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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l 01. 2024

새 책에 대한 이야기

24.06.30. 서울국제도서전 플랫폼P 북토크


지난 일요일, 2024 서울국제도서전 플랫폼P 부스에서 출간 기념 북토크를 진행했습니다.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책을 거들떠 볼 용기, 무슨 말을 할 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결심을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짧게 준비한다고 했는데, 막상 이야기가 끝나니 한 시간 반이나 흘렀습니다. 준비하느라 그간 연재를 제대로 마감하지 못한 죄를 사면받기 위해, 북토크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했습니다. 정리는 했지만, 시간이 부족해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귀한 시간 내서 이 곳에 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비가 많이 왔는데, 어떻게 오시는 데 불편한 건 없으셨는지 모르겠네요. 바로 옆 부스에 양세찬, 이동국, 나태주, 정보라, 정지아 작가님이 싸인회를 하고 계신데,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누군지 모를 사람의 무엇도 모를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하셔서 삼사합니다. 부디 그 발걸음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북토크를 가본 경험은 몇 번 있긴 한데, 직접 해본 경험은 없습니다. 이게 첫 책이라서요. 여러 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했으니 그렇게 어려울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황을 많이 했습니다. 일단 여기 모니터가 있는 줄 몰랐고요, PPT를 준비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말이야 흘러가면 모르지만, PPT는 계속 떠 있으니까 없어보이면 큰일이잖아요.


북토크를 하자는 이야기를 편집자님께 듣고 나서, 얼떨결에 그러마 하고 답을 한 후에 한동안 백지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책에 이미 할 말을 거의 다 한 것 같은데, 뭘 더 할 수 있을까? 책을 쓰는 일이 생각보다 기력을 많이 잡아먹는지라, 책을 다 쓰고 나서 지금까지 거의 한 달 넘게 책도 제대로 못 보고, 글도 제대로 못 쓰고 그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왜 또 뭘 한다고 겁 없이 나섰다가 이런 사단을?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 참 머리를 쥐어뜯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저께 여기 도서전에 와서 보니까, 사람들이 이 책이 무슨 책인지를 아예 모르더라고요. 표지만 봐서는 솔직히 저자가 누군지, 이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를 모르고, 그렇다고 띠지나 뒷면 설명이 없으니 책을 펼쳐보지 않으면 이게 방송국 이야긴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저자가 유명하면 그런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일단 내용이 뭔지를 알아야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정보가 있어야 기꺼이 2만원 가까운 돈을 내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사람들에게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왜 썼는지, 어떤 내용들이 들어갔는지를 간단하게 설명을 좀 하면, 나중에라도 이 책에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는 예비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짧게 앉아 있었지만. 저도 만약 책을 낸 사람이 아니었다면, 와서 기꺼이 읽어볼 엄두도 잘 안났을 것 같아서, 적어도 책 옆에 아 이런 책이구나, 이 안에 있는 게 교양국 PD의 공사다망한 생활이 담겨 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다른 이야기들을 준비했다가, 급하게 어제 좀 내용을 많이 바꿨습니다. 그래서 PPT도 많이 부실하긴 하고요. 최소한의 독서 길잡이 정도, 그리고 글 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썼는지를 이해하고 보게끔 만드는 게 오늘 북토크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글을 선뜻 돈을 내고 보러 오겠다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요. 우연한 마주침을 기대하는 긍정적인 의지에 대해서요. 


그 전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 전에, 저는 이 책에서든 이 자리에서든 성공한 경험을 말씀 드릴 게 없다는 사실부터 밝혀야 할 거 같습니다. 방송쟁이가 책을 쓰고 북토크를 하면 뭐가 궁금해서 올까 싶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성공한 프로그램의 제작기, 분투한 기억, 비하인드 등이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프로그램,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본 기억이 손에 꼽는 거 같습니다. 아주 가끔 사람들이 어, 그거 봤어요 하는 경우는 있는데 다 합쳐도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거 같기도 해요. 그러니 그런 건 유퀴즈에 나온 제 친구들의 책을 보거나 강연을 들으러 가면 해결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평범하게 방송을 만들러 다니는 남자의 이야기 정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부터 많이 무겁죠? 죄송합니다. 태생이 좀 안 웃긴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 일단 제 소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북토크 시작한 지 한참 된 거 같은데 아직도 제가 누군지도 모를 분들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한 지상파 방송국의 시사교양본부에서 12년째, 이제 13년차가 되었군요, 일하고 있는 평범한 PD입니다. 지상파 방송국 세 곳 가운데 유일한 상업방송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아니 않고, 저희도 공영방송이라고 하면서 ‘체통과 의무를 지켜라’라고 하시긴 합니다만, 그럴 때마다 사실 좀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이나 칼같이 나누지 정작 사람들은 그냥 지

상파면 다 통틀어서 레거시 미디어라고 부르거나, 아예 기레기, 시방새, 캐병... 등등으로 부르죠. 욕하기 편하긴 해요.


