록 등 사실 이미 한국 기자들이 알고 있는 글쓰기 장르다. 다만 한국에서 많이 읽히지 않을 뿐.

https://naver.me/5D34vqal


  허구나 팩션이나 재연 장면을 지어내지 않은, 이런 종류의 글쓰기가 여전히 ‘픽션 아닌 것’으로만 불리어서는 좀 억울한 듯하다. 버젓이 ‘진짜 이야기’(true story)라는 이름이 있으니.

https://naver.me/FsKXyVrg


  아무튼, 이정도 규정에 들어맞는 한국 저자가 생각보다 너무 적다. 스토리성을 일부 지닌 책도 없지 않으나, 기획기사 수준으로 책 전체의 앞부분에, 혹은 각 챕터의 시작점에 짧게 '사례'처럼 소개하는 데서 그친다.

  지금까지 작업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여성 작가가 없다는 것. 이대로면 '희정'이 유일 여성 저자가 될 판이다. 작가들의 작품 소재가 제한적이란 것도 눈에 밟힌다. 지금까지 인터뷰한 작가들을 정리하자면 김충식(역사), 고경태(역사, 인권), 김동진(역사), 고나무(범죄), 장강명(문학 장), 이범준(자이니치), 박상규(범죄, 인권), 한승태(동물, 노동). 여기에 김당(역사), 희정(노동)이 더해진다. 여성 인권, 장애인, 최근 노동 이슈 등 소수자성 다룬 논픽션이 많지 않다. 외국엔 기업, 부동산, 주식 등 경제 이슈를 다룬 이야기 논픽션도 많은데 한국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정치 논픽션도 거의 없다.

  가장 이상한 건 '빈곤' '재난'을 다룬 논픽션이 적다는 것이다. 외국은 두 소재 논픽션이 다수다. 예를 들어 2008년 허리케인 카타리나 당시 메모리얼 병원에서 벌어진 '환자 살해' 사건을 다룬 <재난 그 이후>, 2005년 일본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와 이후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유가족의 분투를 다룬 <궤도 이탈>, '옴 진리교 사린가스 살포사건'을 다룬 <언더그라운드>, 1985년 JAL 점보기 추락 사고 후 유가족과의 면담으로 쓴 책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 등이 재난 논픽션이다. 빈곤 논픽션은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캐서린 부 <안나와디의 아이들>, 매튜 데스먼드 <쫓겨난 사람들> 정도가 떠오른다. 한국에서는 사회학자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 정도가 그나마 가까울까. 두 소재 논픽션이 없진 않은데 대부분 에세이형이거나 사회과학 연구물이다. <노랑의 미로>를 쓰신 이문영 기자가 인터뷰에 응한다면 좋을 터인데. 왜 이런 장르 논픽션이 한국에 없는가라는 물음 자체가 서문 또는 후기의 한 주제가 될 수도 있겠다.

  특정 지역, 특히 도시문제를 다룬 책이 없는 것도 흥미롭다. <하틀랜드>, <제인스빌 이야기> 등이 외국엔 있음. <힐빌리의 노래>도. 한국에는 방준호 <실직도시> 정도일까. <머니볼>, <블라인드 사이드> 같은 책도 없다. 둘 다 스포츠물인데, 마이클 루이스가 썼다. 이용균 선배가 쓴 <야구멘터리> 정도가 그래도 가까워보이는데, 마이클 루이스 책과는 좀 다르다. 이 선배 책이 내러티브를 갖고 있어서 좋기는 한데, 루이스 책은 좀 더 입체적이다. 한 이야기를 여러 레이어로 보여준다는 의미가 아니고... 전자는 경영도서로, 후자는 빈곤을 다룬 교양서로도 읽을 만하다는 뜻. 무관해 보이는 소재를 통해 다른 깨달음으로 이르게 만드는 재주를 보여준 책이 한국에 없다는 거, 이거 슬픈 일입니다...

  물론 여기 든 외국 책 예시 모두가 우리 주제에 맞는 책이라곤 생각지 않고, 오히려 한국 책이라면 킬할 책도 꽤 될 것이다. 그만큼 지금 인터뷰이 선정 기준이 빡빡한 편. 벌써 5월 첫주 영업일(?)이 끝났다. 이를 어쩌나. 마감이 다가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변화한 세계, 남은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