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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27. 2023

<피투자자의 시간> 다시 읽기

23.06.27. 미셸 페어 - 피투자자의 시간

"이제 노동자들의 성과나 실적은 직접 평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를 통해 가시화되는 성과와 실적의 표상이 평가된다. 불가피하게 어떤 단락이 일어나고, 노동은 그 자체의 공식적인 목표보다는 표상을 생산하고 조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게 된다." 마크 피셔 - <자본주의 리얼리즘>

영국의 영화감독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2019)에는 부채의 유령이 떠다닌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리키는 건축회사에서 해고를 당한다. 일용직을 전전하면서 빚을 갚으려 노력하지만, 돈이 쉽게 모이질 않는다. 좀 더 빠르게 돈을 모으기 위해 택배 회사에 지원하지만, 제대로 돈을 벌려면 개인적으로 차량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아내도 간병일을 하기 위해선 자동차가 필요했지만, 빚을 빨리 갚고 집을 얻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중고로 판매한다. 그래도 돈이 좀처럼 모이지 않는다. 주차 딱지를 떼이고, 배송을 독촉하는 알람 소리에 시달리다 물건을 잃어버려 변상을 할 일이 계속 쌓인다. 일을 쉬면 영원히 쉬어야 한다. 끝내 갈비뼈가 부러지고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그는 차를 몰고 회사로 향한다. 도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빚은 갚아야 하므로.


정작 그의 삶을 뒤흔들었던 2008년 금융위기를 일으킨 이들은 빚을 갚지 않았다. 리키가 일하기 위해 자동차 한 대를 구매하려 진 빚 때문에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힌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과실을 저지른 금융사들과 은행의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파산이 더 많은 고통을 낳을 수 있다는 미명 아래에 정부는 그들이 진 부채를 탕감했다. 리키와 같은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낸 세금으로 말이다. 채무를 갚지 못한 데 따른 도덕적 죄책감은 왜 이들만의 몫이어야 할까? 심지어 그를 빚의 연쇄 속으로 밀어 넣은 당사자들은 그들의 돈으로 살아난 후에, 다시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며 채권자 행세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국가가 금융 자본의 구제를 위해 세금을 투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그 이면에는, 개인의 삶과 국가의 재정 모두를 옥죄고 있는 금융 자본의 힘이 도사리고 있다. 돈과 힘이 없는 이들에게 이중의 부채를 지우는 방식으로, 금융 자본이 원하는 대로 국가는 행동했다. 심지어 금융 자본을 규제하겠다고 나선 미국 민주당이 집권하던 시기였음에도 국가는 그다지 온당하지 못한 선택을 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볼프강 슈트렉의 <시간 벌기>는 민주적 자본주의 국가가 어떻게 자신들의 재정 주도권을 금융 자본에 빼앗기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 197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는 조세 수입과 국가가 운영하는 금융 기관의 예치금, 중앙은행으로부터의 대출 자금 등으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할 재원을 마련했다. 이 '조세 국가'는 1970년대 이윤율 하락과 경기 침체, 인플레이션에 직면해 위기를 맞는다. 


사회 불안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노동당은 보수당에, 민주당은 공화당에 각각 정권을 빼앗겼다. 보수 혁명의 기치를 내건 집권 정당은 강력한 노동 탄압과 감세 정책을 펼쳤다. 또한 인플레이션으로 자산 가치가 하락한 금융 자산 소유자들을 달래기 위해 금융 규제 완화와 강력한 통화 공급 감축 정책이 시행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 실업은 국가의 사회복지 재원에 부담을 일으켰고, 감세정책과 맞물려 세수 부족을 낳았다. 


