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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Aug 05. 2023

버티기 위해 필요한 것들

2023.08.05. 곽아람, 공부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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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로하기 위해 애쓰는 책들에서 위안을 얻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버티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부도 체념도 없이' 담담히 서술하는 책들에서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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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선배들은 내게 '대학원이나 가지 그랬냐'는 말을 자주 했다. 책 좋아하고 글 좋아하면서 영상 잘 만들 수 있겠냐는 힐난 혹은 걱정이었다. 몇몇은 그 때 네가 회사를 다닌다는 걸 말렸어야 했다고 후회했고, 몇몇은 그냥 먼 사람이 되었다. 나는 회사 이곳 저곳을 방랑하면서도 정작 일을 그만두진 않았다. 대수로운 말이 아니라고 넘겼으면 좋았을까? 적어도 어릴 적엔 그런 쿨한 태도를 취하기가 어려웠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쓸모가 없나? 매일 밤마다 질문을 곱씹었다. 대학교를 열심히 다닌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수업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큰 강의실에서 수백명이 같이 듣던 수업보다는, 스무 명 남짓 들어갈 작은 강의실에서 너댓쯤 앉아 교수가 한탄하듯 말하던 수업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기억에 남았다는 거 말고, 내 삶에 다시 그때 배우던 것들이 다시금 쓸모있는 날들이 올까? 가늠이 안 되었다.


대학원을 갔다면 조금 달랐을 수도 있지만, 게으른 사람이었기에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해야 할 것들보다는 하고 싶은 일들에 관심이 많았고,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업이 되면 결국 고통을 유발하고야 마니까. 지금처럼 책과 글과 수업을 떠올리면서 위안이 되는지를 더듬는 것 자체가 내가 그것들을 일로서 마주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도피일 수밖에 없다. 곽아람 기자의 <공부의 위로>를 펼쳐보는 것조차도.


주중에 자신을 지우는 글을 쓰고, 그렇게 지워진 자신을 채우려 주말에 글을 쓴다는 곽아람 기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대학교 시절과 졸업 이후에 배웠던 교양 수업들을 돌아보며 그것의 쓸모를 말하려 한다. 교양,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하되 다른 세계가 틈입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과정에서 자신이 어떻게 변하고 성장했는지를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비교적 헐렁한 수업에서도 우리는 무엇인가 배울 수 있었다고 말이다. (물론 그는 박사과정 수료생이라는 함정이 있지만)


그는 다양한 입문, 개론, 이해와 같이 대상이나 역사 전체를 훑는 수업들로부터 깨달음을 길어 올린다. 나는 그가 깨달은 것들 가운데 크고 무겁고 중요한 것보다 작고 가볍고 시시한 것들이 맘에 들었다. 가령 이런 것들. 미술사 수업에서 알베르티의 '창문 이론'에 대해 듣고 그 말이 아름다워 그림을 볼 때마다 레이스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는 창문을 떠올리게 되었다거나, 한문 수업에서 판교(板橋)가 주로 친구를 떠나보내는 장면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을 배우고 나서 판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고 신도시를 애틋하게 기억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나도 그런 시시한 것들을 사랑했다. 교양 수업이 분명 나에게 중요한 삶의 가르침을 주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사물들의 뒷이야기나 단어를 보면 떠오를만한 일화들로 킥킥대던 순간들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사소한 순간들 덕에 삶을 지탱했다. 남들도 다 배울만한 중요한 교훈들은 서로 스스로 배우는 것이 낫겠고, 어쩌면 이런 작은 것들이 어떻게 나를, 사람들을 버티게 만드는지를 되짚어보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알량한 생각.


1학년 때 들었던 공연 예술의 이해라는 개론 수업에서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세 번의 현대 공연 예술을 봐야 했다. 그 중 하나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었다. 소격효과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였는데, 관객들이 극에 몰입할 때마다 리듬을 깨고 지금 당신이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일깨우는 극적 장치였다. 강사는 가끔은 고개를 돌려서 좌우를 살펴야 하는 게 꼭 극에만 해당되는 걸까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강의실을 돌아보았다. 함께 고개를 돌리던 친구들이 시선이 맞았을 때, 우리는 이 수업이 서로를 얼마나 바꾸게 될 지를 직감했다.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는 전공을 정하기 위해선 반드시 들어야 하는 전공 필수 강의 중 하나였다. 말이 어떻게 상대방에게 가 닿는 것인지가 내내 궁금했던 - 그것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나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불만 때문이었을 것이다 - 나로서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 내용은 내 생각관 사뭇 달랐다. 언제나 메시지의 수발신이 완료되는 세계만을 다뤘다. 우리의 소통은 '소통한다는 믿음'을 교환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커졌다. 더 깊게 배우면 내 생각도 달라질까? 대답에 가장 확신이 없었기에 전공을 택했다.


대부분의 수업은 이후의 삶에 무용했다. 특히나 밥벌이에 유용한 수업들을 요리조리 피해갔던 터라,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 수업을 떠올릴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밥벌이의 시간이 끝나는 새벽이 되면 교양 수업들은 나머지 시간을 버티는 배가 되었다. 마치 배로 이어 만든 다리를 조심스레 건너듯, 대학 시절 수업에서 배운 내용들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때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다면, 밥벌이의 시간도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어떤 책들은 그 내용으로 사람을 위로하고, 또 다른 어떤 책들은 그 주제와 태도로 사람을 위로한다. 나는 그와 다른 시기에 학교를 다녔고, 거의 같은 수업을 듣지 않았다. 그가 수업에서 길어올린 것들은 내가 길어올릴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그도 '기자' 아닌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버틸 힘을 마련하는 과정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아직 그의 절반 정도의 경험을 가지고 무언가 여전히 주변을 헤메고 있는 사람이기에, 버티는 사람을 애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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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버텼다면, 그것이 쓸모가 있었던 거겠지. 자기계발서처럼 교훈과 쓸모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삶은 내 것이 아니므로. 사실 대부분은 그런 무용한 것들의 쓸모를 통해 오늘도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모욕에도 버티게 하는 것이라면, 이것도 꽤 쓸모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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