얼마 전에 나영석 PD인가요. PD협회라고 하는 곳에서 글로벌 콘텐츠 콘퍼런스를 하는데 그곳에 강사로 나가서 지상파 방송국을 보고 ‘폭파된 행성’이라고 했더랍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한때 찬란했으나 지금은 문명의 흔적이 사라진, 떠난 자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그런 곳. 맞는 말입니다. 지상파 방송국은 뭔가 시대를 잘못 만나 사라질 운명에 처한 영역에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드라마나 예능은 어떻게든 살아남을지 모르죠. 스튜디오로 분사를 해서 OTT에 납품을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회사의 변화 스튜디오화에 , 대해 찬양하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각자도생의 시기기도 하고, 돈이 도

는 신사업에 뛰어들 수 있다면 기존의 방송국 시스템같은 건 버려도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모두가 이곳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모두가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교양 부서가 그렇습니다. 방송국이라고 교양국이 별도로 다 있는 건 아니에요. 지상파 방송국은 교양국이 있지만, OTT에는 교양 부문이 따로 있진 않고, 종편만 가도 마찬가집니다. 교양 PD로 들어왔는데, 상당히 고민스러워지죠. 이 곳을 떠나면 내가 뭘 할 수 있지? 내가 하려던 것들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한탄조로 이렇게 된 이상 탈출이 답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정작 자신이 그런 특출난 사람이 아니어서 ‘선택지’가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 정도는 압니다. 몇몇 멋진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다들 그런 고민을 속으로 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가 정말 시대에 걸맞지 않아서 버려질 곳이라는 자기비하, 냉소적 판단이 어쩌면 잘못된 건 아닐까요? 그래서 이 곳에 남아 애정을 쏟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오래 쌓인 업력과 경험들을 무가치한 것처럼 평가절하하는 게 맞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시대가 바뀌어도 책이 필요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교양 프로그램들이 필요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물론 그게 꼭 교양국의 형태로, 별도의 부서 형태로 있어야 하느냐고 물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것에 대해선 저도 고민이 많지만 아직 답은 없고요, 이리저리 흔들리고 방랑하면서 회사에 버티고 있는 게 현재의 저의 솔직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만드는, 제가 속한 곳이 사람들의 일상에 깊게 개입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함께 숨쉰다는 느낌을 어떻게하면 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어디를 돌아다녔냐, 저의 회사생활 대부분은 시사교양본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시사교양본부라는 게 좀 이름이 여러번 바뀌긴 했는데, 프로그램은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익숙하게 아는 프로그램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프로그램들이 여기 다 있습니다. 다들 한 번씩 들어보신 이름들이죠. 그리고 예상 외로 교양국 PD들이 만든 프로그램도 여기 있습니다. 경계가 좀 모호하죠? 이런 프로그램들을 저는 거의 12년간 11개의 팀을 돌아다녔네요. 


제가 돌아다닌 프로그램들 가운데 몇 개의 경험이 이 책 안에 있습니다. 가능하면 여러분들이 다 아실만한 프로그램들로 꼽았는데, 몇몇 프로그램은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만든 프로그램도 있고, 그래서 한방에 망한 프로그램도 있고. 아예 프로그램 팀이 아닌 곳도 있고요 편성팀에서도 3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프로그램 만드는 일과 살짝 멀어져서 다른 부서에서 일하며 프로그램을 보는 다른 시선들이 어떤지 좀 익힐 수도 있었던 것 같고요, 최근에는 유튜브 부서의 팀장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여러 개의 유튜브 채널들을 운영하는데 제가 그 중 두 개 정도를 담당하고 있고요.  유튜브 이야기도 살짝 말미에 있습니다만, 책에 쓸 수 있는 내용이 한계가 있다보니 많이 분량이 짧습니다. 


