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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25. 2023

도서관은 살아있다

2023.06.25. 수전 올리언 -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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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파서 일요일 내내 누워 있다가, 저녁을 먹을 때쯤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오래 쉰 덕에 손가락과 눈동자에 힘이 있어 서가를 훑었다. 이럴 땐 오래 묵혀둔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아 수전 올리언의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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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도서관을 사랑했지만 한동안 바쁜 삶에 도서관을 잊어버린 채 살았던 저자는, 남편의 이직으로 인해 서부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곳에서 아들의 수업 과제를 돕다가 우연히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에서 일어났던 대형 화재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상 최악의 미국 공공도서관 화재 사건이었는데 정작 당시에 잘 몰랐다는 사실에 놀란 그는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사건이 발생한 1986년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대형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1월엔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공중에서 폭발해 우주비행사 7명이 목숨을 잃었고, 4월엔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 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체르노빌의 이야기가 아직 지면을 차지하던 4월 29일, 200만 권의 책, 4000개의 다큐멘터리 필름 등이 소장된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은 화마에 휩싸인다.


처음 화재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낡은 건물에서 으레 일어나는 잘못된 경보라고 생각했다. 수시로 경보가 잘못 울렸기 때문에, 현장에 도착한 소방관들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경보는 쉽사리 해제되지 않았고, 원인을 찾기 위해 좁고 복잡한 건물로 소방관들이 진입하자 모든 소장품들을 집어삼킬 불씨가 보였다. 저자는 마치 눈 앞에서 불길을 보는 듯이 그 순간을 묘사한다.


"온도가 섭씨 233도[화씨 451도 - 인용자]까지 올라갔고 책들이 타기 시작했다. 책 표지들이 팝콘처럼 팡팡 터지고 페이지들이 불이 붙어 검게 그을리더니 제본이 떨어져 날아갔다. 불은 소설 코너를 스쳐 지나가면서 도중에 있는 것을 모조리 불태웠다. 그러고는 곧 요리책들로 손을 뻗어 책들을 시커멓게 구웠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레이 브레드버리의 <화씨 451>도 책의 제목과 같은 온도로 불타 사라졌다. 인간의 이야기로 가득 찬 책들이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7시간 38분이었다. 


 “책은 일종의 문화적 DNA, 한 사회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나타내는 부호다. 한 문화의 모든 경이와 실패, 승리자와 악인, 모든 전설과 아이디어와 계시들이 책에 영원히 남는다. 이런 책을 파괴하는 행동은 그 문화와 역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과거와 미래의 연속성이 파열되었다고 말하는 강렬한 방법이다. 책을 빼앗는 것은 사회가 공유한 기억을 뺏는 것이다. 꿈꿀 수 있는 능력을 빼앗는 것과 비슷하다. 책을 파괴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나쁜 무언가를 선고하는 행위다. 그 문화가 아예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도서관은 자주 방화의 대상이 되었다. 책을 태운다고 딱히 생겨날 이득은 없다. 하지만 도서관을 품고 있는 사회, 국가, 민족에게 가해질 고통은 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남을 기록과 사상을 두려워했다. 서로의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전쟁 상황에서 도서관은 최우선 폭격 목표였다.  도서관에 피어오르는 불은 대부분 '반달리즘'의 결과였다. 


용의자를 찾는 데 사람들은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7시간 넘게 타오른 불에 발화 원인이 될 현장조차 제대로 남아 있질 않아서 조사는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언론 기사엔 어느새 '방화'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날 도서관을 찾아온 미심쩍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두 궁금해했고, 그날 처음 그곳에 방문한 금발의 남자가 용의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누군가 몽타주와 닮은 사람을 안다는 제보를 경찰에 전했다. 용의자의 신원은 금방 확인되었다. 파트타임 배우였던 해리 피크였다.


실제로 그는 화재가 발생한 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도서관에 들어갔다 나왔고, 방화도 했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전했다. 하지만 그를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그 말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허풍이 심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자신의 말을 끊임없이 바꾸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공간에 자신이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책에 별로 관심도 없는 사람이, 무슨 원한이 있어 도서관에 불을 질렀을까?


