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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22. 2021

우리는 패터슨을 모른다

짐 자무쉬, 패터슨(2017)

*영화 <패터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이 영화에 스포일러라는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패터슨의 '밤'을 모른다


영화는 모든 것을 알려줄 것처럼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의 일과를 훑는다. 그는 6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나 시리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걸어서 버스 회사로 출근한다. 일을 시작하기 전 시상을 메모하고, 버스 운전을 하며 승객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일이 끝나면 폭포 앞에서 도시락을 먹고, 다시 돌아와 반쯤 쓰러진 우체통을 일으켜 세운다. 아내와의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면 강아지 마빈과 함께 밤 산책을 나선다. 중간에 잠시 펍에 들러 맥주를 마시고 나면 그의 하루는 끝이다. 일주일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우리가 그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까?


종종 착각하지만 이 영화는 패터슨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를 제외하고 내레이션은 나오지 않는다. 패터슨의 표정 이외에 그의 마음 상태를 알 방법은 없다. 더욱 결정적인 빈틈은, 그가 펍에서 잠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맥주를 다 마시고 나면, 그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잠을 청할 것이다. 카메라가 물러나 있는 그 시간에 그는 무언가를 한다. 다만 무슨 일인지 짐작할만한 힌트는 침대 맡에 놓여 있는 두 권의 책에 담겨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다. 자기 전에 읽는 책이야말로 가장 사랑하는 책임을. 짐 자무쉬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그러나 확실히) 그는 집에 돌아와 책을 읽는다. 그 책들은 매일 조금씩,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만 달라져 있다. 자기 전까지 손을 댔다는 소리다. 반복되는 아침의 장면 속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지만, 감독의 시선은 의도적이리만치 그 책들을 시선의 주변에 둔다. 단 한 번, 첫날 패터슨의 침실 사물들을 훑는 장면에서 협탁 위에 놓은 책이 그나마 가까이 카메라에 포착되긴 하지만, 어둡고 흐릿한 방의 상태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충분히 그 책들이 무엇인지 드러낼 수도 있었다. 지하실에 놓인 책들을 훑는 시선의 속도와 확실성은 이를 증명한다. 누군가 자신에게 시인이냐고 물을 때마다 버스 운전기사일 뿐이라고 대답할만큼,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숨기는 패터슨이지만, 정작 그가 머무르는 지하실엔 문학 작품이 가득하다. 빛이 들지 않을 그곳에 놓인 책들의 작가와 제목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관객들에게 전시하듯, 그의 내면에 놓인 작품들을 봐 달라고 카메라는 시위한다.


그런데 밤에 붙잡고 있는 협탁의 책이야말로 패터슨이 가장 사랑하는 책이지 않은가? 지하실 서가에서 뽑아 든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만큼, 그의 협탁에 잠들어 있는 책이 패터슨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어째서 이 책들은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감독이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볼 기괴한 관객을 위해 남겨놓은 사출 게이트*일지도 모른다.


멜빌과 발저 : 수면(睡眠/水面) 아래의 그림자


협탁에 놓여 있는 두 권의 책은 허먼 멜빌과 로베르트 발저의 저작이다. 월요일부터 화요일까지 패터슨이 읽었을 책은 <the Portable Melville>로,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단편 소설과 에세이, 서간문을 모은 책이다. 아마도 패터슨이 중고 서점에서 구했을(출판년도가 너무도 오래되어 도리가 없었을 것일테지만, 그가 사랑하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역시 중고 서점에서 구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는 그저 중고 서점에서 책을 구하는 습관이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오래된 책엔 멜빌의 <타이피>, <빌리 버드>, 그리고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가 수록되어 있다.


같은 컷이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소품으로 반복되는 매일의 변주를 표현한다.


<필경사 바틀비>는 변호사의 일을 돕는 필경사였던 바틀비가 어느날 갑자기 "나는 하지 않는 편을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선언하며 모든 일로부터 물러나는 상황을, 변호사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단편 소설이다. 누군가는 바틀비로부터 소외나 고독, 우울을 읽어내지만 동시에 노동자로서 '기대되는 바'를 거부하는 저항자의 이미지를 읽어낼 수도 있다. 패터슨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는 내일의 노동을 위해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에 휴식 대신 시를 쓴다. 오히려 노동이 시의 재료가 된다. 그가 버스를 운전하는 도중 귀담아 듣는 승객들의 이야기, 아침마다 마주하는 로라와의 실랑이, 마빈을 밖에 묶어두고 머무르는 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모두 시의 재료다. 성실하게 내일의 반복되는 노동을 위해 휴식 시간을 소비할 것을 요구하는 자본의 의도에 반해, 그것을 선호하지 않겠다 선언하는 바틀비스러운 자세로 그는 시를 쓴다.


