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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l 02. 2023

진열장 속 저널리즘

2023.07.01. 바비 젤리저 외 - 저널리즘 선언


“수익 감소, 신뢰도 급감,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정치 지도자들의 저널리즘을 향한 맹렬한 공격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대에 저널리즘의 미래를 비관하는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런 불안 속에서 제도로서 저널리즘이 가진 자율성, 중심성, 응집력, 영속성에 대한 암묵적 가정은 맹신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 저널리즘 선언, 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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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도 반이나 지났다. 새로운 반을 시작하는 책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 사 두었던 바비 젤리저, 파블로 J. 보즈코브스키, 크리스 W. 앤더슨의 <저널리즘 선언Journalism Manifesto: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가방에 집어 넣고 카페로 향했다. 영미권의 언론학자 셋이 함께 쓰고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오마주한 제목을 붙인 소책자인데, 두께는 얇지만 내용은 꽤 묵직하다.


그들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오늘날 저널리즘 제도는 정보원, 규범, 수용자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 저널리즘은 정보원으로부터 뉴스 거리를 확보하고, 그것을 일정한 규범에 따라 뉴스로서 생산하며, 이를 소비한 수용자가 의견을 형성해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행위를 하는 데 있어 이를 활용하는 과정을 포괄하는 시스템을 의미할텐데, 전 차원에 걸쳐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저널리즘 제도에 복무하는 이들은 '뉴스'로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정보의 대다수를 정치적, 경제적 엘리트로부터 얻는다. 그들로부터 확보한 고급 정보를, 뉴스에 충분히 비용을 지불하면서 소비할 가능성이 높은 엘리트 수용자들에게 전달하고, 이들로부터 생산된 공적 이슈에 대한 정보를 다시 정치적, 경제적 엘리트에게 전달하여 더 나은 통치를 유도할 수 있다면, 저널리즘은 엘리트에 호소하면서도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월터 리프먼이 <여론>에서 '정보국'이라는 제도에 대한 규범적 주장을 펼치면서 제공하는 논리다. 점차 복잡해지는 근대 사회에서 시민들은 모든 사안을 파악하는 지적 노동을 감수할 수 없다. 또한 대의제의 확대로 인해 공적 업무나 산업 분야의 의사결정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지는데, 그들에게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양질의 피드백이 필요하다. 따라서 '저널리즘'은 그들이 업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기 위해 엘리트 사이의 정보 순환을 돕는 기구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저널리즘의 민주주의에서의 역할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20세기 내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62)


하지만 이 때문에 저널리즘의 보도는 일반적인 여론의 지형보다 엘리트 사이의 합의나 분열에 더 의존한다는 '저널리즘 색인화' 현상이 발생한다. 게다가 대니얼 할린은 미국 언론인들이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오로지 '정당한 논쟁'의 영역에 속할 때만 보도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유발한다. 엘리트가 필요하다면, 합의된 사회-정치적 문제를 일부러 논쟁의 영역으로 끌고 가거나, 아니면 정당한 논쟁을 일탈의 영역으로 이끌어 보도의 균형을 무너뜨리거나 가짜 균형을 유도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실제로 특정한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이 엘리트임을 이용하여 헛소리도 뉴스거리가 되도록 행동한다. 자유주의-민주주의에 복무할 마음이 없는 이들이, 자유주의-민주주의 이념의 산물인 저널리즘 제도를 이용하는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있으니, 미디어에 대한 신뢰는 엘리트에 대한 신뢰와 함께 자연스럽게 하락한다는 것이다.


