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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30. 2023

영화라는 미끼

23.06.28. 조던 필, 놉(NOPE)

* 영화 <놉(Nope)>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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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 다 지나가고 나서야 조던 필의 <놉(Nope)>을 보았다. 그는 대중 영화의 관습(제작사 로고와 자막을 띄우는 시간)을 활용해 적은 수의 컷으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펼친다. 시트콤 코미디의 동원된 웃음소리와 이를 가로지르는 충격음은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지만, 정작 사건 대신 나훔서 3장 6절의 "내가 더러운 걸 네게 던져 널 능욕하여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는 구절만이 화면에 등장한다. 둔탁한 소리는 관객들이 상황을 파악하고픈 욕망을 자극하지만, 신발이 똑바로 서 있는 기이한 장면만 등장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만한 정보는 없다. 흐느끼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무엇인가를 바닥에 내리치는 소리가 관객들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온 후에야, 피가 낭자한 세트장이 드러난다. 손과 입이 피로 물든 침팬치 고디가 누워 있는 출연자의 발을 툭툭 건드리는 동안, 청중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박수' 간판이 깜박거린다. 잔혹한 장면을 보면서 기꺼이 박수를 칠 줄 아는 능숙한 소비자인 우리가 이 장면에도 박수를 보내주기를, 감독은 꽤 직접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마침내 축하의 의미인지 조롱의 의미인지 모를 고깔모자를 벗어던진 고디는 화면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길들여지는 데 실패한 동물은 관람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했다. 자신을 보며 웃음짓던 모든 이들에게 피의 복수를 감행한 고디는 마지막 남은 시선의 주인공을 찾아 냈다. 스크린 너머에서 안전하게 잔혹한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는 관객들에게 넘어오는 고디의 시선은, 불편함을 자아낸다. 과연 당신의 자리는 안전한가?


프랑수아 오종은 영화 <인 더 하우스>에서 그 자리가 안전할 리 없음을 드러낸 바 있다. 제자가 쓴 이야기에 매료된 문학교사 제르망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과 더 매혹적인 글을 보고 싶다는 욕망을 제자인 클로드에게 투사한다. 클로드가 이야기를 쓰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때로는 조언을 베풀고 때로는 클로드가 필요로 하는 불법도 저지른다. 더욱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쓰라고 독촉하면서도, 그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또 다른 제자 라파와 그의 가족이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상황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에서, 진짜 이야기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파멸을 독촉한 셈이었다.


니체의 말을 농담처럼 비틀어 보자면, '당신이 오래 이야기를 바라보면, 이야기도 당신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놉>의 1분 반짜리 몽타주도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크린이라는 반투명한(관객은 사건을 바라보지만, 사건은 관객을 바라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막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잔혹할수록 재미있다. 영화 속에서 잔혹한 사건을 경험하는 주인공은 관객을 바라보지 못하므로, 안전하게 쾌락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순간부터 불안해진다. 스크린 속의 잔혹한 학살극에 우리의 시선은 책임이 없는가? 사건이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러 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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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진행되면서 관객은 이 짧은 몽타주가 한 사건의 단편적 그림임을 알게 된다. 아시안계 미국인인 주프(스티븐 연)는 어린 시절 '꼬마 보안관'이라는 시트콤에 출연해 유명세를 탔지만, 그 인기로 출연한 '고디가 왔다'라는 코미디 쇼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날의 에피소드는 함께사는 침팬지 고디의 생일에 각자가 준비한 생일선물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전달하는 내용이었는데, 아빠의 선물은 고디가 볼 줄 모르는 시계였고, 누나인 메리 조 엘리엇이 준비한 선물은 풍선들이었다. 주프의 선물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의 선물은 겸손하게 무시된다. 하지만 그 덕에 살아남는데, 아빠와 누나의 자기 중심적인 선물이 비극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거대한 선물상자에서 솟아오른 풍선이 세트장 천장에 달린 장치에 닿아 터지면서, 고디가 자극을 받았고 고디를 통제하지 못한 출연자들은 죽거나, 심각하게 다친다.


그리고 서 있는 신발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주인공이 주프이며, 마지막에 고디가 바라보는 인물도 주프라는 사실을 관객들은 알게 된다. 그런데 주프를 바라보던 고디는 가까이 다가와서 자신의 눈을 반투명한 식탁보 너머로 옮긴다. 직접 주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식탁보를 통해서 바라본다. 그리고 주먹을 맞부딪히며 인사를 건넨 후 총살당한다. 조디는 마치 관객에게 두 가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시선을 끌어당기는 잔혹한 사건을 절대 바라보지 말 것, 다른 하나는 바라보고 있더라도 반드시 자신의 시선을 숨길 것. 그렇다면 안전할 것이다.


"방송사는 숨기려 했지만 그 충격적인 장면에 매료된 사람이 많아요." 성인이 된 주프는 조디의 '충고'를 무시한다.(말로 한 적은 없었으므로 충고는 적당하지 않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주프는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를 자신이 기적과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자기에게만 보였던 기적적인 사건 때문에 조디가 자신을 해하지 않은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끝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끄는 '어트랙션'이 가득한 테마 파크를 운영했고, 뷰어Viewer라고 불리는 미지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다시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각광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에 사로잡힌다. 그동안 포기했던 '관종'의 삶을 다시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저 야생 동물(뷰어)을 길들이고 구경거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디가 죽어가면서 그에게 전달한 메시지는 기각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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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화의 시초로 불리는 에드워드 머이브릿지의 <움직이는 말>을 둘러싼, 마치 홍채와도 같은 프레임은 영화 후반부에 들어서 '진 재킷'의 내부에서 다시 한 번 발견된다. 이는 OJ가 자신을 미끼로 '진 재킷'(OJ가 길들이려 했으나 끝내 길들이지 못한 말의 이름을 붙였다)을 꾀어내는 장면을 예비한다. OJ는 진 재킷 앞에서 <움직이는 말>을 재현한다. 영화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힘을 통해 관객들을 변모시키듯이, OJ는 스스로 영화가 되어 '진 재킷'의 파멸을 유도한다. 영화는 '스펙터클'을 경계하라는 도덕적 훈계를 넘어선다.


보지 말라고 하지만, 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나를 매혹하는 스펙터클을 다시금 매혹하는, 쫓고 쫓기는 관계에서 어떤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시선과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벌어지는 '사고'를 통해서 스펙터클 그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눈꺼풀과 같은 얇은 반투명의 막이 필요하다. 어느 순간에는 식탁보로, 어느 순간에는 구름으로, 어느 순간에는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그 막은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다. 어떤 면에서 조던 필이 영화에 거는 기대는 발터 벤야민이 영화에 걸었던 기대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가 영화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스크린 안쪽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막이 사라지면, 영화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이 된다. 그 순간 영화는 상실된다. 막은 영화를 직접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지만, 그렇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영화를 가능케 하는 반투명의 막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경꾼이 되도록 한다. 동시에 그 투명한 막은 언제든 영화의 시선에 궤뚫릴 수 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구경꾼으로만 머무를 수 없다. <놉>은 사람들을 잔뜩 불러모아 구경하라고 한 뒤, 당신 구경만 하고 있을 거냐고 묻는 영화다. 영화라는 미끼에 걸려버린 당신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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