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보낸 글이, 이제서야 게시가 되었다. 이전에 브런치에 올려둔 것이지만 게시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다시 힘을 낸다는 의미에서만 공유. (이전 글과 내용은 다른 게 없다) 내가 제목을 정할 수 있었다면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착각 (요새 유행하는 제목 짓기 방식으로) 이라고 했을 것 같지만. 다시 힘을 좀 내야겠다. 이대로 주저 앉아있을 수는 없지.
하나 글에 오타가 있는데, "우리는 예술가거나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다"가 아니라 "우리는 예술가거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다"였다. 수정...을 요청하기엔 상당히 심약해져 있다.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75509
작고 가느다란 팔뚝은 영락없는 아홉 살 초등학생의 것이었다. 붉고 넉넉한 티셔츠를 걸친 탓에 더욱 몸집은 왜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누구의 손에 이끌리지 않고 두 발로 대열에 서 있던 그가 들고 있던 메가폰으로 말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누구의 학교인가?” “우리의 학교다!” “누구의 도시인가?” “우리의 도시다!”
소년이 다니던 시카고 남부 워싱턴 하이츠 지역의 마커스 가비 초등학교는 폐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시카고 시장 램 이매뉴얼이 강하게 밀어붙인 공교육 ‘개혁’의 결과였다. 학생들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에 운영을 위탁한 차터 스쿨을 늘리고, 성적이 부진한 공립학교를 폐쇄하는 것이 그의 개혁이었다. 폐쇄된 쉰 개의 학교 대부분은 흑인 밀집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적자를 줄이고 효율적인 교육 재정을 운영한다는 명목으로 하루 아침에 학교를 빼앗긴 건 학생과 학부모뿐 아니라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의 성적이 부진하면, 교사들의 급여도 덩달아 낮아졌다. 공립학교의 빈자리를 메운다던 차터 스쿨은 노조 소속이 아닌 교사들을 채용했다. 쉬운 해고와 저임금에 저항하는 교사들은 학생보다 자신들의 돈을 우선시한다는 비아냥에 시달렸다.
“어떻게 이런 일에 돈이 앞설 수 있어?”라는 문장은 마법적 효과를 발휘했다. 교사들조차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르길 꺼려했다. 교육은 노동 이상의 ‘숭고한 행위’인 듯 보였다. 학생들을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은 이런 인식을 뒷받침했다. 시카고 교원단체의 의견은 갈렸다. 학생들에게 좋은 방향이라면 상관 없다는 목소리와,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 교육자의 사명과 공존할 수 있다는 목소리로.
노동자로서 스스로를 부르기 꺼려하는 다양한 ‘반(半)노동자들’은 비슷한 갈등을 겪는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는 일이 노동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고귀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잘한’ 것이라 여겨 반대 급부를 감히 요구하지 못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노동인 동시에 자기 실현의 수단이기에 일정한 희생을 당연하게 여긴다.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 재생산노동과 돌봄 노동이 전자라면 예술가와 운동선수, 인턴 등이 후자에 속한다. 둘 모두 일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지만, 돌아오는 것은 저임금, 불안한 고용, 그리고 고립이다.
세라 자페의 <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일을 사랑하라는 거대한 사기극의 피해자들을 취재한 르포이자, 일에 배신당한 사람들의 로맨스이자, 노동자들의 패배와 저항이 담긴 역사서다. 자본이 가족을 ‘민영화’하면서 공고하게 만든 핵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성차별적인 업무 분화를 정당화한다. 매일 일터로 노동자를 되돌아가게 만드는 재생산 노동은 사랑, 헌신, 열정이라는 포장 아래에서 은폐되고 착취된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작업을 노동으로 규정하고, 동료와 연대하며 조직적으로 저항한다. 고통스럽지만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했던 다양한 노동자들의 삶을 취재한 문장들의 꼬리를 물고, 그들이 놓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정리한 문장들이 이어진다. 인터뷰와 사회학적 분석은 서로를 보완하며 노동의 주변부 풍경을 완성한다. 풍경을 훑으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승리하든 패배하든 모두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노동조합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이자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노동조합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책에서 직접 다루진 않지만, 곳곳에 흩어진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방송 노동자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예컨대 예술가들이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 삶을 갈아 넣었을 때, 이를 노동이라 부르는 대신 자기계발이라 부르면서 창출한 부에 대한 권리를 유예하는 모습은 방송국에서도 종종 마주하지 않는가?
저널리스트의 사명감이나, 연출가의 열정으로 포장된 과로는 지금도 수시로 일어난다. 부족하나마 반대 급부로 ‘야근 수당’을 포괄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이들이 한 편에 있다면, 그마저도 없는 ‘프리랜서’들도 있다. 권리가 박탈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수용소라면, 방송국도 거대한 수용소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노동자라는 사실이, 우리가 예술가라는 사실이나 우리가 교사라는 사실과 병립할 수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술가거나 전문가이면서노동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다. 사명감과 성취감은 노동의 대가와 별개다. 그것을 기묘하게 섞어버린 상식은 시대의 산물에 불과하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를 깨닫지 못하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노동을 손쉽게 평가 절하하고 말 것이다. 사명감이라는 개미지옥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성실하고 열정적이지만 자신이 '노동자'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자유주의적인 엘리트들일지도 모른다.
일에 대한 사랑에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진부하고 패배의 시간은 길며, 상처도 크고, 회복도 느리지만 말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서로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측면을 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시간을 경험하는 것. “연대한다고 해서 함께 투쟁하는 모든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그 순간들에 우리는 서로를 정말 사랑한다.”
2012년 시카고 교사 노조가 중심이 된 파업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다행히 지역 사회는 그들의 편에 섰다. 교사와 학부모가 교사들의 처우와 지역 공동체, 그리고 학생들의 미래가 함께 묶여 있다는 믿음을 단단하게 굳힌 덕이었다. 그럼에도 때로는 승리했고 때로는 패배했다. 9살 소년 아샨 존슨의 학교는 폐교를 면했지만, 다른 학교들 가운데 대다수는 10년이 넘은 지금도 문을 닫은 채 방치되어 있다. 방송에서 촬영했던 오버튼 초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2019년엔 재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램 이매뉴얼이 물러난 후 2023년 시장 선거에서 당선된 이는 교사 파업을 주도했던 교사노조 로비스트 출신의 브랜든 존슨이었다. 이제 기나긴 싸움은 끝난 걸까? 교사들은 더 이상 자신의 처우 개선과 학생들의 교육이라는 사명감을 동시에 지니는 일에 부담을 덜게 될까? 이제는 대학생이 되었을 소년에게, 학교로 다시 복귀했을지도 모르는 교사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시카고에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