저널리즘 제도 내에서 통용되는 뉴스 생산의 '규범'들은 서구 민주적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적 인종의 규범을 내부화한 것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의심에 시달리고 있다. 뉴스룸 내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젠더, 인종, 계급, 민족, 직업적 차별의 은폐는 저널리즘 제도에 복무하는 이들이 공유하는 '규범'의 보편성을 의심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규범들 자체에 대한 급진적 문제 제기가 내부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또한 중립, 불편부당, 공정과 같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합의된 바라고 여겨져 당연시된 규범들을 이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 반민주주의자들은, 앞서의 규범이 과연 효과적인 것인지를 묻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 역시 주목받을만 한 다양한 의견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을 보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규범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주어진 기회를 틈타 기존의 저널리즘 제도를 공격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이용해 기자들을 비하하고 저널리즘을 조롱했지만, 기자들은 기자회견에서 의견을 피력하는 방법 이외의 수단을 확보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수용자들은 저널리즘 제도의 생산물인 뉴스를 사실의 이해나 정보의 획득을 위한 용도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의례를 위한 수단으로서 활용하고 있다. 자신이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상대방에게 알리기 위해, 그 지향성에 복무한다고 여겨지는 뉴스를 소비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매스미디어는 더 이상 수용자가 대규모로 존재한다는 것과 수용자가 뉴스를 열렬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동일시할 수 없는 실정이다."(117) 저널리즘 제도에 복무하는 이들은 거부하지만, 수용자들은 뉴스를 일종의 '인덱스'로서 활용한다. 좋은 기사를 쓰면, 독자들이 읽는다는 가정은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전히 뉴스룸에서는 "주류 언론사의 기자와 에디터라면 수용자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그날 가장 뉴스 가치가 높은 기삿거리를 다뤄야 한다"(112)는 전제를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저널리즘은 무엇이 뉴스가 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이며, 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일련의 규범들에 의존하고, 이로서 특정한 주제와 정보원에 가치를 높게 부여하는 행위임을 포기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부도덕한 무언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수준이 높은 기사들을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신문을 읽거나 뉴스 사이트에 접속하지 않는다.


저널리즘 노동자가 여전히 수용자의 선호를 '계몽'할 각오가 되어 있는 한에서, 수용자들의 선호와 습관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비록 몇몇 좋은 기자들과 괜찮은 미디어 조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이 수용자를 놓치고 있는 것은 분명해진다. 언론 기업의 안정적인 수입의 기반이었던 '관심'은 이제 '관심경제'의 사업가들의 차지가 되었다. 뉴스 수용자의 관심에 대해 진지하게 반응할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광고 수입을 구독제로 바꾼다고 한다면 누가 뉴스에 비용을 지불할까? 개인이 스스로 '뉴스'라 정의한 정보들을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 테크 기업들이 기존의 저널리즘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변형하여 흡수하는 상황 - 광고를 보면 구독료를 할인해 드립니다! - 은 뉴스룸이 더 이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는 시대임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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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제도에 복무하는 이들은 자신이 기대어 서 있는 세계의 조건들을 망각하고,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전에 하던 대로만 반복하면 기존의 권위와 기능을 되찾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저널리즘 제도는 영속적이거나 자율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든 조건의 변화에 따라 소멸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따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고유한 규범이나 습속을 지니고 있거나 자본주의 시스템과 다른 형태로 굴러가지도 않는다. 존재는 어떻게 하더라도 수용자들의 삶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며, 사회의 응집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사회를 분열시키는 데 속수무책으로 이용당하는 상황에서 놓여있기도 하다.


