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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Jul 07. 2023

나는 베버를 잘못 읽었다

230706

    요며칠 막스 베버의 책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읽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이후 처음이니 16년 만에 들춰본 셈인데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첫째는 장정. 예전에 읽은 판본은 전성우 교수가 번역한 <직업으로서의 정치>인데 얇고 해제가 좀 부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박상훈 박사가 옮긴 이번 버전은 해제가 매우 길고 충실하다(번역이 더 좋아졌느냐면 그건 잘 모르겠다).

  둘째는 책을 읽으며 든 내 감상이다. 전에는 책 말미에 나오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차이가 흥미롭더니, 이번엔 딱히 그 부분에서 감흥을 못느꼈다. 오히려 그 전까지, '지도자 선출 민주주의' 개념 정립과 '정당 머신'의 출현, 관료화, 의회와 지도자 사이 미묘한 관계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여기까지 이해하고 나야 베버가 '직업 정치가'에게 바람직한 윤리에 관해 논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전에는 대체 뭘 읽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기둥 없이 지붕만 그린 꼴이었다.



  '지도자 선출 민주주의'는 통상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적 관점으로 이해되는 개념이다. 민주주의란 대중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루소가 영국의 민주주의를 놓고 '영국인들은 선거 때만 자유롭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고 비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은 것이 베버의 특이점이다. 그렇다고 긍정한 것 또한 아니다. 그게 현실이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법적으로 정한 절차에 따라 지도자 선출이 이뤄지기에 이러한 민주주의는 언뜻 통치 정당성의 원천을 '합법성'에 두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절차에 따라 대중의 선호를 받는 후보의 경쟁력은 어디까지나 '말'이라는 수단에서 나타난다. 때문에 베버는 현대의 지도자가 '데마고그'이며, 그 권위는 '카리스마적 지배'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머신 정당'은 이같은 지도자를 뒷받침하는 존재다. 정치적 결사체의 규모가 일정 크기를 넘어서게 되면 조직화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전제다. 선거 인력, 비용 등을 조달하려면 조직이 필요한데, 대개는 이를 지역 명사들에게 의존하거나 당원 등이 속한 정당 기구에 기대 충족한다. 베버는 정당 형태가 명사 정당에서 머신 정당으로 이행한다고 본다(그는 '발전 단계'라는 표현을 쓴다).

  문제는 머신 정당이 조직 자체의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로베르트 미헬스가 <정당론>에서 주장한 '과두제의 철칙'이 대표적 예로, 미헬스는 노동자 계급 정당인 사회민주당이 점차 관료화된 결과 노동자 대중보다는 당내 선출되지 않은 엘리트의 이익에 복무하더라는 경험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이를 관료화1이라고 하자.

  미헬스와 달리 베버는 정당의 관료화가 꼭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권력의 또다른 구성요소인 행정부와의 관계 때문이다. 행정 관리로부터 행정 수단의 분리가 근대 국가의 특징이지만, 전문화된 관료는 그 자신의 이해관계를 갖고 사회경제적 기반에서 편향성을 지닌다. 이때 정당의 통일성은 지도자에게 힘을 실어줘 관료화된 국가에 맞서는 역동성을 정치권력에게 부여할 수 있다고 그는 본다.

  의회는 그 유형에 따라 머신 정당이 잘 기능할 수도, 망가질 수도 있는 바탕이다. 베버는 영국과 독일의 의회를 구분한다.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의 개념을 빌리면 영국적 대표는 자신을 선출해준 지역구 투표자의 요구나 의사에 대해 자율성을 갖고 국가 전체의 이익을 고민한다. 반면 독일 의회의 의원들은 지역구 등 특수이익을 대변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베버가 손을 들어주는 쪽은 전자다. 다만 이는 의회가 지도자에게 힘을 더 잘 실어줄 수 있다는 이유여서, 통상적인 '의회주의'와 결별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베버는 반대로 머신 정당이 잘 자리잡았을 때 "대부분의 영국 의원들을 규율이 잘 잡힌 투표 집단에 불과한 존자로 만들었다"고도 쓴다. 의회와 정당은 서로의 형태에 영향을 미친다.)

  이같은 논리 전개는 '독일 정치는 왜 구린가'라는 베버의 문제 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는 의회의 저발전, 지나치게 유능한 행정관료, 이념이나 신념에 복무할 뿐 의회 정치의 장에 들어서길 꺼리는 정당 등 세 가지 원인을 독일 정치의 한계로 본다.

  베버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구분하고 둘의 조화를 강조한 것은 이같은 정치세계의 특성 하에서다. '카리스마적 지배'는 영속하기 어려우며, 지도자 본인은 신념이 굳세고 매력적이라 해도 그의 통치를 하부 단위에서 실천해야 할 동료 내지 지지자까지 그와 같기는 어렵다. 오히려 세속적인 가치에 몰두해 지도자의 의지를 어그러뜨리기 십상이다. 조직화의 문제를 밑바탕에 깐 근대 국가 분석 없이 이 얘기를 할 수 있나. 신념윤리의 예시로 사회주의자나 평화주의 운동가를 거론한 것은 외부 국가와의 전쟁 가능성이란 현상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상 카이저에게 권력이 더 많이 집중된 상태를 베버가 문제시한 것이 흥미롭다. 지도자에게 더 힘이 실리려면 의회가 살아나야 한다는 주장인 셈인데, 요즘의 언론이나 정치학자, 비평가들이 정치를 분석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있어서다. 정당 일체감이야 그렇다 치고, '당정일체'를 강조하는 대통령실과 여당이 과연 건강한가? 최장집은 해제에서 '당내 민주주의'와 '정당 간의 경쟁'을 구분해 베버가 로버트 달과 마찬가지로 후자를 중시했다고 주장하는데, 베버의 이 텍스트만 봐서는 그같은 주장을 찾기 어렵다.

  전문관료와 정무직 관료의 구분, 정치 자원으로서 저널리스트가 가진 한계와 저널리스트의 직업적 덕목 분석, 베버가 비례대표제 반대하는 이유 등은 텍스트 전체로 보면 부차적인 내용이지만 꽤 흥미로웠다. 베버가 그린 미국 민주주의도. 언젠가 학준과 씹어볼 수 있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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