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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Aug 30. 2023

버린다고 사라질까?

23.08.30. 브라이언 딜, 쓰레기


"쓰레기는 그것을 헤아릴 수 있으리라는 우리의 희망을 늘 넘어선다." (12)
"우리가 만들어 온 쓰레기들을 우회할 방도란 없다."(14)


방류는 안전하게 통제될 것이라는 희망은 머지않아 배신당할 것이다. 인간은 늘 쓰레기를 만들어냈고, 그 쓰레기를 다스릴 수 있다고 언제나 자신있게 말했다. 삶의 공간으로부터 쓰레기는 철저히 구분될 것이며, 침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브라이언 딜은 <쓰레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쓰레기에 맞춰 공간과 장소를 다시 정돈해 왔다. 세계 곳곳에 쓰레기가 널려 있는 이미지에 따라 공간과 장소의 형태를 새롭게 빚어 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다수는 내내 세계를 이런 식으로 감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운이 좋거나 어리석다."(13) 안타깝게도 우리가 버린 쓰레기들은 하나의 지층이 되었다. 인류세는 다시 말하면, 인간이 버린 쓰레기에 맞추어 우리가 살 공간을 재구획하는 시대인 것이다.


인간은 쓰레기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헛된 믿음으로 쓰레기를 생산해내며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미래에 걸었던 판돈의 대가로 이 쓰레기들을 돌려받았다."(15) 모든 사물은 쓰레기가 될 운명에 놓여 있다. 애초에 쓰레기란, 인간이 한 때 욕망하였다가 시간이 그것을 깎아내어 마음이 다 한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소비에 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산출해야 생존할 수 있는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쓰레기가 되어야만 한다.


"쓰레기는 여전히 어디선가 생을 종료하지만, 그때면 산뜻하고 홀가분하고 청결한 자아에 대한 우리의 낭만주의적 감각은 이미 소비와 버리기 그리고 정체성의 반복적인 순환 속에서 [다음 단계로] 이동한 뒤다."(41)


그리고 이 더러운 진실은 그 쓰레기들이 어디론가 시야 바깥으로 안전하게 밀려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은폐된다. 쌓아놓거나, 어딘가 보관해두는 것은 명시적인 비용을 들여야할 뿐만 아니라, 쓰레기를 생산하며 성장하는 인간의 진실을 지적하는 불편한 사태다. 투명하고 한없이 맑을 물 속으로 밀어넣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불편할 이유가 없다. 가끔 그것들이 아프리카 어느 나라를 괴멸시키거나, 바다를 망가트린다 하더라도 그곳엔 제1세계의 카메라가 없다.


"우리는 손에 들어오는 것을 쓰고 남으면 버리며, 그것의 이전이나 이후 생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29)
"현대적 삶이 빚어낸 이러한 인공물들이 어떤 조건 하에서는 몹시 귀중하고 흥미로워 보이더라도 우리가 이것들에 압도당할 때, 이 모든 것을 꼼꼼히 살피고 그 가치에 걸맞은 관심을 기울일 수 없을 때 이것들은 예외 없이 언제나 쓰레기가 된다."(36)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면서도 이 쓰레기들의 분리수거가 과연 지구에 대한 '모호한' 책임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지 언제나 의문을 지니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 여행가서는 분리수거 하지 않고 끈적한 음료와 음식이 달라붙은 종이를 한 데 모아 검은 봉투 안에 밀어넣고 와서, 여기에 돌아와선 다양한 재질의 포장지를 나누고 있는 상황을 모순 없이 견디는 일이 가능한가? 심지어 열심히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보면, 재활용 불가능한 재질들이라는 표시로 나의 노동을 비웃는 재질들의 웃음소리에 둘러쌓인다. 만드는 사람들은 딱히 신경쓰지 않는 책임감을 이 나라의 소비자란 이유로 홀로 뒤집어쓰는 게 무슨 순교자가 된 것 마냥 고귀한 일인지도 모르겠는 것이다.


브라이언 딜은 도처에 존재하는 쓰레기들과 마주하는 순간들에서 쓰레기에 대한 인간의 어떤 공통된 감각들을 길어올린다. 예컨대 이런 것. "도시 곳곳마다 쌓인 일회용 컵들의 산은 사람들이 쓰레기가 가야 할 곳과 가서는 안 될 곳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 보이고자 노력은 기울인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할 시간도 마음도 없다. 그러기에는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너무 많으니까."(31) 좋은 에세이란 자신의 경험을 덧대어볼만큼 구체적이면서도, 세상 만사를 다 아는 것처럼 거들먹거리지 않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포착의 순간들은 충분히 좋은 에세이의 자격을 증명하는 듯하다.


쓰레기는 끊임없이 우리의 '착각'에 균열을 낸다. 어디론가 사라지겠지 싶어 내버려 둔 모든 쓰레기들은 오래 그 자리에 머물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쓰레기가 가야할 곳이 있다고들 생각하지만, 그곳이 어디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물으면 듣는 사람의 눈은 슬쩍 흐려지기 마련이다. 쓰레기라는 것은 생각으로부터 치워져야지, 그것을 처음 우리 손에 들었을 때처럼 오래 생각하고 깊게 생각하면 반드시 고통스런 현실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글쎄요, 일단 우리 집은 아닌 것 같아요.' 의 반복.


디지털이라고 다를까? 저자는 디지털 쓰레기조차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이를 위해 막대한 에너지와 노동, 자원, 시간, 공간 모두 소요된다고 말한다. (메일을 다 비우면 해결이 될까? 심지어 지우는 과정조차 에너지를 소모한다!) "환경철학자 티머시 모턴이 주장한 대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상상 속 '저편'AWAY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쌓아 왔고 모호하게 '저기 어딘가'out there에 존재하리라 가정하는 산더미 같은 쓰레기는 현대적 삶과 관련해 일부러 무시되는 측면들에 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38-39) 더욱이 디지털 쓰레기는 완벽하게 우리로부터 비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 주변에 맴돈다. 그것은 보통 기억에 대한 것이므로,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물리적 쓰레기들처럼 없는 듯 버려낼 수 없다. 


"인류가 어느새 해결책 없는 문제, 즉 우리 손으로는 결코 해결책을 고안할 방도가 없는 문제들을 만들어 내는 역사적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 주는 가장 강력한 물질은 핵폐기물이다."(72-73)


드라마 <더 데이즈>의 마지막 회의 후반부 10분 가량은 야쿠쇼 코지의 독백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역사적 자료들이 다큐멘터리의 형태로 편집되어 있다. 그곳에서 드라마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경제 발전을 위해 선택했지만, 후손들은 그로 인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떠안게 된 것은 아니냐고. 그래서 그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앞으로 내릴 결정에 어떤 참고가 필요한 것은 아니겠느냐고. 내가 사는 이 나라도 성장하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원자력을 택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것이 제일 '저렴'하므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아예 풀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 


방류가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났고, 몇몇 사람들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방사능 수치를 측정하는 기계를 수산물에 가져다 대며 오염은 없다고 외친다. 방류가 시작되기도 전에 어떤 정당의 정치인들은 큰 접시에 회를 담아 안전하다고 기자들 앞에서 먹방을 찍었다. 우려를 하는 것 자체가 반애국, 반국민, 반시장, 반과학적 태도라는 레토릭은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수산시장 상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거대한 환상을 지탱하려는 필사적이고 절망적인 시도들을 본다. <쓰레기>를 펼쳤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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