저널리즘 제도의 '소멸'과 '위기'를 논해온 지는 오래지만, 대부분의 '위기'는 '극복'을 가정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마음으로, 마치 몇 가지 사소한 문제들만 해결하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기계로서 저널리즘을 가정하고 있는 시선들이다. 또는 여전히 핵심적인 조건들에는 변화가 없으며, 단지 몇몇의 일탈 사례들을 저널리즘의 '위기'로 침소봉대하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한 위기론은 대부분 특정한 목적을 배경으로 한다. 현재의 저널리즘 제도의 유산을 별다른 노력 없이 획책하고자 하는 이들이 내뱉는 위기론이 그러한 사례다. 하지만 이 책에서 논하는 저널리즘의 위기는, 그것이 딛고 있는 자유주의-민주주의의 이념 자체의 위기다. 그것의 가치에 대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어떻게 저널리즘은 오늘날의 변화된 물적 조건에 맞게끔 '조응'시킬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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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주장하는 대안은 개혁적 노선과 혁명적 노선 두 가지인데, 사실상 추상적인 논의에 그치는 혁명적 노선뿐만 아니라 구체적 조치를 언급하는 개혁적 노선도 그 실현 가능성의 차원에서 보면 충분히 급진적으로 보인다. 저널리즘 제도의 탄생과 당위성의 기초가 되는 자유주의-민주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자는 것인데, "전통적인 주류 언론의 규범적 구조가 일상적으로 시야로부터 밀어내는 것들을 명확하게 가시화하고자"(138) 노력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널리즘이 우선시할 엘리트는 더 이상 고위직이 아닌 역사적으로 권리를 박탈당해온 집단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들일 테고, 따라서 뉴스가 전하는 목소리, 염려, 사회구조는 확장될 수 있다. 저널리즘 신전의 엘리트 멤버십은 더 개방적이고 공평한 기준에 따라 운영될 것이다."(135-136) 는 선언에 이른다. 나는 이러한 선언도 그렇게 쉽게 수용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들의 주장 가운데 어떤 지점들은, 분명히 신실하게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저널리스트들에게 반감을 일으킬만하다. 또한 몇몇 주장들은 일반화되기 어려운 사례라는 반박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논쟁적이고, 편향적이다. 다만 선언의 형태로서 쓰여진 책이기에 감수할만한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선언을 구성하는 거대한 말들 사이에 비어 있는 구체적 내용은, 그 선언의 방향에 동의하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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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본문과 상관이 크게 없는 메모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이기에 남겨둘 필요는 있겠다 생각해서 아래에 부기한다. 별로 정교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언론 기업은 두 개의 시장에 참여한다. 하나는 언론-대중 시장이다. 여기서 언론 기업은 기자-노동자를 고용해 뉴스 상품을 생산하고, 대중은 이를 소비하는 대가로 관심을 지불한다. 이 관심은 다른 시장의 상품이 된다. 언론-광고 시장이다. 여기서 언론 기업은 대중으로부터 되돌려받은 관심을 판매하고 광고주들로부터 돈을 얻는다. 이 돈으로 언론 기업은 기자-노동자를 고용해 첫 번째 시장에 판매할 상품인 뉴스를 만든다. 관심을 매개로 연결된 두 개의 시장은 뉴스 상품을 비교적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뉴스를 직접 광고주들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뉴스에 쏠린 관심을 파는 것이기에 그 뉴스가 일부 광고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생산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저널리즘’에 대한 이상적인 시선 -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의 무기고다 - 은 바로 이 상대적인 자율성에 대한 착각으로부터 나온다. 실제로 저널리즘이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언론 기업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일부분인 한에서 마치 유일하게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 여기는 것은 착각이라는 사실은 지적해야 한다. 오히려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노동자로서 이 ‘균열’을 어떻게 뒤흔들 것인지를 고민한다면, 생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저널리즘’이 불편부당할 수 있고 자신의 조건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무언가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런 착각은 저널리즘 제도 아래에서 노동하는 이들에게 꽤 널리 퍼져있다. 더 나아가서 정치적-경제적 중립을 지켜낼 수 있고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윤리적으로 옹호하는데, 정작 자신의 물리적 조건에 대해서 초연할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그런 주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의문이다.


예컨대 사회적으로 비교적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시선이 ‘오염’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으려면 어떠한 망각을 필요로 하는가? 질문하는 자의 특권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뭇사람들과 같은 처지라고 오해할 수 있으려면 어떤 무지를 필요로 하는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상황을 성찰하지 않고 자신이 ’객관적‘일 수 있다는 믿음을 내보이려면 어느 정도로 뻔뻔해야 하는가? 어떤 점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자신의 조건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경제지들을 참조할 필요도 있다. (물론 위선이 더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왜 자신이 처한 조건들을 투명하게 내 보이면 안되는가? 자신의 편향성과 정파성을 공개적인 투쟁의 내기물로 내맡겨서는 안 되는가? 스스로가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규범들이 어떠한 편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내기는 불가능하다. 극우파와 극단적 중도파들의 공격에 소위 '진보'적인 기자들과 언론 조직이 스스로의 필요성과 유용함을 대중에게 설득해내는 데 실패하는 데엔 이런 시야 상실도 한 몫을 할 것이다. 이게 위기라면 진정한 위기일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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