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
#
대학생 때 내 인생을 망친(!) 책 중 하나가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이다. 두껍고 무거운 이 책을 읽고 나서 미디어 연구 비스무리한 걸 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물론 이 책이 미디어 연구에 있어서 얼마만큼의 중요성을 지니는지,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는지를 따져볼만한 머리는 없었다. 게다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겠나. 앞뒤 재지 않고 읽은 책 한 권을 가지고 주화입마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결국 또 다른 책들을 읽고 다른 책들에 감동하길 반복하다 '아 나는 연구를 할 사람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제는 오로지 독자로 남았지만, 어쩌다보니 그 미디어 산업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 때 내가 찰리 멍거의 책 같은 걸 읽었으면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르지. (누군가는 책 따위에 인생이 좌우되진 않았을 것이나)
하버마스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 주요 국가들의 역사적 발전 과정 속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로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처음엔 소수의 지식인들 사이의 예술 비평의 장에 불과했지만, 대량 출판이 산업적으로 가능해지고 그에 따라 독서 인구가 증가하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변모한다. 출판과 관련된 직종과 인원이 증가하면서 이제 도시민과 부르주아들로 이루어진 공중의 '의견'이 형성될 여건이 마련된다. 프랑스 혁명은 이 공공적 의사소통망을 정치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부르주아들은 책, 잡지, 신문과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의견을 형성하고 주고받았다. 물론 부르주아들과 달리 프롤레타리아트는 별도의 '평민적 공론장'을 형성하고, 각각은 일종의 헤게모니 싸움을 벌였다고는 하지만,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뤘던 건 우리가 으레 상상하는 여론형성의 공간으로서 '부르주아적 공론장'이다.
#
1960년대에 나온 책 이야기로 시작한 건, 이 노학자(나는 그의 장수 비결이 언제나 궁금하다)의 새로운 책이 얼마 전에 나왔기 때문이다. 이름하야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 두께는 비할 바 아니지만, '새로운' 게 대체 뭘지 궁금해졌다. 출판사에서 붙인 이름도 아니다. 원제가 <공론장과 숙의 정치의 새로운 구조변동>이다. 부르주아 공론장의 등장만큼 '새로운' 국면이 등장했다는 건가?
디지털 시대 변화한 미디어 구조가 어떻게 정치적 의견 형성과 소통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따져보고, 이것이 정말로 '진보'인지 아니면 공론장의 '파편화'를 이끄는 것인지 짚는다. 공론장이 그간 민주주의 정치를 가능하게 만들어 왔던 힘이 어떻게 디지털 시대에 파괴되는지, 그 핵심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는 거다.
민주주의라는 건 '정당성'을 의탁할 외부의 무언가가 없는 정치 시스템이다. 신앙으로 왕의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우리에겐 공통의 종교나 모두가 동의하는 단일한 세계관따윈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무엇을 믿고 정치적으로 협상하고 타협하고, 하나의 공동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하버마스는 '제도'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두 정치적 의사 결정에 동등하게 참여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토의를 거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를 사전에 확인할 수는 없다. 단지 정당한지 아닌지만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공통의 의견을 형성할 때 얼마나 평등하게, 얼마나 합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형성했는지에 따라 이 의견이 정당한지 여부를 물을 수 있다. 진리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최선의 방식으로 의견을 형성했는지만을 따지는 '제도'가 유일한 정당성의 원천인 것이다.
자유로운 토의가 이루어지느냐 아니냐가 정치적 공론의 정당성을 결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견이 묵살된 소수는 언제든 공론을 '공론'이 아니라고 정당하게 비난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형성된 '공론'이 그 자체로 정치적 의사결정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사람은 결국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자신만의 결단으로 선거에 참여하며, 공론이 반드시 결단의 근거가 되진 않는다. 선거든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회든 민주주의는 형성된 공론 그 자체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공론의 형성 과정에서 반드시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공동체가 어쨌든 계속해서 뭔가 결정을 내리고 굴러는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히려 하버마스는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이 공론장에서 언제나 복수의 여론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대중매체에 의해 제어되는 의견 형성은 분산된 국가시민 공중에서 복수의 여론을 창출한다. 주제·기사·정보를 묶어 윤곽이 마련된 이러한 의견들은 각각 관련 주제, 올바른 정치적 목표, 최상의 문제 해결 전략을 선택하고 중요도 판정을 받기 위해 경쟁한다. 우리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상황이 특히 중요하다. 국가시민, 즉 주권자의 의지가 정치 체계 전체의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중매체가 이러한 의견 형성을 위해 제공하는 기사의 진상규명 품질에 따라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27)
사람들은 언제나 저마다의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투표장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정치적 의견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것은 대중매체였다.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거나,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데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신문과 책, 잡지 같은 매체들을 통해서 의견 형성에 필요한 정보들을 주로 얻어왔으므로. 대중매체는 때로는 각자의 경제적 이유든, 아니면 정치적 이유든 논쟁적인 의견을 형성한다.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서로가 새로운 정보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상황이, 서로의 의견만을 고집하는 것보단 낫다. 적어도 그래야만 우리는 지금의 임시적인 '다수결'을 감내할 수 있다. (다음엔 새로운 정보에 따라 결정이 또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없이, 지금의 결과를 어떻게 정당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문제는 더 이상 어떤 '교정'이 더는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도래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서로가 동등하지만 다른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하는 다원주의는 점차 의심받는 사상이 되어가고 있고,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선거에 효능감을 상실한 배제된 자들은 투표를 체념하고 포기한다. 선거를 통해 대체 무엇이 바뀐다는 것인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포퓰리즘은 공공연하게 체제 전복의 야심을 드러낸다. 불평등을 완화하고 사회 통합의 구심력을 형성하기 위해 애쓰던 복지국가는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흐름 앞에서 힘을 잃었고, 튕겨져나온 사람들은 '공동체'의 일부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을 오래 견뎌야 했다.