사실 유튜브 팀 이야기만 가지고도 이 정도 두께로 책을 쓸 수 있을 것 같은게, 이게 제 첫 팀장 일이라서 우왕좌왕하는 경험들이 산더미입니다. 아마 팀원들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쓴웃음을 지을텐데, 준비 좀 하고 팀장이 되지 그랬냐고 핀잔도 주고 그럴 거 같아요. 어쨌든 이 경험도 분명 PD로서 현장을 누비는 경험과는 또 질적으로 다른 경험인지라, 완전히 새로운 회사를 다닌다는 기분이 들긴 합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다큐멘터리 기획안도 내고, 그러면서 다큐멘터리 PD가 되는 걸 최종 목표로 삼고 있긴 하지만 좀 요원합니다. 다큐멘터리 슬롯에도 한계가 있고요. 젊은 PD들이 그만큼 늘었으니 자리가 부족한 것도 있겠고요. 그래서 녹록친 않은 상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회사를 뺑글뺑글 돌아다니다보니, 저는 제 자신을 ‘저널리스트’라고 부르는 게 상당히 겸연쩍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자격이 될까요? 교양 PD라고 해도 시사 고발 프로그램 경험은 그리 길지 않거든요. 몇 년이나 했지? 다 합쳐봐야 채 3년쯤 될 겁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스스로 저널리스트라는 자의식을 유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널리즘이 꼭 정해진 프로그램에서 실현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연애 프로그램을 하면서 저널리즘을 실현한다 말할 수 없지 않느냐고. 물론 동물 프로그램에서 동물학대를 고발할 수 있고, 역사 프로그램에서 독재를 비판할 수 있

습니다. 저도 그래서 아주 가끔씩은 유튜브에서 역사 콘텐츠도 만들고, 대담 콘텐츠도 만들어 보곤 합니다만 여전히 제가 ‘저널리스트’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대체 저널리즘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요. 기자를 하겠다는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니기도 하고, 최종 면접때까지도 결정을 못했던 사람이라 마음 속엔 상황만 되면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지만, 실제로 그런 자의식을 발현시킬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교양과 예능의 연성화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만큼 교양 피디들의 정체성에서 묘한 혼란이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합니다. 특히나 ‘상업방송’인지라, 성적과 벌이에 대해 고민이 공영방송에 비해서는 훨씬 더 압박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그 와중에 저희 부서 제외하고 다른 모든 제작 파트는 분사를 해버리기도 했고요. 존립의 문제에 대한 고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회사 존속에 대한 고민과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이대로 있어도 좋은 걸까요? 뭔가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 있긴 합니다만, 솔직히 아직 뭍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방랑하고 있을 때, 책을 쓰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바비 젤리저의 <저널리즘 선언>이었던가요,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올리고 나서였던 것 같습니다.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과 PD저널에 쓴 글을 보고 출간 제안을 주셨다고 했는데, 한편으로는 매우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제 정체성이 뭔지 정말 잘 모르겠었던 그런 상황이었거든요. 저널리스트가 되겠다고 사실 회사에 들어왔는데, 정작 그런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은 손에 꼽았으니까요. 그래서 자신감도 좀 부족한 상태였고, 책을 쓸 깜냥이 되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겠다는 대답이 막 쉽게 나오진 않았어요.


책을 반 년만에 내자고 하셨는데 편집자님 기억하세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이 안 되는데, 그 때 생각해도 말은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생산성이 떨어지는 내가 책을 반년만에 낸다고? 그것도 반년만에 책이 나오려면 교정 교열과 인쇄 빼고 거의 석 달 정도만에 원고를 다 쓴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제 마음 속에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고 있었던 걸 아셨나 봅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뭔가 이 일을 10년 넘게 하면서 이 일에 대해 평범한 사람이 기록을 남기면 어떨까 했었거든요. 장 루이 셰페르의 책 제목이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던가요? 아마 제가 책을 이 총서 시리즈가 아니라 제목을 붙여서 냈다면 이 제목을 어떻게든 변주했을 것 같습니다. 방송국에 다니는 평범한 PD 뭐 이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10년 정도 한 회사에서 일을 하니까 많은 일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슬슬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는지도 생각이 잘 안 납니다. 숨을 헐떡이며 멈춰 서서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 뭔지를 모르겠는 거죠. 성공한 사람이라면 제가 기록하지 않아도 남들이 대신 기록해줍니다. 아니면 기록하라고 계속 압박을 행사하든지 해서 강제로라도 뭔가 남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고, 제가 안 쓰면 제가 경험한 모든 것들은 그냥 없는 게 되죠. 헌데 성공한 PD가 아니라고 해서 자기 이야기를 남길 권한이 없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다 잊어버리고 초심도 까먹어버리기 전에. 프로그램이라는 상품의 바깥과 안이 있다면, 이 글은 안에서 프로그램을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는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그램도 사실 상품이니, 생산기록이라고 보면 편하실 것 같습니다. 만드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하며 만드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이시면 어떨까 싶어요. 제가 제작자 전체를 대표하는 건 아니니까요.




