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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Apr 28. 2024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잘못된 단어>


1.

원고 1교를 마감했다. 편집자님께 큰 짐을 지웠다. 너무 많이 바꾼 탓이다. 사실상 새로 썼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래서야 1교가 의미없지 않은가 싶고. 2교는 큰 수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려고 1교에서 수정을 많이 한 거긴 한데, 좀 과했던 것 같다. 교정도 마감이 늦고, 브런치도 연재를 못했다. 주초가 되어서야 책을 한 권 읽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게 부끄럽다. 심지어 아직 원고의 내용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6월 전에 어떻게든 적당한 타협을 통해 출간을 해야 서로가 다 편할텐데. 내게도 좀 문학적 재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2.

오랜만에 책과 밀고 당기기를 했다. 그간 읽은 책들은 대략 읽으면서 거의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리게 되었는데, 이번에 읽은 책은 맞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이게 맞나 싶은 부분이 번갈아 나온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그간 너무 내 입맛에 맞는 책만 읽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자기 의견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으면서, 정작 내 의견과 다른 책들 - 거기에도 분명한 논리와 이유가 있을 것임에도 - 은 잘 손대지 않았던 게 요즘이었다. (특히 추천사에 별로 내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 있을 경우엔 책 자체를 사는 게 싫어지기도 하므로) 책 자체를 덜 읽기도 하고, 책을 사는 일도 줄다 보니 확실히 그 경향이 강해졌다. 책이라는 게 도전하듯이 읽는 게 나름 중요한데 말이다. 자기 의견을 강화하는 필터 버블이 꼭 트위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프라인 독서 과정에서도 필터 버블은 충분히 강화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읽는 책들이 다 편향되어 있다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내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지점, 혹은 속으로는 미묘하게 서술과 사실이 어긋나는 것 같아도 확언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을 짚어주는 이야기를 자주 일부러라도 접해야 균형을 잡을 수 있지 않나.


3.

최근에 서점에서 관심을 가지고 훑어본 책은 총 세 권이다. 하나는 르네 피스터의 <잘못된 단어 :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이다. 독일인 저널리스트가 트럼프 대통령이 재임하던 시절 미국의 상황을 목격하고 분석한 책이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과도하게 집착해 사실상 토론을 침묵시키는 것이 진정 ‘좌파’의 미덕인지를 묻는다. 어쩌면 우연한 속성에 불과할 수 있는 정체성을 정치의 핵심으로 삼는 최근의 미국 좌파 / 자유주의자들의 행태가 좌파의 몰락을 불러 일으킨 것 아니냐는 걱정도 담겨 있다. 트럼프라는 희대의 인물을 대통령을 뽑은 데엔 좌파의 자기분열도 한 몫 한 거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좌파가 정작 자신들의 지지층인 블루 칼라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보다는 엘리트 계층의 자기 표현에 집착하여 극우파 포퓰리스트를 지지할 자유를 줬다는 거다.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내고 토론하는 대신, 혐오 표현이라 규정하고 (무슨 기준으로?) 발언 자체를 틀어막는 것이 주요 정치 전술이 되면서 겉으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전반적으로는 이해할만한 주장이면서도, 중간 중간 갸우뚱한 부분도 적지 않다. 가령 지금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상황에 빗대고, ‘근본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들과 같다고 비난하는 것. 1930년대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연대해서 더 큰 적인 파시스트와 나치를 몰아낼 생각을 하기보다,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거부와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거부를 일삼으며 사실상 히틀러의 집권에 도움을 줬다는 건데, 그 상황을 그대로 현재의 미국 상황에 대입하는 거다. 두 집단이 애초에 목표가 같아서 연대가 가능했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할 거고(스파르타쿠스 봉기 과정에서 사민당 출신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때려잡기 위해 군대와 우파 준군사단체 자유군단까지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공산주의자들이 잊었어야 한다는 건가?), 최소한 공산주의자들은 변화 불가능한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부족 정치보단 보편의 인간들을 위한 정치와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민주당의 정치적 주장 - 더 큰 적과의 전쟁을 위해서 우리 ‘진보’는 한 데로 뭉쳐야 한다, 단 내가 제일 큰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내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건 바뀌지 않고 - 을 그대로 따라,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말에 끌려다니는 탓에 작금의 진보 정치가 개판이 났다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한 편으로는 정치란 결국 ’이겨야‘ 효과를 내는 싸움이고, 그렇기 때문에 분열보다는 타협이 더 좋은 결과물을 낼 때가 많긴 하지만 (한국과 미국의 지난 대선들을 잠시 떠올려 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타협‘이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따라 타협의 결과물에 대한 기대치도 서로 달라지는 것이다. 무엇이 ’연대‘와 ’타협‘의 기둥이 되어야 하는지는 묻지 않고, 일단 우리가 한 편인데 어떻게 갈라져서 이렇게 각개격파 당할 거냐고 묻는다면... 타협은 언제나 요원한 일이지 않느냐는 거다. 정치란 지지부진한 것이고, 극단주의자들의 성급함이 정치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은 김민하의 문장으로 반박하고 싶어지고.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누군가는 그 사이에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견디지 못하고 미친다. (그들 앞에서도 ‘정치란 원래 결과물이 나오려면 오래 걸리는 거에요, 성급해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보라...)


