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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Jun 29. 2021

때리는 책

별의별책 - 영화 속 책의 엉뚱한 쓸모 2

  책은 흉기일까. 일견 엉뚱하지만 한때 밈(meme, 인터넷 하위문화 문화의 일종으로 유행하는 단어나 짤방을 뜻하는 말)처럼 쓰이며 온라인을 달군 질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스타크래프트 갤러리에 올라온 "니들 대학가 술자리에서 법대생이랑은 싸움붙지 마라...레알(진짜)이다" 제하의 글이 물음을 낳았다. 글은 대학가에서 술을 먹던 글쓴이가 옆테이블과 시비가 붙었는데, 한 사람이 가방에서 3kg에 달하는 민법책으로 자신을 때렸다는 내용이었다. 글쓴이는 "눈떠보니 경찰서였다"면서 "(하지만) 책은 판례상 흉기가 아니라더라"고 적었다. 누리꾼들은 '기절할 정도로 강하게 맞았는데 어떻게 흉기가 아니냐'며 황당하고 했다.



  단순명쾌한 넷상 반응과 달리 법조계의 반응은 자못 심각했다. '흉기'를 운운한 질문이 일단 잘못됐다고 보는 법조인이 많았다. 형법상 '흉기' 개념이 등장하는 범죄는 제331조 '특수절도'와 제334조 '특수강도' 둘 뿐인데, 사람을 때린 범죄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흉기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가해자를 처벌할 방법있다고도 했다. 누군가에게 유형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폭행'에 해당하며, 다치게 했다면 '상해' 혐의도 물을 수 있다. 게다가 도구를 사용한 경우 더 큰 처벌도 가능하다. 흉기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형법 제261조는 '위험한 물건'을 휴대해 폭행한 자는 일반 폭행죄보다 가중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벌하지 않는(반의사불벌죄) 폭행과 달리, 특수폭행은 피해자의 고소 여부와 무관하게 처벌이 이뤄진다.

  이 경우 쟁점은 무엇이 위험한 물건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흔히 총이나 칼, 망치 같은 흉기만을 위험한 물건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판례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물건이라도 원래 사용 목적과 무관하게 재질이나 사용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위험한 물건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과거 법원은 난투극을 벌이다 하이힐로 상대를 실명에 이르게 한 피고인에게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하이힐의 굽이 뾰족해 다른 사람에게 휘둘러 상해를 가하면 중한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고 양형이유를 설명했다. 장난감 비비탄총, 고기 굽는 석쇠, 휴대전화도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가할 때 쓰이면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위험한 물건으로 판단됐다. 그러면 책은?



  사람의 두부(머리)나 복부, 다리 등을 손이나 발로 치며 동시에 책으로도 때린 가해자의 판례는 있지만 책으로만 때려서 재판에 회부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다만 책이 충분히 위험한 물건일 수 있다고 예시하는 영화는 여럿 있다.

  <존 윅 3:파라벨룸>(2019)은 이 분야에 독보적인 영화다. 주인공 존윅은 내부에서 살인행위시 사형에 처하는 킬러들의 은신처 '콘티넨탈 호텔'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두목 산티노를 죽여 현상범이 됐다. 한참 쫓기던 존윅은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두꺼운 '러시아 민담집' 책을 찾는데, 여기엔 암살자 양성소 '루스카 극장'의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증표인 묵주가 달린 십자가, 다른 킬러의 협조를 구하는 데 쓰는 펜던트 형태의 표식 등이 숨겨져 있다.

  찾은 물품을 들고 존윅이 도서관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최홍만을 닮은 거구의 킬러 한 명이 존윅을 위협한다. 날카로운 칼을 든 킬러와 달리 존윅에겐 별다른 도구가 없는 상황, 존윅은 방금 집어든 책을 괴한에게 들이댄다. '저걸로 상대가 되겠어?' 의문은 잠시, 책이 얼마나 위협적인 물건인지를 존은 입증한다. 그는 책의 넓은 면으로 최홍만의 얼굴을 가격하고, 책 윗면으로 괴한의 목을 올려쳐 숨막히게 만든다. 그리고는 책 윗면을괴한의 입에 집어넣은 채 책 아랫면을 손바닥으로 쳐서 얼굴 깊은 곳으로 박아넣고, 책상에 책을 세우고 상대의 목을 그 위에 올려 얼굴을 내려친다. 호기롭게 등장한 킬러는 '우드득' 소리를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퇴장한다.



  책은 방패로도 쓰인다. 매튜 본 감독의 영화 킹스맨(2015)에서 특수요원 해리 하트(콜린 퍼스, 코드명 갤러해드)는 "내일 교회 실험만 성공하면 실행에 옮겨도 된다"는 발렌타인의 말을 엿듣고 미국 켄터키 주에 소재한 '사우스 글레이드 교회'에 간다. 리치몬드 발렌타인은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악역으로, 과거 전세계 모든 이에게 무료 통화와 무료 인터넷을 영원히 제공해준다며 유심 카드를 배포한 바 있다. 해리는 과거 발렌타인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의 옷에 몰래 붙여둔 도청기로 발렌타인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이는 발렌타인의 함정이었다. 그가 심은 유심 카드는 사실 공격성을 자극하고 억제 능력을 손상하는 신경파를 내보내는 물건이었고, 발렌타인이 기계를 작동시키면서 해리를 포함한 교회 내 사람들은 서로를 학살하기 시작한다.