책이 공식적으로 인터넷 서점에 풀린 게 이번 주중이고, 교보문고 오프라인 서점은 어제 보니까 재고가 들어와 있더라고요. 책 내용에 대해 인지하고 계신 분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조금 더 원고를 일찍 마무리했으면 좋았을텐데, 책에 실린 내용들에 대한 자기 검열이 좀 심한 편이라 계속 여러번 뒤집어 엎으면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습니다. 다행히 도서전 직전에라도 책이 풀릴 수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책이 뭔지 잘 모르실 것 같긴 해요.


요새 책 트렌드는 좀 얇게 가는 것 같은데, 보시면 알겠지만 두께가 만만치 않습니다. 손에 잡히는 규격이긴 한데, 들고 다니기엔 살짝 부담이 되는 두께와 무게입니다. 요새 다들 책도 잘 안 본다는데, 이래서야 더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싶지만, 시류에 역행하는 게 레거시 미디어 종사자 고유의 특징이 아닌가 싶고요. 아닌가, 아니면 제 특징이죠 뭐. 얄팍하게 써서는 의미가 제대로 다 전달이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무게잡고 본격적인 학술서를 쓸만한 깜냥은 안 되고, 무게를 잡기엔 한없이 가벼운 사람이고. 나름 타협을 본다고 한 게 이 정도 두께가 나와서, 편집자님께 좀 미안합니다. 전 처음에 150장 쓰면 된다고 해서 A4로 150장을 쓰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가격을 보시면 알겠지만, 고민이 많으셨을 거에요.


진입장벽이 확실히 있어 보이죠? 내용이 어려운 건 아닌데, 일단 펼쳐볼 엄두가 나야 말이죠. 이게 가장 큰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여기서 이 책에 대체 뭔 내용이 있는지 소개라도 드려야 지금 사서 안 그래도 무거운 에코백에 우겨넣든지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든지 하실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북토크도 하자는 말에 순순히 따랐습니다. 뭔가 대책없이 큰 실수를 한 것 같긴 합니다만.


이 책에는 방송국 교양 PD 중 한 명이 10년간 겪은 일들이 담겨 있습니다.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프로그램을 생산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이야기도 담겨 있고요, 고민스러운 순간들, 후회했던 순간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동시에 회사원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순간들, 고민한 지점들도 같이 담겨 있습니다. PD이긴 하지만 어쨌든 회사원이니까요. 운신의 폭이 조금 자유롭긴 했습니다만. 그리고 방송국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려 는 사람들이 궁금했을 지점들도 약간은 담겨 있습니다. 대체 무슨 약을 하셨기에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도 있을지 모릅니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문장으로 남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만, 그래도 그럭저럭 대강은 담긴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책은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삶, 그리고 평범한 직장인의 자기 서사 완성하기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 사실 언론인이라는 게 뭐 그렇게 특별한 존재인가 싶죠. 우리의 자리라는 시리즈도 사실 그런 것들은 노린다고 생각하는데, 언론인도 하나의 동료시민이고 시민으로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 아니 생각 자체를 하고 있는지를 – 깨닫게 해주는 그런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같거든요.


저는 언론인이 아주 운 좋은 월급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시리즈를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언론인이라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그 안에서 실제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인간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면, 이 책이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인간이 일을 하면서 자기 세계가 어떻게 넓어지는지, 혹은 얼마나 자신이 얄팍한지 깨달아 가는지를 볼 수 있는 경험들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전달하기 위해 한 번 써봤습니다.


여기 있는 이야기가 어떤 ‘정답’을 제공해주진 않습니다. PD의 수만큼 보이는 세상의 수도 다를 것입니다. 저는 당연하게도 시야의 한계가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제가 보지 못한 혹은 안본 것들도 많을 겁니다. 그리고 저의 사회적 위치나 조건들로 인해서 형성되는 한계들도 명확합니다. 배고프지 않고, 쉴 곳이 있고, 입을 옷을 걱정하지 않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순진한 것도 있겠죠. 회사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회사 밖에선 우스꽝스러운 문화가 회사 안에선 자연스러운 공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 대해 제가 다 아는 것도 아니기도 하고요. 저보단 회사 돌아가는 건 재무팀이나 인사팀이 더 잘 알겠죠? 이 책이 참고서가 되기를 바라고 쓴 건 아닙니다.