로베르트 발저의 책은 그의 지하실 서가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제대로는 아니지만 두 번 보여주는 셈이다.


뒤집어진 멜빌의 책 위로 수요일엔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의 <산책자(the Walk)>가 얹힌다. 이 책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산책의 시간동안 그가 마주한 풍경들이 나열되어 있다. 흔한 타이프라이터 하나 없이 살았던 그는 매일 강박적으로 산책을 했다고 한다. 산책이 휴식이 아닌 일종의 '노동'이었던 셈이다. 매일 손으로 메모하고, 같은 시간에 똑같은 경로로 산책하는 패터슨에게서 발저의 모습을 읽어내는 일은 사뭇 도식적으로 느껴질만큼 수월하다. 심지어 매일 같은 경로로 이동해야 하는 버스 운전은 패터슨에게 '노동으로서의 산책'이다. 발저의 산책이 그러하듯이, 패터슨의 산책도 붕괴하지 않는다. 강아지 납치를 경고하는 껄렁한 목소리도 찰나의 불안감만을 조성할 뿐 사건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도시를 경유하지만, 도시로부터 관조할 수 있는 자리는 보들레르로부터 이어지는 산책자의 특권이자 질곡인데, 패터슨 역시 그 산책자의 계보를 잇는다.


두 권의 책은 패터슨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다. 산책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노동자로서 단순히 존재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중요한 단서가 그림자 속에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이 단서들이 불러 일으킬 불안한 정서를 가능한 한 가라앉히고 싶어서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감독이 드러낼 능력이 없는 게 아닌 한에서. 그리고 관객은 그 능력을 충분히 확인했다. 그림자는 의도적이다.


불안한 내기 : 심장마비는 번개처럼 온다


반복되는 일상이 조금씩 변주될 때, 영화는 이면의 불안감을 노출한다.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자기만의 패턴으로 집을 물들이는 로라를 바라보는 패터슨의 기묘한 표정은, 컵케이크 판매가 성공했다는 사건으로 손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비밀 노트를 공개해야 할 날을 앞두고 마빈이 그 노트를 찢어버렸을 때 짓는 패터슨의 편안한 표정은, 마빈에게 네가 밉다고 말하는 장면만으로 손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의 복잡한 속내는 오로지 리액션과 표정만으로만 짐작 가능하며, 카메라는 그의 내면을 비춰야 하는 순간이 되면 폭포로 도망간다. 일상 속에 불쑥 등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쌍둥이들은 불안이 고개를 내미는 순간들을 표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은 붕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를 '시적'이라고, 그리하여 아름답다고 말하게 만든다. 불안과 안온함의 위태로운 균형을.


불안이 고개를 드는 장면들을 애써 무시한 채, 카메라가 허락하는 그의 표면만 보고서 우리가 노동과 예술의 공존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안이하지 않은가?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발견되는 예술적 감각을 포착하기 위해 감독은 희망을 택한 것이겠지만, 그림자는 손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내면에 이는 격류를 알지 못한다. 단지 그가 폭포 앞에서 한동안 머무르는 순간들을 통해 유추할 뿐이다. 작은 배를 감싸는 거대한 고래의 그림자를 더듬듯이. 찬양할 수도 있는 삶이지만, 거기에도 불안은 있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파괴의 예감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패터슨은 로라에게 키스를 건네고 보통의 날들처럼 침대를 벗어난다. 카메라는 더 이상 패터슨을 따라가지 않고 침대를 비춘다. 관객은 문득, 불안해진다. 크리스마스 아침, 평소처럼 산책을 나간 로베르트 발저는 홀로 눈밭에 쓰러져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낭만적인 일상은 마치 허먼 멜빌의 <모비딕>처럼, 수면 아래에 도사리는 음울하고 위험한 불안감에 휩싸여 삽시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다수가 상상하듯 그는 새로운 노트를 받고 희망차게 새로운 날들을 살아갈 것인가? 어느 쪽에 판돈을 걸어야 할 지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사출 게이트 : 많은 플라스틱 제품의 표면에 톡 튀어나와 있는 금형과의 연결 부분. 제대로 마감해두지 않으면 싸구려 플라스틱 제품의 느낌이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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