4.

그럼에도 이 책은 한 번 쯤 읽어볼 가치가 있다. 하나는 ‘정체성’ 정치가 기대는 그 정체성이라는 게 매우 우연적으로 부여된 것이거나, 싸움을 위해 선택되는 것이라는 거다. 우리의 몸은 다양한 정체성들이 관통하는 장소다. 나는 인종차별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고, 노동 착취의 피해자인 동시에 착취의 가해자일 수 있다. 다양한 정체성들의 교집합을 표로 만들어 서열을 세우고 어떤 정체성 조합이 가장 ‘피해자’다운 것인지를 묻는 것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묻는 지점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우파라고 정체성 정치를 활용하지 않을 것 같은가?) ‘보편’이 그간 특수한 인종, 계급, 성별의 ‘특수’를 은폐해 온 사실을 부정해선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편’ 그 자체를 다시금 고민하지 않으려는 태도 역시 무책임하다. 비슷한 고민이 수전 니먼의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에서도 비슷하게 변주되는 건 흥미롭다. 저자간의 정치적 스탠스 차이는 보이지만 (중도 좌파 자유주의자와 ‘구’좌파(!)의 차이려나?), 둘 다 작금의 정치 - 정체성 정치라는 또 다른 부족 정치의 문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과도한(?) ‘혐오 발언’ 규제 - 가 대화나 토론 대신 사실상 정치의 소멸로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묻는 건 비슷하다.  


다른 하나는 ‘침묵’이다. 어떤 발언들은 분명히 우리 사회에 해롭고, 때로는 끔찍한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 선동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 금지할 것인가? 네이딘 스트로슨의 책 <혐오: 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를 떠올렸던 것도 이 맥락에서다. 광범위한 발언의 억압이 과연 민주주의를 위해서 좋은 결과를 일으키는가? 오히려 그 선동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공격할지 전략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때는 아닌가? (어차피 공론장에서 금지한다고 해서 유튜브에서 언급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말할 자격을 두고 벌어지는 지리한 논쟁은 침묵을 강화시킨다. 어떻게 감히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말에 전통적으로 좌파는 ‘우리도 말할 권리가 있다’고 맞받아쳐왔다. 정체성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오히려 그런 자격들이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맥락을 삭제하는 읽기가 확대되는 문제도 있다. 가령 단어 하나만 똑 떼내어 그것이 올바르지 않은 언어 사용이라고 비난하고, 그 사람이 말할 자격이 있는지를 따져 묻는 방식. 그 과정에서 실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사라진다. 풍자는 맥락이 중요한데, 맥락 자체가 자꾸 거세되면 풍자도 설 자리가 좁아진다. 반대로 조롱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맥락을 다 따져볼 필요 없이, 그저 ’이상한‘ 단어를 썼다고 조롱하는 건 쉽기 때문이다. 쓰는 사람들이 조심하는 만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최소한의 고려가 필요한데, 현재로선 ’언제 실수하는지 두고보자‘고 칼을 갈고 서로를 겨누고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토론처럼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기 쉬운 프로그램들에 출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있다고 하더라도 태생적인 선동가들에게 더 유리하지 않을까? 어차피 그들에겐 실수가 중요한 건 아니므로.


이 책의 내용에 동의하느냐, 아니냐를 묻는다면 아닌 쪽에 더 가깝고, 특히 ‘싸가지’ 운운하는 품성론을 운운하는 부분에 대해선 더 그렇다. (품성이 좋은 게 정치에서 중요하다면 왜 지금 정치인들이 지금 품성이 이 모양 이 꼴인지에 대한 설명이 안 된다...) 그래도 끝까지 읽고 나면 몇몇 문장들에는 확실하게 밑줄을 그을 수 있다. 어디에 긋느냐에 따라 지금 정치에서 무엇이 문제라고 보는지가 드러날 거다.


5.

토론이 사실상 사라진 사회, 우리편 이기라는 응원만이 남아 있는 정치. 일단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므로 모든 차이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정치공학. 정치가 타협의 산물이라면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 건강한 토론과 비판, 가치의 차이를 두고 벌이는 논쟁을 부활시키는 게 맞을 것이지만, 정치가 내전의 연장선이라면? 네가 죽거나 내가 죽는 둘 중 하나의 문제로 여겨진다면, 토론이나 타협은 변절이나 배신, 혹은 협잡질로 여겨질 것이다. 정치가 대체 당신에게 뭐냐, 정치란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한 생각에 따라 문제에 대한 진단도 달라지겠지. 나는 무엇을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저자는 확실히 전자로 보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을 파괴하려는 모든 시도들로부터 그 역사적 결합물을 지켜내려고 애쓴다. 정치를 후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말에 별 관심도 없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만들어서 불편해진 아저씨의 푸념에 가깝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그 중간 어디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 자체보다 이 책이 - 수전 니먼의 책을 포함해서 - 이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질지가 궁금해진다. 현실은 찻잔 속의 태풍일 것 같긴 한데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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