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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24. 2023

문화가 그래서 뭐라고요?

23.06.24. 테리 이글턴, <문화란 무엇인가> 1

간만에 집에 쌓아둔 책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테리 이글턴의 <문화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무슨 내용인지 전혀 파악을 못했던 것 같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영국 문화주의의 선구자들의 책을 좀 읽으려다가 다시금 꺼냈다. 다시 보니 좀 낫다... 이 책의 진수는 2장에 있는데, 다원성 그 자체를 도그마 수준으로 옹호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대한 구좌파의 불편한 심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구절들.


"낯선 사람들을 언제나 가슴에 품어줘야 한다고 상상하는 이들은 감상주의자들뿐이다. 그 낯선 사람 중에는 식민주의자들도 있는 것이다."


"상품보다 더 관대하고 포용적인 것은 없다. 상품은 살 수단을 가지고만 있다면 지위, 계급, 인종, 성별의 구별을 혐오하면서 누구에게나 바싹 파고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문화연구만큼이나 계층의 적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포함한 바로 그 틀을 갉아먹을 수 있는 정치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만 제외하고 모두를 포함한다."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의견이 필요하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이 모든 종류의 의견이 한목소리로 아동 매춘의 폐지를 요구하는 일은 바람직하며, 알라신의 이름으로 죄 없는 시민들을 참수하는 일이 유토피아의 길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 또한 바람직하다. 그런 문제들에서 우리는 각양각색이 아니라 만장일치를 필요로 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은 언제나 '방향성'이 있다. 모든 선택의 순간에 가능성을 여럿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상황을 바꿔낼 수 없다. 방향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방향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어쨌든 그 선택으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선택의 바깥에 혼자 고독하게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존재는, 애초에 선택 그 자체로부터 고립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극단적 중도파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혹은 착각이 이것이다. 


이글턴은 그리하여 주변부, 다양함의 덫에 빠진 이들에 대해 공격을 쏟아낸다. 그들은 사회 모순의 핵심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변죽만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냉소적으로, 핵심 모순은 해결할 수 없으니 침묵하는 대신 그 모순의 주변부의 문제들에 열정을 과도하게 투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는 정치의 핵심인데, 그 부분에 있어서 세계의 변화를 믿지 않는 - 혹은 역사성이 거세된 - 이들은 '배제'를 주저하고 있다고 본다. (이 배제는 절대적이지 않다?) 


"문화연구 담론은 그 자체가 놀랄 만큼 배타적으로, 대체로 섹슈얼리티는 다루지만 사회주의는 다루지 않고, 위반은 다루지만 혁명은 다루지 않는다. 차이는 다루지만 정의는 다루지 않고, 정체성은 다루지만 빈곤의 문화는 다루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학생들은 인종주의자와 동성애 혐오자가 대학에서 발언하는 것을 금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만, 저임금노동 착취자들이나 노조 폐기론을 주창하는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별달리 힘을 쏟지 않는다. 정치적 올바름을 주창하는 자발적 검열자들은 주변성을 찬양하지만, 지금 주변부에 있는 몇몇 부류는 반드시 주변부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배제는 분명한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위험스러운 행위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의 영역에서 몰아내는 것은 또다른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소수자에 대한 존중과 나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을 공론의 장에서 합당하게 대우해주지 않음으로서 얻게 될 고통마저 감내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우리는 끊임없는 공력의 소비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 채로. (설명과 설득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영원한 방향 상실은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결국 방향을 잡고 걸어나가는 실천의 차원에 있다. 


이글턴이 보기에 배제가 불러올 고통은 문화 상대주의로 인해 부풀려져 있다. 보편적인 진리나 가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배제를 실현하는 두려움은 배가된다. 자신의 실천에 그 어떤 보증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도 손쉽게 칼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진리가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보이는 대로만 존재하는 상대적인 무언가라면, 누가 누구를 비난하거나 누가 이 다음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온당한 세계인지 회의로 가득찰 뿐인데. 그리하여 이것은 손쉽게 냉소적인 태도로 귀결된다. 너도 결국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까불었단 말야? 본질적인 무언가가 인간에게 없고 오로지 문화만이 있다면, 문화 그 자체가 "새로운 기반으로 등극"할 뿐이다.


이글턴은 어쨌든 문화보다 더욱 심층적인, 문화를 가능케 하고 필연적으로 만드는 '물질적 조건'에 대해 논한다. 마르크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유물론자이기 때문이다. 문화라는 것도 결국 사람들이 먹고 살만해져야 눈을 돌리는 것이니 물적 조건 없이는 탄생조차 하지 않았을 거 아닌가? 문화라는 것에 어떤 외적 판단 기준을 도입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숨김없이 제시된다. 문화를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 그저 주어진 것이라고 해서 비판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글턴은 문화라는 무기가 이 시간성이 사라지고 대안조차 희미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변혁을 이끌어내는 데 과연 적당한 무기인지를 측정해본다.


1장의 난삽한 문장들은 오히려 2장을 읽은 이후에야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문화는 너무 넓거나 너무 좁고, 의미와 용도가 변화해 왔으며, 쓰는 사람들마다 자기 멋대로 끌어다 쓰고 있다는 점에서 타격용 무기로는 그리 적당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문화는 아무런 쓸모가 없나? 그건 아니다. 문화가 사회적 무의식이라는 본인의 중요한 주장은 3장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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