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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Jul 29. 2021

쓰지 않았다면 그는 행복했을까

영화 <카포티>와 책 <월든>

  진실만 쓴다는 말은 진실일까. 영화 <카포티>(2006)는 카포티라는 인간을 다루지 않는다. 영화의 목표는 작품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의 작가 카포티를 그려내는 것이다. 영화 속 시간은 캔자스 주 일가족 살인사건의 발생부터 범인이 사형당하는 순간까지로 한정된다. 그의 작품 속 시간대와 정확히 같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는 살인사건 자체보다 카포티가 사건을 취재하고 글을 쓰는 과정에 더 주목한다는 것이다.

  관객이 카포티 역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을 처음 보는 건 왁자지껄한 파티 장면에서다. 그는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 무리에 둘러싸인 채 동료 작가의 동성애 소설을 비웃는 중이다. "그런 글을 쓰려면 정직해야죠. 내 얘기라면 그렇다, 아니라면 아니다. 나는 내 글에 대해 정직해요." 소재에 대한 관심이 작가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작가는 정체성을 밝히고 글을 써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당시 카포티는 잭 던피라는 남자 작가와 연애 중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은 어떠냐'고 묻자 그는 "아니에요"라고 답한다. 글로 쓰지 않았다면 정체성을 숨겨도 남을 속인 것은 아니다. 진실된 글의 대가로 그는 진실된 자신을 잃는다.



  자신을 잃은 카포티의 내면 풍경이 베넷 밀러 감독의 관심사처럼 보인다. 오프닝에 살해 현장을 담아낸 카메라는 이후 사건 현장이나 경찰, 증인, 재판부에 거의 닿지 않는다. 영화는 대신 유별날 정도로 많은 클로즈업을 구사해 카포티의 표정과 잔근육, 실핏줄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잡아낸다. 글을 쓸 때의 카포티를 들여다보는 것이 인간 카포티를 파악하는 가장 세밀한 방법이라는 듯이. 카포티의 어린 시절은 내래이션으로, 책을 쓴 이후의 삶은 엔딩 크레딧에 앞서 짧은 자막으로 처리될 뿐이다.


분열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쓰게 된 계기는 뉴욕타임스의 짧은 기사다. 1959년 11월15일 오전 그는 전날 미국 캔자스 주 홀컴마을에서 일가족이 살해당한다는 기사를 읽는다. 피해자는 클러터씨와 그의 부인, 아들 케니언과 딸 낸시 총 4명이고 살인에 쓰인 도구는 엽총이다. 딸 낸시의 친구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가 사체를 발견했다. 평범한 사건기사지만 무언가 감이 왔던 카포티는 곧장 친구인 넬 하퍼 리를 불러 함께 캔자스를 향한다.

  카포티의 취재는 쉽지 않았다. 담당 형사가 “카포티는 경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라 평할 정도였지만 마을 사람들은 왠지 그의 접근을 피했다. 높고 뾰족하기로 유명했던 목소리 탓일까. 섬세한 손짓과 하늘하늘한 몸놀림 때문일까. "버그도프" 브랜드라며 목도리를 자랑한 그에게 경찰은 자신의 모자를 가리키며 "(이건) 시어스 로벅 거요"라고 이죽거리고 "수사엔 관심이 없다"는 그에게 담당 형사 앨번 듀이는 "난 있다"고 싸늘하게 답한다. 피해자 낸시의 학교 친구들에게 목격자 주소를 얻어내는 역할도 결국 넬의 몫이었다.



  카포티는 실패했지만 '작가 카포티'는 취재에 성공한다. 듀이의 부인이 과거 그의 팬이었던 덕에 카포티는 듀이의 집에 초대받는다. 듀이도 카포티를 경찰서에서 마주한 뒤 그의 책을 하나씩 읽어낸 참이다. 카포티는 수사 상황에 관한 내밀한 정보를 조금씩 듣고, 취재 중 피의자 페리 에드워드 스미스와 리처드 유진 히콕이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구치소에 갇힌 페리와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도 작가로서 그의 명성 때문이다. 구치소 담당자 샌더슨 부인은 카포티가 자신의 책을 사인해 가져오자 그를 즉각 받아들인다. 경찰서 조사실에서 카포티는 책에 쓴다는 이유로 사진작가를 불러 페리와 히콕의 사진까지 찍는다.

  페리를 취재하며 카포티는 본래의 자신과 작가 카포티 사이에서 분열을 느낀다. 페리는 첫 공판부터 카포티의 눈에 들어온다. 그가 재판 내내 그림을 그리고 '유효화'라는 어려운 단어를 쓰는 모습에 카포티는 흥미를 느낀다. <인 콜드 블러드>에는 페리가 교육받기를 꿈꿨으나 가난으로 포기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자신과 같은 부적응자가 아닐까. 욕망을 억누르고, 스스로를 배신해야 하는 천형을 가진. 넬에게 내뱉는 카포티의 소회는 의미심장하다. "‘페리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집에서 자란 형제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앞문으로, 그는 뒷문으로 나간 것이죠."



딜레마


  분열은 봉합될 수 있을까. 페리가 사형선고를 받은 뒤 교도소에 들어가자 뉴욕에 돌아간 카포티는 책 내용을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말한다. "이 나라엔 두 개의 세계가 있어요. 조용하고 보수적인 삶과 그 두 남자가 사는 세계, 폭력과 범죄의 소굴이요. 잔혹했던 밤, 두 세계가 한곳에 모였습니다."