빈틈을 채운 것은 금융 자본이었다. 국가는 노조에 맞서 복지 프로그램을 삭감하고 공공재를 민영화하는 동시에, 감세로 줄어든 세수를 금융 자본으로부터 빌려 시민을 달래는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부채국가'는 인플레이션을 잡았지만 부채의 증가를 잡진 못했다. 감세 기조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산의 대부분은 부채를 갚는 데 써야 했고, 그렇게 예산을 전용한 덕에 정작 복지 프로그램들은 계속해서 축소되어야 했다.


대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1990년대가 되면, 민간 소비를 부양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대출의 '민주화'를 유도하게 된다. 이를 담당한 것은 보수혁명의 반동으로 집권한 영국의 신노동당과 미국의 민주당이었다. 이들은 개인이 빚을 내길 유도하는 동시에 정부 지출을 줄이는 '재정 건전화 국가'로 변모해 투자자들이 구미를 잃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개인 대출이 늘면 리스크도 늘기 마련이고, 이 리스크가 누적되어 폭발한다면 그동안 '건전한 재정'을 통해 아껴둔 국가 재정은 금융 자본의 구제를 위해 쓰일 수밖에 없다.


"투자자가 행사하는 선별 권력과 끊임없는 등급 평가에 종속된 경제적 행위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기 사업의 이윤율 상승이 아니라 신용도 향상이다."
"정치 지도자는 자신을 뽑아 준 유권자에게 서약한 바를 따라야 하지만 동시에 채권자의 변덕도 신경 써야 한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선거는 이러한 정부의 엇나감에 고삐를 채우기엔 너무 헐거웠다. 몇 년에 한 번씩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권자에 비해, 매일 이탈을 경고하고 평가를 재산정하는 금융 자본과 채권자들은 시간성의 차원에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유권자의 기대도 만족시키고 투자자들의 기대도 만족시켜야 하는 이중의 책임 앞에 높인 정부 운영자들은 모순적인 행보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투자자들의 행태에 불만을 가진 유권자들이 정권을 창출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권은 끊임없는 투자자들의 요구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으며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미셸 페어가 <피투자자의 시간>에서 오늘날의 금융화된 자본주의를 단순히 일국적 차원의 정권 획득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다.


그는 그동안 전통적인 좌파는 신자유주의의 승리 앞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울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진단하면서, 신자유주의자들이 바라던 방식대로 세상이 정말로 굴러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집어낸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이념을 반영한 정치적, 경제적 프로그램들이 도입되자 그들이 바랐던 대로 이윤 극대화를 노리며 기업가 정신을 품고 있는 개인이 아니라, '도박적인' 금융 자본의 투자를 유치하고자 자신의 투자 매력을 상승시키는 데 골몰하는 피투자자의 정체성을 품은 개인이 탄생했는데, 바로 여기에 좌파의 돌파구가 있다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정체성의 탄생은, 완벽한 승리가 아니며, 이렇게 만들어진 주체성을 전유한다면 오늘날의 금융화된 자본주의에 균열을 낼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저자는 세 개의 장에 걸쳐 기업 거버넌스, 국가 통치, 개인의 품행을 다룬다. 1장에서 그는 금융화로 인해 자본 축적에 있어 임금 착취를 통한 이윤의 추출보다는 투자자에 의한 신용의 할당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저항의 지점 역시 투자자의 신용 할당의 기준이 되는 평가치를 변경하는 데에 있음을 역설한다. 2장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볼프강 슈트렉의 <시간 벌기>의 분석에 기초해, '시간성'의 차이를 다룬다. 즉 선거 이외에도 끊임없이 국민 국가의 정치에 압력을 가하는 투자자들의 수단을 전용하자는 것이다. 3장에서는 플랫폼 자본주의와 프레카리아트가 부상한 현실을 분석하며 이를 재전유한 플랫폼 협동조합의 구축을 요청한다. 간단히 말하면 산업 자본주의와 다른 특징을 가진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고유한 주체성의 형식을 파악하고 이를 재전유하자는 주장이다.