애초에 에세이입니다. 에세이란 건 결국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그 경험을 확장해 나가면서 읽는 사람의 경험을 건드리는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도 그런 목표로 에세이를 썼습니다.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경험을 확장해나가다보면, 제 경험의 한계도 좀 더 명백하게 알게 되겠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부분들을 알기 위한 대화의 과정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박한다면, 선생님 말이 맞겠죠. 아마도.


그리고 그 맞는 말을 좀 더 풀어서 써 주신다면, 저는 이 책을 쓴 보람을 느낄 것 같습니다. 프로그램의 생산과 소비 그 언저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각자가 각자의 시선을 자유롭게 늘어놓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PD는 영상으로 말해야 한다고, 영상 이외에 말이 남아서는 안된다고들 합니다. 크게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건 대외적 메시지에 한정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하나의 인간으로서, 나약한 회사원으로서, 일탈을 꿈꾸는 반란자로서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PD든, 작가든, 프로그램을 만들고 소비하는 누구든 이 텍스트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 있어서 각자 할 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쓰기 전에 읽었던 책 중 하나가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입니다. 두툼한 소설인데, 시놉을 간단히 이야기해보죠. 주인공인 노교수가 어느날 우연히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려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그는 그녀를 붙잡고 끌어내려 목숨을 구해주고, 그녀는 이후 그의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끕니다. 오랜 시간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던 노교수는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리스본행 기차를 타지 않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 예상 가능한 삶을 살지, 아니면 이 기차를 타고 새로운 날을 시작할지. 소설은 그가 기차를 타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이 책이 저에게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입니다 . 탈까 말까 망설였는데, 안 타면 예전과 비슷한 날들이 반복될 겁니다. 타면, 제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겁니다. 제가 원하지 않는 미래라도 말이죠. 알고보니 종점이 바로 다음 역이라서 얼마 못가고 여정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죽어서야 내릴 수 있는 설국열차에 올라버린 건지도 모릅니다. 뭐가 되었든 좋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번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책에 있는 이야기를 모두 다 요약본으로 풀어버리면, 책을 쓰고 판매하는 이유가 사라질 겁니다. 요약본으로 영화를 보는 시대라고 하지만, 요약을 통한 ‘소비’와 독서라는 ‘감상’은 엄연히 다르기도 하고요. 감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요약이라는 게 존재하면 좋겠지만, 질적으로 다른 행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게 감상으로 얼마만큼 이어질지가 궁금하긴 하네요.


일단 간단히 목차를 보시면, 대강 열 다섯 꼭지 정도 됩니다. 한 꼭지당 하나의 프로그램이고요, 제가 회사에서 경험한 순서대로 프로그램이 쭉 정리되어 있습니다. 책 내고 나서 왜 자기 이야기는 없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놀라기도 했습니다. 보통 자기 이야기 나오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건 아닌 거 같더라고요. 유퀴즈에 출연하신 기장님과도 오래 같이 프로그램을 많이 다녔는데, 왜 자기 이야기 이번에 없냐고 하나 더 쓰면 꼭 넣어달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쓸 기회가 있다면 넣어 드릴까봐요.


창사특집 다큐멘터리에서 시작해서, 아침방송, 리얼리티 프로그램, 시사고발 프로그램 등을 지나 파일럿 프로그램 등등까지 쭉 앞만 보고 달렸던 시간들이 11번까지, 그리고 12번부터는 인생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말에 걸맞게 이리저리 휘어진 삶들입니다. 간략히, 짧게만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 입사 1년 정도 되었을 때 갑자기 CP님의 호출이 있었습니다.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조연출로 가랍니다. 저야 좋았는데, 솔직히 도움이 될까 싶어 걱정이 많았습니다. 다큐멘터리 찍으면서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었는데 잘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사실 제가 정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진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좋은 선배들, 좋은 외주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파국은 없었습니다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엔 제가 그렇게 주마간산 전세계를 훑으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가 여행기처럼 담겨 있습니다. 분량은 길지만 읽기에 그렇게 어렵진 않으실 거에요.


