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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24. 2023

죽은 유대인의 사회

23.06.24. 데어라 혼 ,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그애들은 멍청한 아이들도 아니었고, 아마도 편견이 심한 아이들은 더욱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단히 일반적이고 선의의 교육을 받은 그애들은 주로 사람들이 유대인을 죽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에 대해 배웠다. 세상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그애들도 오직 죽은 유대인들만 접해본 것이었다. 유일한 특성이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고, 그렇게 죽임을 당한 사실이 우리에게 무언가 교훈을 준다는 분명한 목적에 부합되는 사람들만 접해본 것이었다. 유대인은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목표를 위해 죽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형적인 유대인의 외모에 맞지 않는다며 자신을 의심하는 동갑내기 학생들의 의심의 눈초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자신이 도덕 교과의 '교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선의에 기반한 문화사업들'이 유대인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단지 인간 존엄에 대한 심각한 모욕임을 깨달았다. 안네 프랑크의 집을 방문하려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그 집에서 일하는 유대인이 자신들의 전통 모자인 야물커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 현실이었다.


죽어서 미래가 사라진 인물은 사랑하기 쉽다. 그의 삶을 멋대로 상상하는 일은 무해하다. 특히 그가 생전에 남긴 작품이 자신에게 어떤 죄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안타까워할 수 있다면 더더욱. 안네 프랑크는 홀로코스트로 끌려갔지만, 그 홀로코스트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수기보다 그 일기장을 끌어안는 일은 도덕적 부담이 덜하다. 우리가 속한 사회를, 그리고 그 속의 우리를 비난하는 글을 정면으로 끌어안기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들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고,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음 처리된 것처럼 고여 있는 고요함 속에는 오직 조용한, 간신히 들리는 소음만이 존재했다. 죽은 이들의 몸에 있는 각각 다른 구멍들로부터 체액이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 아는 사람의 시체를 알아보게 되는 일이 자주 생긴다." 




러시아의 탄압과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반강제로 하얼빈으로 이주하여 도시를 개척했던 유대인들은, 그 뒤 만주를 지배한 일본과 중국의 필요에 의해 사실상 모든 것을 두고 쫓겨났다. 때로는 자신의 목숨조차 두고 와야 했다. 그리고 다시 관광적 목적에 의해, 혹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정치적 목적에 의해 그들의 흔적은 박제된 채 부활했다.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을 때에야 기념하듯 후대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용도로서. 


하얼빈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그리고 픽션과 제도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죽은 상태'로만 사랑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도 '죽은 듯이' 존재할 때에만 용인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자신의 해석에 엇나가고, 삶에 육박해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될 때에는 죽어 있든 살아 있는 더 이상 수용되지 않는다. 지배 문화가 사회적 약자의 죽음을 활용하는 방식은 이토록 전형적이다. 나의 뜻에 어긋나지 않은 채 죽은 듯이 살 것.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지만,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스스로 반복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자신의 무해함과 무지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가장 잔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당신에 대해 잘 모를 뿐이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당신의 삶을 내 방식대로 재단하는 데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다...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통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 자신이 제멋대로 재단한 사람들에게 떠넘기기 위해 자신의 무해와 무지를 결합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그 결과에 책임질 필요가 있다. 고통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유하는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치밀한 사유의 결과다. 자신이 떠안아야 할 고통과 책임의 규모를 파악하고 자신이 이를 떠안기 위해 들여야 할 노력을 계산해, 이 모든 것이 단지 '외면'하면 가벼워진다는 사실을 엄밀하게 파악한 사람들이 지을 수 있는 진부한 결론이다. 아이히만은 사유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사유의 결과가 진부하기 짝이 없는 회피였기 때문에 끔찍할 정도로 진부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잔혹한 결과를 만들어 낼 절차들에 서명했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내가 이 모든 외설적인 사실들을 어떤 목적으로 이렇게 알갱이 하나 크기까지 자세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전시에서 잔혹한 사실들 하나하나를 일별하고 있는 정보들 사이를 거닐면서 그는 이것이 고통을 남의 일로 - 또는 지나간 것으로 - 여기게 만드는 동시에, 이정도 수준이 아닌 다른 모든 죽음을 '별것 아닌' 수준으로 격하시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컨대 잦게 발생하는 총기 난사 사고들은 예외적인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이 책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반복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반-XX, 혐오의 정서를 읽어낼 수 있다. 동시에 유대인이라는 존재가 그러한 혐오의 정서의 대표적 피해자이자, 그들이 또 한편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집단적 폭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그런데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정말로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재현된 이미지들을 소비하고 윤리적-도덕적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우월적 위치에 있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가?) 이것을 위선이라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혐오의 덫이 얼마나 강고한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거부감 없는 올바른 피해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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