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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05. 2023

체중계의 도덕

2023.06.05. 마이클 모스, <음식 중독>


일어나자마자 화장대 밑으로 발을 밀어넣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엄지발가락 끝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면 있는 힘껏 구부려 하얗고 차가운 기계에 고정시킨다. 심호흡을 하고, 당겨낸 물건 위에 올라서면 숫자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83, 84, 85, 늘어나는 숫자만큼 한숨을 쉰다. 마침내 숫자의 변화량이 0에 수렴하면, 오늘도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애 기계에 화를 푼다고들 하는데, 문명인은 그저 자학할 뿐이다. 자신의 의지 박약에 한탄하며. (나는 문명을 존중한다)


'체중'이 문제가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무게를 재는 저울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지만,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 몸무게를 재고, 스트레스를 받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삼게된 지는 고작 4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오래된 종교의 교리들에서 식탐은 오랫동안 죄였지만, 여기엔 객관적인 단죄의 기준이 존재할 수 없었다. 인간 신체의 변화를 양적으로 측정하는 데 관심을 보이는 르네상스 시대가 되어서야, 체중은 문제의 핵심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과학자이자 의사였던 산토리오 산토리오는 천칭의자로 체중계를 만들고 그 위에서 식사와 용변을 하며 몸무게의 변화를 오랫동안 측정하여, 인간의 신진대사에 대한 양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양적으로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는 '체중'을 건강의 중심에 놓고, 이를 적절히 균형잡힌 상태로 유지하는 상황을 이상적이라 보았다. '정상체중'은 이제, 체중을 각자가 적당히 지켜야 할 삶에 대한 어떤 도덕적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체중...도덕이랄까?)


19세기가 되면, 독일, 미국, 영국 등에서 동전을 집어넣고 몸무게를 잴 수 있는 공공 체중계들이 기차역, 식당, 은행 곳곳에 놓였다. 자기 몸무게를 재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던 체중계는 사람들의 관심과 구경거리인 동시에, 스스로를 규율하는 장치로서 작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중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도덕적 규율로서 확고해질수록, 체중계는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들어갔다. 오늘 내가 숨을 참고 올라갔던 두 발 너비의 그 체중계가 위치한 그 자리로. 자신의 의지 박약을 한탄하고, 또 다시 내일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슬픔의 골짜기에 체중계가 있다.


하지만 체중이 정말로 한 사람의 의지 문제일까? 체중을 유지하려면, 적당히 먹어야 한다. 헌데 먹는 것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떤가? 상식적으로는 내가 내키면 먹고, 아니면 치우는 게 음식이니 의지만 잘 갖추면 음식의 유혹은 충분히 피할 수 있지 않나? 그래서 다양한 다이어트 프로그램들이 존재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을 빼서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증언하는 이들이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간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예상하다시피, <음식 중독>은 그게 정말 네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며, 심지어 그렇게 될 수 없도록 상황이 바뀌어왔음을 지적한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인간 욕망의 생물학적 원리를 설명하는 데 할애된다. 중독을 설명하고, 우리의 본성을 설명하고, 이 때문에 우리가 음식에 중독되기 쉽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나면, 후반부에선 그 취약한 성향을 공략해 온 식품업체들의 전략과 그 결과를 나열한다. 심지어 가공식품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식품들도 여전히 문제인데, 이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음식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역설계'를 꿈꾼다. 중독의 기제를 알면, 그것을 푸는 방법도 어렵지만 짐작 가능할 것이리라.


담배회사 필립모리스의 CEO인 시만치크가 정의한 바와 같이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중독이란 "어떤 사람들이 그만두기 힘들어하는 반복적인 행동"이다. 보통은 큰 자각 없이 이루어지고, 스스로 자제할 수 없으며, 앞으로 계속 반복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행동이 중독이다. 음식이 마약이나 담배처럼 몸에 해롭거나, 먹지 않으면 고통을 일으킨다거나 하지는 않는데, 어떻게 중독을 일으킨다는 것일까?