아침방송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때 저희도 보도국과 교양국의 아침방송을 통합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아주 빠르게 실험이 실패로 끝났지만요. 그리고 제가 딱 그 시기에 그 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PD라면 경험하기 드문 출입처 출입을 아주아주 짧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 덕에 살짝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느꼈던 게 전부는 아니겠고, 그게 완전한 진실은 아니겠지만 그 과정에서 저는 어떤 직종간의 장벽에 대해서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부서엔 각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와 관습이 있고, 그것이 생각보다 바깥에서 보면 우스꽝스럽다는 이야기가 이 안에 거칠게 담겨 있습니다.


미타니 코키라는 제가 존경하는 극작가가 있는데, 그분의 소동극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경험도 있습니다. 파일럿 프로그램, 그것도 시대를 앞서가버린 파일럿 프로그램의 예정된 결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면서도 느끼는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당시 팀장님께 책을 가져다 드리면서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는데, 아직까지 말씀이 없으세요. 살짝 불안하긴 한데... 거짓은 없습니다. 집에 가시면 이 망한 프로그램을 다시 보실 수 있을 건데, 추천드리진 않습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경험했던 이야기의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사건들도 있는데, 굳이 이 두 사건을 고른 건 하나는 재심의 벽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되는 사건이었다는 거, 다른 하나는 세계시민으로서 우리의 의무에 대해 고민해보는 사건이었다는 거라서 골랐습니다. 우연찮게도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촌동생이 두 번째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연락이 닿았고, 그 친구가 얼마나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는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그건 너무 사적인 이야기라 제가 안 담았습니다만... NGO 활동을 하고 있더라고요. 


방랑하는 과정에서 서점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들이 어떤 책이나 영화를 제사로 삼아서 시작하는데, 그렇게 쓰게 되는 계기가 사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책을 많이 읽으면서 이렇게 된 것 같더라고요. 나름의 독서 에세이? 인 셈인데 이 책도, 여튼... 그 부분도 <나는 메트로폴리탄 도서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생각의 씨앗을 삼아 썼습니다. 저도 그렇게 힘들 때 도망간 곳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그 덕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살아남기도 했고요.


짧게 편성팀 이야기도 있습니다. 편성팀이라는 부서 자체가 생소하실 수 있는데, 말 그대로 몇시 몇 분에 어떤 프로그램이 들어가고, 어떤 프로그램을 어떤 요일에 몇 주간 편성하고 얼마만큼의 돈을 주고 배정할지 등을 논의하는 부서입니다. 제작진과 프로그램을 보는 방향이나 관점이 완전히 다르죠. 마치 다른 회사에 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분명 최종 목표는 동일한데, 우리는 왜 서로 다르게 볼까, 그리고 그게 정말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해소할 수 없는 갈등일까 하는 고민들이 좀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은 유튜브 부서에서의 경험입니다. 초짜 팀장의 경험이기도 하고, 독자와 구독자, 시청자들에 대해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방송국 사람들이 조금은 그 태도를 바꿔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여기에도 좀 깔려 있습니다. 시청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는 황금률 같은게 은근히 깔려 있는데 이게 정말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규칙이 맞는지, 이대로 가다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포함을 좀 하고 있습니다.




간략한 소개는 이렇게 하고,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부분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좀 길게 논의가 될 거 같은데, 시간이 얼마나 허락이 될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는데, 고통 이야기를 좀 풀어볼까 합니다. 고통, 그러니까 방송국의 주력 상품이죠. 상품이라는 말에는 경멸적인 뉘앙스는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저는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방송국에서 일하고 있고, 이윤을 얻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생산하는 것이니까요. 물론 전파라는 공공재를 빌려 쓰기 때문에 공익적 목적을 잊어선 안됩니다만, 그걸 잊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선 다른 보통의 회사와 다를 게 없습니다.


방송국의 주력 상품은 타인의 고통입니다. 그것도 신선한 고통요. 오늘 누가 다쳤다더라, 누가 죽었다더라, 누가 사고가 났다더라, 누가 사기를 당했다더라, 누가 복수를 했다더라, 누가 누굴 괴롭혔다더라. 매일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여러분들에게 배달해드리는 게 저희의 사업입니다. 오늘 새로운 일은 없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죠. 보도국뿐만 아니라 교양국도 비슷한 일을 합니다. 저희 주력 시사 고발 프로그램을 보시면 단박에 이해가 가실 겁니다.