하지만 그의 거짓말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누군가 그가 몽타주와 닮았다고 말했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기도 했다. 게다가 소방관직에 지원했었다는 사실은 결정적으로 그를 의심하는 증거로 작용했다. 실제로 그 무렵 소방대장이자 방화 전문가 존 레너드 오르가 알고보니 로스앤젤레스와 그 주변에서 2,000건 넘는 방화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불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방관직에 지원했었던 건 아닐까? 의심이 확증으로 바뀌는 데엔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해리의 주변 인물들을 다양하게 취재한 저자는 의심한다. 그가 정말로 방화를 저질렀을까? 그의 어린 시절은 좌절감, 열등감, 가난으로 인해서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가 도서관에 불을 질러야 할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그의 알리바이가 끊임없이 바뀌긴 했지만, 그가 당일에 도서관에 없었을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그의 계속된 거짓말은 화재를 '방화'로 단정짓기에 충분했다. 형사적 책임은 면했지만 그는 사건 이후 '방화범'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저자는 도서관 건물의 역사와 방화 조사의 발전과정을 더듬어 보며 '방화'가 아닐 가능성을 추적한다. 1926년 건립된 오래된 도서관 곳곳은 언제든 화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커피메이커의 전력량을 도서관의 낡은 배선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용이 금지된 적도 있고, 낡은 선풍기만으로는 열기를 식힐 수 없어 내부 온도가 35도까지 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책이 물에 젖지 않아야 해서 당시엔 스프링클러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60년 가까이 도서관이 버텨오면서, 도서관은 조금씩 낡아 허물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사건이 발생 한 지 6년이 지난 1992년 미국 방화 협회는 화재 조사 방법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그간 방화 사건에 적용된 수많은 가정들이 과학적 근거가 없음을 증명했다. 게다가 전 소방관이자 방화조사관인 폴 비버가 만든 <이노선스 프로젝트>에서 수십 개의 방화 사건들을 과학적으로 재검토한 결과 대상 사건의 2/3이 방화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해리 역시 편견으로 인해 지은 적 없는 범죄의 대가를 치렀던 것은 아닐까?


1993년 4월 해리 피크는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강압 수사를 통한 거짓 자백을 유도했다는 이유로 조사 당국을 상대로 1,500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한 후 35,000달러를 받는 것으로 합의를 본지 2년이 지난 후였다. 도서관은 해리가 사망한 지 6개월이 지난 1993년 10월 3일 재개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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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서로의 힘을 모았기에 도서관은 비교적 빠르게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이 난 도서관으로 달려와 자원 봉사로 힘을 보탰다. 서가를 채우기 위한 책을 구매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은 시민들의 기부로 충당했다. 책을 직접 보내거나 소장품을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바깥에서 도서관을 삶의 일부로 품고 있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때로는 분열되고 괴팍해 보이는" 이 도시에서.


"이 긴급한 순간은 로스앤젤레스 시민들로 살아 있는 도서관을 이룬 것 같았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시민들은 공유된 지식을 보호하고 전달하는 체계, 서로를 위해 우리 스스로 지식을 보존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도서관들이 매일 하는 일이었다."


매번 도서관은 불타올랐고, 그 때마다 도서관은 다시 재건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책들을 불태웠으나 여전히 도서관은 다시 수많은 책들로 채워졌다. 도서관은 단순한 책의 보관소가 아니다. 비록 그 시작은 엘리트의 사교공간이자 수많은 장벽들로 가로막힌 제한된 공간이었지만 오늘날 도서관은 모두를 환영하는 곳이자 환대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곳이다. 도서관이 불타는 순간, 도서관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도서관은 다시금 재건의 불빛을 피운다. 그러므로 도서관여행자의 책 제목처럼 "도서관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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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불태우고' 싶어하는 어떤 자치단체장이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 이 책이 싫다면 리처드 오벤든의 <책을 불태우다>를 읽어보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결국 책은 태운다고 태워지지 않으며, 도서관은 도서관을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나누어져 살아있음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깨닫길 바라며.


* PD저널에 최종고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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