좌파는 한동안 이들을 포괄하지 못한 채 방기했고, 그 값을 톡톡히 치렀다. 트럼프는 러스트벨트의 버려진 노동자들의 상실감을 자극해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고 - 연속해서 두 번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버려진 이유를 좌파로부터 찾는다. 다시는 버려지지 않고 싶다는 마음은 강력한 신화적 공동체로의 회귀로 이어졌고, 오늘날 좌파는 이 앞에서 갈팡질팡한다.
#
민주주의 공론장이 붕괴하고, 극우파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발흥하고 있는 상황은 디지털화된 미디어 체계 그 자체의 특성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게 하버마스의 진단이다. 공론장의 인프라를 형성하는 저널리스트, 저자, 편집자 등등 전문 인력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중매체에서 전달되는 미디어 품질의 수준을 유지하는 기술자들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뉴미디어 플랫폼 사업자들은 자신들의 연결망 위로 유통되는 정보들을 편집하거나 선별하는 데 큰 수고를 들이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연결을 가능한 한 늘리는 방법을 통해 수익을 증대시켰다. 모든 사람들은 독립적인 저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양질'의 저자가 되는 방법은 아니었다. 한 때는 '탈중앙화'가 만고의 진리처럼 여겨졌지만, 그것이 얼마만큼 '책임'을 분산시켜버리는지 생각해보자. 부르주아 공론장의 '평등주의적-보편주의적' 요구가 뉴미디어로 성취되었다는 환상은 그저 디지털 대기업의 이익과 극우주의의 발흥을 가리는 눈가리개처럼 보인다.
뉴미디어가 제공하는 글로벌 조직의 잠재력은 루카셴코에 대항해 끈질기게 항의하는 용감한 벨라루스 여성에게뿐만 아니라 우익 극단주의 네트워크에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매체 이용자의 자기 전권 부여가 하나의 효과라면, 다른 하나는 아직 뉴미디어의 사용법을 충분히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올드미디어의 편집적 후견에서 벗어남으로써 치르는 대가이다. 인쇄기가 모든 사람을 잠재적 독자로 만들었듯이, 오늘날 디지털화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 저자로 만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글을 읽는 법을 배우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50-51)
우리의 낙관적 전망과는 반대로, 인터넷은 서로가 연결됨으로써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기반을 형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로 쉽게 서로를 차단하고 서로가 비슷한 말들을 반복하는 사람들만을 곁에 두는 방식으로 쾌락을 극대화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귀를 막고 시끄럽게 외치는 세계를 만들었다. 트위터 논쟁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지 않나? 쉽게 도망갈 수 있고, 차단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니 더욱 집요하게 찾아가서 내 말 들으라고 괴롭히고, 수 싸움으로 입을 막거나 열고. 여기에 어떤 '합리적' 대화라는 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가뭄에 콩나듯 있긴 하지만) 트위터라는 거대한 혼잣말의 세계가 어쩌면 '새로운' 공론장 그 자체는 아닐까?