이 업에 내재한 고통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는 책이 있습니다. 김인경의 <고통 구경하는 사회> 입니다. 나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저는 나오자마자 사서 단박에 다 읽었습니다. 쟁쟁한 분들의 추천사로 앞뒤 띠지가 다 채워져 있으니 제 추천이 있다고 더 팔리거나 하진 않겠습니다만, 추천합니다. 문장들마다 폐부를 찌릅니다. 저자가 기자로서 취재하며 겪었던 고민들이 잘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이 가지고 있는 모순, 그리고 그 모순을 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이의 고통이 생생합니다.


저널리스트의 윤리적 딜레마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고통의 재현이란 사실 전달과 적극적 조명, 착취와 대상화라는 상이한 평가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추”라니요. 그의 글에서 수전 린필드의 <무정한 빛>의 흔적을 읽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수전 린필드는 통찰 없는 이미지, 자극적인 이미지를 경계하는 이들에 맞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주는 고발의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고통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자칫 고통을 타자화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도구로 삼는 위험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고통을 재현하는 이미지의 힘은 분명히 있죠.


<고통 구경하는 사회>의 저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전달하는 일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고통은 전달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나눔으로써 고통의 당사자들이 견딜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좀 회의적인 편입니다. 그와 같은 저널리스트들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진심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진 않을 것이니까요. 게다가 만드는 사람들의 윤리적 태도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윤리적 태도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보는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이미지를 소비할 것인지 자문하지 않는다면, 반성적으로 뉴스를 소비하지 않는다면 결국 좋은 저널리스트들의 고민은 한계가 뻔할 테니까요. 저는 만드는 사람이자 보는 사람이지만, 여기선 일단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만 해보면 좋겠습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시 한 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

죠.


다들 아시다시피, 방송이란 건 새로운 것을 찾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도 어제 일어난 일이라면 방송쟁이들에겐 큰 흥밋거리가 아닙니다. 가령 기후위기 같은 걸 생각해 볼까요. 기후위기는 분명 우리의 생존을 좌우할 중요한 문제지만, 뉴스 가치로 따지면 우선순위는 아닐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빙산이 처음 녹아 내렸을 때, 빙하가 물이 되었을 때, 태평양의 섬들이 바다에 잠기기 시작할 때엔 뉴스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두 번째 빙산이 녹아 내릴 때부턴 뉴스가 안 되죠. 새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는 사람에게든 만드는 사람에게든.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삶,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은 분명 개인에게 소중한 성취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길 바라죠. 하지만 방송쟁이들에겐 이 위대한 성취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유명한 첫 문장이 있죠.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문장으로 읽어낼 수 있는 의미들이 여럿 있겠지만, 저는 여기서 방송의 잔혹함 혹은 방송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잔혹함을 봅니다. 우리는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기 때문에 행복을 그리 오래 들여다보려 하지 않습니다. 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기 때문에 타인의 불행을 오래 들여다봅니다. 나와는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는 사실이 재미있기 때문이죠.


타인의 고통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건 좀 나중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고통은 즉각적 으로 ‘관심’을 이끌어냅니다. 방송은 사람들이 쳐다봐야 생존이 가능한 산업입니다. 여러분들의 관심이 곧 광고주들이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는 비용의 근거가 되니까요. 사람들이 오래 들여다보는 곳에 광고주는 기꺼이 광고판을 설치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게 불행이든 고통이든 무슨 상관일까요? 즉각적인 관심을 끌 수 있다면 말입니다. 내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선 고통만큼, 모니터와 브라운관이라는 벽으로 확실히 가로막힌 고통만큼 잘 팔리는 소재도없습니다. ‘즐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죠.


물론 전제가 있습니다. 모든 밥벌이는, 어떤 작가의 말마따나 신성합니다. 밥벌이만큼 중요한 게 어디있나 싶고, 때로는 밥벌이를 너무 등한시하는 이상적인 몽상이 이상한자의식으로 변모하는 경우들도 보기 때문입니다. 밥벌이를 염두에 두면서도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의 이상을 어떻게 현실과 조화롭게 조응시킬 것인지를 묻는 게 현명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론사라면 상업적 이익과 공익적 목적을 조화시킬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요. 회사도 한 사회의 구성원이고, 회사의 돈벌이도 그 사회의 용인된 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게 필

요합니다. 그 한도를 설정하는 상도덕, 그게 저는 저널리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요새 많이 해요.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동시에 부끄럽지 않은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뭘지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편한 마음들이 있습니다. 김인경의 책에는 이런 문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생략)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 길게 인용했는데, 문장이 좋습니다. 제 책이 아니라 남의 책 북토크를 하고 있는 기분인데 그만큼 좋은 문장입니다.


