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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l 11. 2021

두 개의 암호, 하나의 열쇠

모르텐 튈텀, 이미테이션 게임(2014)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까다로운 선물


책은 까다로운 선물이다. 받는 사람의 독서 취향, 선물하는 책의 수준, 그리고 책의 내용에 대한 주는 사람의 이해가 세밀하게 고려되지 않으면 책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좋은 의미로 건넸지만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고, 제대로 골랐다고 해도 숙제가 생긴다. 받은 사람은 시간을 들여 내용을 이해하고, 선물을 건넨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기쁘지만 성가신 숙제를 남기는 셈이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속에는 이 까다로운 ‘책 선물하기’가 딱 한 번 나온다. 2차 대전 시기 나치 독일군의 휴대용 암호 장비인 에니그마를 해독해 조국 영국이 속한 연합군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정작 그 성과를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화학적 ‘치료’를 받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의 모든 순간이 훌륭할 필요는 없다. 전개가 지루하고 해야할 말과 뺄 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만.


튜링은 서투르다. 그는 대화의 표면에 담기지 않은 의미들을 알지 못한다. 마치 자신의 러시아어 개인교사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차에 치인 개처럼 아프다”라고 말했을 때 자기도 모르는 고통을 생각 없이 쓰지 말라며 정색했던 비트겐슈타인처럼. 그래서 비웃음과 조롱,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 식당에서 음식물 세례를 받고, 교실 바닥에 감금당하기도 한다. 그를 바닥 밑 어둠 속에서 밝은 빛 가운데로 끌어낸 유일한 사람은 학급 동료 크리스토퍼 모컴이다.


크리스토퍼는 이해한다. 그에게 앨런은 문제아가 아니라 그냥 앨런이다.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줄 알기에, 앨런이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라 자책할 때에도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해내는 거야”라며 그를 다독일 수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앨런의 눈빛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마치 그의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는 말들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빛으로 가득한 교정 뒤뜰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두 사람은 시간을 보낸다. 십자말풀이를 하던 앨런은 크리스토퍼가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고개를 돌린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는 순간, 화면엔 크리스토퍼가 읽고 있는 <암호학 가이드A guide to codes and ciphers>의 겉표지로 가득 찬다. 영문 모를 암호들이 빼곡히 적혀있는 부분에 앨런의 시선이 고정된다.


앨런 : 무슨 책 읽어?

크리스토퍼 : 암호학에 대한 거야.

앨런 : 비밀 메시지 같은 거?

크리스토퍼 : 비밀이 아니란 게 엄청난 매력이지. 누구나 볼 수 있는 메시지인데 그 뜻을 알 순 없어. 단서를 찾아 풀어야 해.

앨런 : 그게 말하기랑 뭐가 달라?

크리스토퍼 : 말하기?

앨런 : 사람들은 말할 때 말 속에 다른 의도를 숨기곤 그걸 알아듣길 바라. 난 안 그러거든. 나한텐 다를 바 없어.

크리스토퍼 : 네가 암호학을 잘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걸.


실존하는 책은 아니다. 실존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크리스토퍼는 읽고 있던 책을 앨런에게 건넨다. 과감해 보이지만 면밀한 관찰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행동이기도 했다. 일상적인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 앨런이 오히려 여분의 내용 따윈 없는 암호 풀이엔 특출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사려 깊은 크리스토퍼가 까다로운 선물을 그렇게 손쉽게 넘겨주진 않았을 것이다. 이 순간 사회 부적응자는 위대한 암호학자로 변모한다. 지극히 전형적이고 평범한 전기 영화를 지탱하는 이맛돌이 끼워진다.


두 번째 암호


이맛돌을 끼우는 순간 새로운 문제가 등장한다. <암호학 가이드>를 통해 앨런은 암호학이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얻게 되었고, 이후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위대한 성과로 가는 길을 걷게 되었다. 동시에 <암호학 가이드>는 앨런에게 새로운 암호로 등장한다. 이 책을 건넨 크리스토퍼의 마음이라는. 책을 받아들고 미소를 짓는 앨런을 바라보는 크리스토퍼의 미묘한 표정은 어딘가 불길하다. 내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가? 


다른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한 응답만이 기대된다. 무참한 배신은 예상 밖의 일이다.


앨런과 크리스토퍼는 비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마치 오래된 연인은 둘이 서로 공유하는 맥락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이해 못할 단어 하나에도 웃을 수 있는 것처럼. “2주 후에 보자”는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메시지에 대한 대답으로 “사랑해”를 준비하는 앨런에게 모든 것이 명료하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나의 사랑의 말에 확실하고 완전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미소 짓는다.


2주 후 짧은 여름방학이 지난 후 크리스토퍼는 앨런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누구에게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수신자를 잃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했는지, 서로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2주 후에 정말로 돌아올 마음은 있었는지, 연인이 아닌 ‘가장 아끼는 친구’라 말한 이유는 무엇인지 되물을 수도 없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선생에게 앨런은 크리스토퍼가 ‘친구’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는 '크리스토퍼'라는 애칭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봄베(Bombe)'라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영화는 모호하다. 크리스토퍼가 정말로 죽음을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기계의 애칭을 실제 역사와 달리 ‘크리스토퍼’라고 붙인 부분과, 그런 크리스토퍼를 정부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해 징역 대신 화학적 ‘치료’를 선택한 후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기계 앞에 서 있는 앨런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잡고 있는 장면을 통해 크리스토퍼의 암호 해독이 실패로 끝났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퍼의 얼굴에 스치는 불길함의 원인도, 앨런이 끝내 사랑에 실패한다는 결과도. 사랑의 암호를 풀기 위해선 감정이라는 열쇠가 하나 더 필요했다. 크리스토퍼가 앨런에게 알려 준 열쇠는 이성과 규칙의 열쇠밖에 없었다. 선물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만 책 선물이 가져다 주는 불안감을 감지했던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표정이 남기는 씁쓸함을 곱씹는다. 끝내 건네지 못한 또다른 열쇠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풍부하길 바랐던 건 욕심이었을까?


*각본과 구성이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가 영화의 멱살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의 빈 구멍들을 크게 문제삼지 않도록 만드는 그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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