  둘은 만날 뿐 하나가 되지 않는다. 교차편집은 영화가 두 현실을 비추는 영리한 장치다. 카포티와 페리가 곧 두 세계의 상징이다. 카포티가 책 제작 발표회에서 자신의 책을 읽는 동안 페리는 감방에서 다른 수형자가 끌려나가는 장면을 목격한다. 아마도 사형집행을 위한 연행일 터, 페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창살 너머 풍경을 지켜보고 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카포티와 달리 페리의 감방은 어둡다. 그가 받는 빛은 교도소 내 가로등과 사형장 인근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뿐이다. 페리는 늘 같은 수의를 입지만 카포티는 누구를 만나든 매번 니트, 셔츠와 코트를 갈아입는다.



  만남의 순간은 늘 딜레마다.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페리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다. 카포티가 도와주면 재판에서 이길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반면 카포티는 페리와 그의 살인행각에 대해 책을 쓰고자 한다. 변호사 선임 등 재판 단계에서 페리를 돕지만 어디까지나 그에게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페리, 그날 일을 말해주세요." 공감의 순간마저 그에겐 취재의 일환이다. 페리의 과거를 듣던 카포티는 "우린 참 비슷하네요"라며 입을 열고 가정 폭력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을 말한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대화의 끝은 "페리, 일기장을 제게 주시겠어요?"이다.

  카포티는 페리가 살기를 바란다. 동시에 그가 죽어야 한다고도 여긴다. 전자가 감정의 문제라면 후자는 작가라는 정체성의 연장이다. 페리가 죽지 않는 한 살인에 따른 형사절차는 마무리되지 않는다. 카포티는 찜찜한 구석을 남긴 채 책의 결말을 쓸 순 없다고 생각한다. 항소와 상고로 여러 해가 지나자, 카포티는 "그가 이번 재판에서 이기면 나는 완전히 신경쇠약에 걸려 다시는 회복 못할 거예요"라고 말할 지경이 된다. 하지만 정작 페리가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했다는 소식을 전하자(사형이 확정됐다는 뜻이다), 그는 교도소에 면회도 못갈 정도로 침대에 누워 시름한다.



  연인인 잭 던피가 자신과 페리 사이를 의심한다며 "한 인간을 이용하는 것과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하겠냐”고 넬에게 물었을 때 카포티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페리가 죽은 뒤 카포티가 '그를 구하지 못했다'며 괴로워하자, 넬은 "당신이 원하지 않은 거예요"라고 말한다(영화 내내 넬은 카포티의 초자아처럼 보인다. 카포티의 취재를 돕지만, 페리를 성공적으로 속여 이야기를 들었다며 카포티가 기뻐할 때 그녀는 불편해 한다).


전복


  이 영화에서 책은 두 번 등장한다. 카포티가 구치소에 들어가기 위해 담당자에게 건네는 책은 그의 첫 장편소설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이다. 성소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이 책을 페리는 구치소 안에서 샌더슨 부인에게 빌려 읽는다. 두번째 책은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다. 한겨울 교도소에 찾아간 카포티는 페리에게 이 책을 건넨다. "그(소로우)는 왜 수감됐죠?" 페리의 질문에 카포티는 이렇게 답한다. "세금을 안내서라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실은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이죠. 추종하기를 거부해서."



  두 책의 역할은 다르다. 카포티의 책은 둘이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등장한다. 이때부터 카포티는 페리에게 수많은 거짓말을 한다. "책은 얼마나 썼나요." "아직 못썼어요." "책 제목이 '인 콜드 블러드'(냉혈한)이라면서요." "발표회 주최자가 선정적으로 붙인 거예요." 카포티는 늘 책을 완성하려면 사건 당일 페리의 기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면 <월든>을 줄 때 카포티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직전엔 카포티가 스페인에서 책을 쓰고 잭, 넬과 이야기하는 시퀀스가, 직후엔 뉴욕에서의 출판발표회가 그려진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잔여처럼 보인다. <인 콜드 블러드>에서도 <월든>은 언급된 적이 없다.

  페리의 사형을 앞두고 카포티는 눈물을 흘린다. 그의 죽음이 기막혀서인지, 죽음을 바란 자신이 죄스러워서인지는 알 수 없다. 이와 달리 페리의 감정은 선명하다. 그를 보러 가는 길, 카포티의 뒷모습 위로 페리의 목소리가 깔린다(화면에 나오지 않는 인물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기법을 보이스오버라 하는데, 영화에서 해당 기법이 쓰이는 것은 이 장면에서 처음이다). "그동안 해주신 일에 감사했습니다." 여전히 혼돈스러운 카포티와 달리, 그를 만난 페리의 표정은 덤덤해 보인다.



  쓰지 않고 읽은 자만이 이해와 용서에 가닿았다는 결말은 글쟁이에게 불길한 예언이다. 책을 세우면 내면을 잃고 작가를 포기하면 모든 것을 상실하는 삶. 그에게 달리 무슨 선택이 가능했을까. 남의 책을 빌릴 때 비로소 진심을 전했다는 설정이 내게는 감독이 남긴 복음처럼 보인다. <카포티>는 글 쓰는 인간의 어떤 숙명에 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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