  해리의 살상 능력은 개중에서도 발군이다. 최고로 꼽히는 특수요원답게 그는 각목, 손도끼, 칼, 쇠막대기 등을 들고 미쳐 날뛰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죽인다. 그러다 한방 맞고 쓰러진 그는 바로 앞에서 내려 찍히는 칼날을 바닥에 굴러다니는 책을 들어 막는다. 책은 성경책 혹은 성가책으로 보이는데, 전투 이전 교회 내에서 책이 보이는 순간은 목사 앞 제단을 카메라가 비출 때 뿐이다. 책은 칼이 푹 꽂힐 만큼 두꺼웠고, 상대방은 칼을 더이상 무기로 쓰지 못한다. 이후 해리는 책의 옆날 혹은 윗날로 몰려오는 적들의 목젖, 사타구니를 쳐서 제압한다.



  살인의 보조도구로 책을 활용하는 영화도 있다.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영화 <섀도우>(1982)는 '테네브레Tenebrae'라는 제목의 소설책을 누군가 장갑을 낀 채 찢어 화로에 던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탈리아어로 어둠을 뜻하는 테네브레는 최근 영화 속 허구의 유명 추리소설 작가인 피터 닐이 출판한 베스트셀러로, 백화점 등지에 무더기로 쌓여 팔리는 중이다.

  엘사라는 여성도 책에 관심이 있었는지 로마의 한 백화점에서 그의 책을 훑어본다. 그녀는 책을 사지 않고 자신의 가방에 넣어 훔친다. 범행을 서점 사장에게 들켜 잠시 위기에 처했던 그녀는 잠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의 말로 사장을 홀려 서점을 탈출하고 집을 향한다. 그리고 집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그녀의 목에 누군가 면도칼을 겨눈다.

  범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손에는 영화 첫 장면에 나온 장갑이 끼워져있고, 그 손으로 범인은 엘사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리고 목을 면도칼로 찌르면서 엘사의 테네브레 일부 페이지를 찢어 그녀의 입에 쑤셔넣는다. 숨막힌 채 소리도 못낸 그녀는 범인이 높이 들어올린 면도날에 찔려 결국 목숨을 잃는다.

  마침 책 홍보차 로마에 방문했던 피터 닐은 제르마니 형사와 조수 알티에리의 방문으로 엘사의 피살 소식을 듣게 된다. 피터는 엘사와 모르는 사이지만, 경찰은 엘사가 살해당한 방식이 테네브레 속 장면과 유사하다며 그를 참조인으로 삼겠다고 한다.



  책은 그밖에 소소한 폭력 장면에도 등장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2003)에서 어린 시절의 오대수는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채 담배를 피우다가 그를 저지하는 수녀님에게 책으로 맞는다(수녀님을 "미쓰 김"이라고 불렀으니 더 맞을 법도 한데 딱 한대 얼굴을 가격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김희애 주연의 영화 <우아한 거짓말>(2014)에서는 화연(김유정)과 미라(유연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 천지(김향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책이 등장한다. "나야 불쌍해서 놀아주기라도 했지, 넌? 넌 천지하고 상종이나 했냐?"고 화연이 묻자 미라는 "천지가 이렇게 되받아 칠 줄 모르니까 네 밥인 줄 알았지?"라고 말하며 화연의 머리를 책으로 친다. 화연은 미라를 은따(은근히 따돌리는 행위)한 주범이다.

  <존윅3>나 <킹스맨>의 경우 책은 재판부가 '위험한 물건'이라 판단할 만한 존재로 보인다. <섀도우>는 애매하며, <올드보이>나 <우아한 거짓말>에선 특수폭행이나 특수상해, 또는 상해 혐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행위가 아닌 책의 소재로 범위를 좁혀 질문한다면 어떨까? 영화에서 큰 부상이나 죽음을 낳는 책은 대부분 양장본이다. 민법책이나 성경처럼 두껍고 무게가 많이 나갈수록 위험한 물건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7년 방영된 <알쓸신잡> 시즌1 8화에는 소설가 김영하가 "두 사람이 책을 들고 싸운다면 한국 책을 들고 싸우는 게 더 유리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 책은 대부분 펄프 재질인 데 반해, 한국 책은 돌가루을 섞어 만들기 때문에 더 무겁다는 것이다. 2007년 sbs는 "서울대 산림과학부 비교 분석 결과 영어판은 인쇄품질을 높이는 충전재 돌가루의 비중이 8%에 불과한 반면 우리책의 경우 3배가 넘는 27%나 됐다"며 "종이를 매끄럽게 해주는 돌가루는 펄프에 비해 무게가 2배 가량 더 나간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때릴 땐 한국책이 유리하지만, 재판에선 미국책이 유리하려나? 존윅이 한국 민법책을 들고 적을 패는 장면을 상상하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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