"법인과 자연인 모두에게 신용을 개선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세계에서 채권자의 등급 평가 권력에 도전하려면 일차적으로 신용도가 정의되고 분배되는 조건을 변경하기 위한 대항 투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피투자자'다. 산업 자본주의 하에서 임금노동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과된 제약인 동시에 그것을 재전유한 노동자들에게는 권능이었다. 자금을 조달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권한이 금융 자본에 집중된 금융 자본주의에서 피투자자 들은 투자받기 위해 자신의 품행과 기대를 변형시켜야 한다. 이 체제 아래에서 고용인은 피고용인과 협상의 여지가 별로 없다. 투자자를 만족시키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건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피투자자 정체성은 금융화의 부산물이지만 동시에 투자자들의 평가 지표를 뒤흔드는 방식으로 금융화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예속된 신민이지만 이 예속을 가능케 하는 조건에 기반해 특정한 역량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양가성"이 피투자자 정체성의 핵심이다.


"경영자가 기업 소득을 분배하는 약상을 궁극적으로 투자자의 가치 평가가 결정하는 한, 경영자의 중재를 변화시킬 유일한 길은 투자자의 평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피투자자 운동가들은 모든 종류의 시도가 증권화되는 바로 그 무대에서 투기자들에게 맞서야 할 뿐 아니라 이 투기자들이 내기를 거는 심리적 영역에 뛰어들어야 한다."


물론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전반적으로 이론적 가능성에 가깝다. '피투자자'의 정체성이 적용될만한 영역이 너무 협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규범적 우세종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많은 프로파간다들이 피투자자의 정체성을 스스로 받아들이게끔 강요하고 있기는 하다) 애초에 볼프강 슈트렉의 논의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서구 중심부의 몇몇 민주적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도드라지는 현상을 확대 해석하게 되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싶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주변부'로 파급될 가능성이 높은 우세적 이념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새로운 '사회 문제'는 결국 다양한 변종의 형태로 확산될 것이니 이를 적절하게 파악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매우 '중심부' 중심적 생각도 들고 그런 것이다.


투자자들의 '평가 지표'를 바꾸거나 대안적 평가 지표를 제출하기 위해서 넘어야 현실적 제약들의 무게가 책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액티비즘의 사례들을 동원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액티비즘의 결과가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주장의 힘을 약화시킨다. 게다가 모든 사회운동은 주어진 여건과 능력의 한계를 고려하여 집중의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얄팍한 시도들은 자본의 반격 앞에 각개격파될 것이다. 국가 권력은 다양한 액티비즘의 안정적인 성과를 유도하기 위해 필수적일 수도 있다. 실제로 PAH(모기지론 희생자들의 플랫폼)의 '에스크라체'(폭로)를 끝낸 것은 국회의 시민 보안법이었다. 


또한 대항 투기의 영역이 비단 경제적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코다>에 이르러서야 등장하는데, 이 부분이 좀 더 자세하게 논의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누가 어떤 이유로 높이 평가받을 만한지 결정할 권한을 투자자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면 신용도를 둘러싼 경쟁에 뛰어들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의 가치는, 모든 권력의 자리엔 언제나 저항의 자리가 함께 마련되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절망에 가담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는 것을 뚝심 있게 보여주는 데 있다. 게다가 그가 수집한 다양한 실패들은 저항의 경험들로서 유의미하게 축적될 것이다. 오로지 한 가지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그것이 어느 순간 '투항'과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도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도.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시간성이 삭제되어 있는 듯한 자본주의의 영원함을 체념하며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발걸음을 뗄 용기는 생기지 않겠는가. 모두가 '투기'에 익숙하다는 사실에서 절망이나 체념이 아니라 '가능성'을 보는 태도는 어쩌면 가장 냉소적인 내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피투자자 운동가들에게 적합한 슬로건은 아마 '또 다른 투기는 가능하다'일 것이다."


* 책을 번역한 민서와 오랜만에 만났다. 여전히 똑똑하고, 여전히 맑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다시 한번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여전히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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