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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28. 2023

뼈의 소리를 들어라

23.06.27. 허철녕 - 206: 사라지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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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철녕의 <206: 사라지지 않는>을 보고 왔다. 아내가 같이 보고 싶다고 해서 만사 제쳐두고 왔다. 영화관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란 으레 그런것이라 (60만번의 트라이를 볼 때는 인디스페이스에 나 혼자였던 적도 있었으니까...) 별로 신경쓰이진 않았다. 끊임없이 발굴 장면에 박수를 치던 중년의 아저씨는 조금 인상에 남았지만 말이다.


2021년 서울독립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2022년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대만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등에 출품되었던 작품인데 이번에 영화관에서도 정식으로 개봉했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와 보상을 전담하는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5년 남짓한 기간동안의 활동을 끝으로 해체된 후, 여전히 끝나지 않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유해 발굴을 위해 꾸려진 한국 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감독은 밀양 송전탑 저지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말해의 사계절>을 촬영하는 동안 만났던 김말해 할머니가 ,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남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우연히 알게 된 유해발굴 공동조사단과 함께 충청도 지역의 민간인 유해 발굴에 직접 참여한다. 그곳엔 서로 다른 배경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제대로 죽지도 못한 이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일념으로 뭉쳐 있었다.


물론 한 인간을 구성하는 206개의 뼈를 온전히 가족에게 돌려주는 일은 쉽지 않다. 존엄한 죽음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좁은 구덩이 앞에 몰아넣고 총으로 쏴 집단으로 학살한 곳에서 발견된 뼈들은 한데 뭉쳐있기 일쑤였다.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도 온 몸으로 죽음의 고통을 증명하고 있었다. 유해가 발견된 경우라면 그나마 낫다. 산 전체가 거대한 봉분인 셈이지 않느냐던 노년의 유족은 발굴에 함께 참여했지만 끝내 아버지의 유해를 찾는 데 실패했다. 어떤 죽음은 끝내 장례조차 지낼 수 없었다. 발굴단장인 박선주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유해를 찾아주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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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 장면이 말해주듯, 유해 위에 흙을 덮은 것은 우리들 자신이었다. 뼈들이 증명하는 참혹한 사실을 구덩이에 밀어 넣고 그 위에 흙을 뿌려 나무를 심었다. 아름답고 푸른 산등성이로 변한 풍경을 바라보며 평화를, 발전을, 사랑을 꿈꾸었다. 몇 미터만 파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과거를 만나길 거부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과거를 구태여 꺼내어 무엇하냐는 회피적 반응부터 죽은 이들은 모두 빨갱이라는 잔인한 소리를 들어가며 살았다. 폭력의 주체인 국가는 짧은 시간의 반성을 제외하고 언제나 죽은 자들을 땅 속에 내버려두었다. 


버려둔 채 시간이 오래 흘렀고, 뼈들 위에 심어둔 나무는 거대하게 자라 과거에 뿌리를 내렸다. 나무 뿌리와 한데 뒤엉킨 넓적다리 뼈들은 조금 더 지나면 바스라질듯 아슬아슬하다. 허나 두꺼운 나무를 끝내 잘라내고, 두개골을 움켜쥐고 있던 뿌리를 조금씩 잘라내자 턱뼈는 마치 죽은 자의 웃음처럼 벌어진다. 거봐라, 영원히 잊혀지는 것은 없지 않느냐, 우리에게 이야기하듯 말이다. 


채 빼내지도 못한 채 머리카락과 한데 엉킨 수많은 비녀들과 사무실 방 하나를 가득 채운 뼈들 사이에 고단한 모습으로 눈을 붙이고 있는 박선주 교수의 얼굴에는 책무를 다해야 할 이들이 방기한 일을 떠맡아야 하는 사람의 표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명을 다했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어려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그가 눈감은 동안 고민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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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 이루어진 동족 상잔의 전쟁은 국가 곳곳에 지독한 상흔을 남겼다. 심지어 전쟁의 전과 후에도 '제대로 죽지 못한 죽음'은 계속되었다. 4.3도 그랬고 5.18도 그랬다. 살아남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나 꼬리표가 달라붙었다. 죽어도 죽은 게 아니고 살아도 산 게 아닌 유령들의 시대였다. 국가의 '붓질'이 멈춘 자리에 시민들이 도착했다. 시민들의 '붓질'을 훑던 영화는 그 붓질로 끌어낸 뼈와 유류품을 한국 근현대사의 소음들과 함께 전시한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진실의 결과를 마주하길 바라면서. 


그런데, 정말 우리는 진실을 마주하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국가의 전쟁범죄에 대해 진정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진심으로,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길 원하는가? 잘 모르겠다. 영화관 안에서는 그 희망을 본 것 같으나, 영화관 바깥으로 돌아와 트위터 타임라인을 내렸을 때 나는 다시 살짝 절망하고 만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나서 적용할 해시태그에 한국전쟁은 있어도 학살은 없더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도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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