올드 미디어들은 그 자체의 문제로 인해서든, 아니면 뉴미디어의 성장으로 인한 압박 때문이든 점차 경제적 기반을 상실해가고 있다. 더 이상 정치 뉴스는 공중의 의견 및 의사 형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이 많은 시민-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진다. 그리고 이 상황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자명해 보인다. 더는 사람들에게 중요하거나,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자극적인 정보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언론사들도 사업자들이므로, 이 큰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긴 불가능하다. 뉴욕 타임즈와 같은 전통적 매체들도 이 흐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사업 다각화를 노렸지만, 여전히 광고 기반 - 광고에 기초한다는 건 사람들의 '관심'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 비즈니스 모델을 대체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공론장에 본질적인 것은 논의에 대한 적극적 참여와 소극적 참여 사이의 격차가 아니라 공동의 관심사가 될 자격이 있는 주제와 공동 관심사와 상이한 관심사에 대한 상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전문적으로 검토된 기사의 형식과 합리성이다. (65)
연예인의 마약 관련 가십 뉴스들이 쏟아지면서 정작 정책을 비판하는 뉴스들이 드물어지는 상황은, 언론 매체나 개별 기자들만의 선택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런 뉴스들이야말로 바로 우리들이 바라는 뉴스가 되었을 뿐이다. 무엇이 공동의 관심사가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건 뉴스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책임을 분산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가십 뉴스를 비난하면서 동시에 다른 가십 뉴스를 소비하는 소비자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 이 상황은 해결 불가능한 교착 상황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사적 관심사와 공적 관심사를 구분짓는 '문턱'을 조금씩 낮춰왔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무엇을 공론장에서 다루어야 하는지 명확한 선을 스스로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건, 공론장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개인들의 전략적 행동이다. 더 많은 팔로워, 더 많은 좋아요를 획득하기 위해 그들은 공론장이 외면한 '진실'이라며 자신만의 주장을 내세운다. 애초에 공론장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으니, 원래 공론장이 제 기능을 할 때에는 쉽게 반박될 수 있었을 의견들도 발언의 자격을 얻는다. 공식적인 논의는 거짓이고, 자신의 말만이 진실이라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반박할만한 '공론장'은 이제 없다. 누가 진실의 권위를 가지고 있을까?
#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의견을 가지고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며, 그 정치적 의사결정에 종속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의견 형성의 중요한 근거들을 마련해주는 '저널리즘'이 그만큼 존경받고, 또 비판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병기창'이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지켜내야 했던 보루다.
디지털 플랫폼은 이 의견 형성 과정을 뒤흔들고, 민주주의를 뒤흔든다. 보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양산되고, 통제되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확산된다.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회적 신뢰를 갉아먹는다. 이것은 한편으로 올드 미디어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미디어로부터 배제된 자들, 배제된 정보들은 발언권을 독점하는 미디어의 권한을 언제든 붕괴시킬 기회를 필요로 했다.
한편으로 디지털 플랫폼은 목소리를 빼앗긴 자들의 비상구 역할을 했고, 우리는 이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디지털 플랫폼이 '소통'만을 강조하고 '책임'을 방기하도록 내버려둔 결과, 우리는 거대한 반향실에 갇힌 존재들이 되었다. 자기반성 없는 올드 미디어는 신뢰를 재구축할 방법을 고민하는 대신, 뉴미디어의 이익을 나누어 먹을 방법만을 고민했다. 오래된 장기인 '관심 끌기'가 올드 미디어의 쇄신을 가로막았다.
얼마나 올바른 정보가 유통되는지, 이제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뉴스 소비자로서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할 수 있는 뉴스가 있다면 기꺼이 돈과 시간을 지불하지만, 그렇지 않은 뉴스들은 가차없이 공공의 토론 대상에서 제외된다. 몇몇 기자들, 몇몇 미디어들이 열정적으로 생산물의 품질을 보증하기 위해 애쓰지만, 시장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더는 올바른 정보 유통에 관심이 없다.
공론장에 등장하는 의견들은 원래 다양하고, 서로 합의가 불가능해도 상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합리적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의견을 교정할 수 있다는 대전제가 있었으므로. 하지만 정치가 사실상의 내전으로 전화하고, 진리값이 보장되지 않는 정보들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바꿀 능력도 의지도 상실하고 있다. 내전에서 의견을 바꾼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착상태는 심화되고 있다. 몇몇 저널리스트들은 뉴 미디어를 활용해 더 많은 공중에게 중요한 정보를 확산시키기 위해 애썼지만, 반대로 몇몇 재빠른 이들은 그 도구를 자신의 아집과 음모를 펼치는 데 사용했다. 음모는 돈이 되었고, 그 돈은 음모론을 확산시켰다. 이 완벽해보이는 구조를 깨트릴 수 있을까? 하버마스는 저자가 되는 법을 우리가 배워야 하고 플랫폼 사업자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
올드미디어의 뉴미디어 부서에 종사하는 나로서는 혼란스럽다. 내가 승인하고 내보내는 콘텐츠들은 과연 우리의 올바른 의사결정을 위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공론장에서 다뤄야 할만한 가치가 있는 콘텐츠인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주제에 대해서 한 마디를 더 보태는 게 이익이 되겠지만, 그게 우리가 정말 시간을 들여 관심을 가져야할 만한 중요성이 있을까? 저널리즘의 언저리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고민하는 게 당연하지만, 뉴미디어에서 수익을 내야 하는 관리자의 입장에선 고민은 사치에 가깝다. 그럴 시간에 빠르게 콘텐츠의 버블 속에 묻어 들어가는 게 성과가 나니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내 일터는 어떤 곳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일까? 고민의 시간이 다시 길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