음식은 맛으로도 우리를 유혹하지만, 기억과 감정, 식감과 같은 다른 감각 경험으로도 우리를 유혹한다. 나이가 들어 고급진 음식을 먹어본 이후에도 유년기의 싸구려 음식을 찾는 경험이 있지 않은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기억과 연결된 음식들은 우리의 기분이 언짢을 때마다 머리 속에 떠오를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음식들을 어디서나 싼 가격에 구할 수 있다면, 그 무엇보다도 보상을 확실하게 얻어낼 수 있는 물질로 기능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 인간의 본성 자체가 음식에 끌리게끔 되어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책의 절반을 할애하여 중독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건, 무엇인가가 '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임을 증명해야 개인의 의지로 모든 책임을 돌리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긴 시간 동안 진화해왔지만, 적어도 지난 수천년간은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대신 인간이 그렇게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은 지난 수천년간 꽤 연구가 잘 되었다. 특히 이 음식을 주요 상품 시장으로 삼는 식품업체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더 많은 음식을 팔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거다 리스가 <도박>에서도 비슷하게 말한 바처럼, 중독의 핵심은 '속도'다. 빠르게 쾌락을 느끼고 다시 또 빠르게 갈망하게 만들면서, 아주 빠르게 그 쾌락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이 격정의 한 주기를 가능하면 빠르게 만들어야 사람들은 쉽게 그 물질에 중독된다. 우리의 감각에 온전하게 들러붙는 '초가공식품'은 빠르게 음식으로부터 우리가 쾌감을 얻도록 하는 동시에, 금방 질리게 만든다. 또 아주 가까이서 싼 가격에 이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쉽게 중독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반복된 행동으로 인해 깨진 건강의 균형 덕에 중독의 즐거움과 고통은 배로 늘어난다. 이른바 "격정의 서막"이 오른다.


음식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중독 상태에 빠지면 생각은 급격히 약해지고 기호와 갈망이 지배한다. 그리고 무엇을 얼마나 먹느냐에 대한 결정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닌 다른 것이 좌우한다. 즉 우리가 선택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음식에 중독성이 있다기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먹는 것에 끌리는데 기업들이 음식을 바꿔 놓았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몸의 유전자가 변화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갑작스럽게 비만 인구가 늘고 섭식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면 이는 인간의 취약한 본성을 공략한 결과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초가공식품을 피하면 되는 문제일까? 안타깝게도 대형 식품업체들은 '건강' 마케팅에 도가 튼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살찌게 하는 식품도, 날씬하게 하는 식품도 생산"하면서, "비만과 정상 체중을 오가는 많은 사람에게 판매할 코칭 프로그램"으로 수익을 챙기는 것이 대형 식품 업체들이다. 다이어트 식품 브랜드를 인수하거나, 큰 변별점이 없는 제품을 생산하며 '대안'이라 내세우면서 식품업체들은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법적으로 거슬리는 사람이나 절차가 있다면, 그동안 벌어들인 돈이 활약할 기회다. (라벨에서 정보를 획득하기 어려운 것도, 식품 제조업체에 비만의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것도)


이제는 익숙해진 제로 마케팅은, 어떤 '기만'을 드러낸다. 어떤 '제로' 쿠키에 쓰인 말티톨은 혈당지수(GI)와 칼로리가 높아 사실상 당뇨환자들이나 다이어터에겐 적합하지 않지만, 라벨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설탕 제로'의 이미지로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음료수에 설탕 대체제로 쓰이는 아스파탐은 그 자체로도 소화시스템에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지만, 음료로 당을 섭취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신체에 적합하지 않아 벌어지는 문제도 있다. 그럼에도 설탕을 대체했다는 이유로 '건강'한 것일까?


적절한 규제 없이 우리 본성의 생물학적 원리를 교란하는 일들을 내버려둔다면, "섭식 장애가 개인의 자제력 부족 탓이라는 믿음을 지속시키기 위해 갖은 수법을 사용하며 우리 삶에 지배력을 발휘"하는 시대를 끝장내지 못할 것이다. 아는 것만으로 뭔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만큼 순진하진 않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뭔가를 먹는 것이 꼭 내 의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타트체리'에 손은 조금 덜 가지 않을까.


길은 멀다. 이제 식품 업체뿐만 아니라, 음식 중독은 특정한 산업들의 기초를 구성한다. 쉽게 사라질까? 때가 되면 등장하는 건강기능식품 열풍이, 다이어트 열풍이 쉽게 사라질까? 특히나 그 둘을 끊임없이 언급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미디어가 다른 이윤 창출의 수단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PD저널에 송고한 글의 수정 전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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