저는 이 문장에서 한동안 더 뒤로 나아가질 못했습니다. 고통도 오래되면 문화라니요. 오래된 고통은 새로울 게 없으므로, 사람들의 흥미를 잃습니다. 카메라도 고개를 돌리죠. 그래서 새롭게 보이려고, 고통의 피해자들은 ‘악’을 씁니다. 카메라 앞에서 오열하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시위를 하기도 하죠. 그렇게라도 해야 사람들은 다시 관심을 가집니다. 중요한 건 꾸준한 관심과 감시인데, 정작 오래 지속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나중’으로 밀립니다.


물론 방송국이 가진 자원에는 한계가 있으니, 가능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안들에 그 자원을 집중하고 싶겠죠. 그렇다고 사람들의 습성을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거고, 바꾸는 건 많은 비난과 불만에 시달릴 일이니 나설 이유도 없죠. 저도 예전에 시사 프로그램에 짧게 있는 동안 발제를 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건 알겠지만, 방송으로서는 가치가 떨어진다. 좋은 이야기라고 하지만 시청률이 낮으면 무슨 효과가 있겠냐고 말이죠. 사람들이 결국 많이 봐야 의미가 있다는 말은 분명 떼놓고 보면 적절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보는 사건의 범주는 한정되어 있죠. 사람이 죽거나, 다치거나, 치정에 얽히거나 하는 문제들요. 강력범죄가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주요 주제가 되는 건 이런 이유입니다. 해묵은 고통은 쉽게 취재 허가가 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사회에 중요한 사건이라고 하더라고요. 뭔가 계기가 없으면, 언제나 후순위가 되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일들을 겪다보면, 우리가 정말 사회를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한다기보다,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 우연히 사회에 좋은 효과를 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본질은 결국 방송이란 사업이고, 사업은 이윤을 추구해야 하며, 나는 그 사업체의 일부라는 것. PD도 결국은 회사원이고, 약간의 자유로움이 허락되지만 회사라는 틀로부터 자유로우려면 회사를 떠나는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회사를 떠나면, 시사고발 PD로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게 더 어렵습니다. 어떤 쪽을 택하더라도,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고 그래서 현실을 핑계로 주저앉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저널리스트라는 말이 과연 우리같은 회사원들에게 가당한 자격일까 하는 생각들도 많이 하고요 깡이 . 부족해서였을까요? 상사의 말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취재를 해나가는 무모함이 부족해서였을까요?


한탄을 금지해야 하는데. 정리하면, 방송국이란 결국 고통 판매점입니다. 매일 새로운 고통이 사회에 일정량 이상 벌어져야 저희가 밥을 벌어 먹고 삽니다. 매일 사건이야 벌어지겠지만, 밥벌이가 되는 사건은 정해져 있습니다. 어제 일어난 사건과 조금 다른 종류의 사건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매번 가능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다보니 이 산업의 종사자들은 어떻게 매번 사건을 다르고 새롭게 보여줄지, 혹은 뭐라도 새로운 건 없는지 발견하는 데 도가 튼 것 같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 중 하나가, 이 일이 고통의 총량을 세계적 차원에서 줄여주는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궁극적으로 “오늘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뉴스는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세계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오면 이 방송국이나 신문사는 문을 닫을지도 몰라요. 예능이나 드라마가 먹여 살리니까 방송국은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시사고발 프로그램이나 보도국은 폐쇄되겠죠. 세계의 고통을 본질적으로 해소하는 일이, 비즈니스적인 차원에선 추천할만하지 않은 거라는 아이러니함. 그게 제가 느끼는 아이러니함입니다.




고통이라는 건 다루기도 좀 까다롭습니다. 미디어는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드러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놓치는 게 없는 것처럼 타인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틀짓습니다. 고통을 접한 저널리스트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 고통이 수용되고 전달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고통이 표출되면 제대로 수용이 안됩니다. ‘선을 넘는’ 행위가 되는 거죠. 정작 그 고통의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고압적으로 그들을 대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여러분의 고통을 타인에게 이해를 못 시킨다는 식으로, 점잖은 척 말하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우리가 선을 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상대방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최근 복간된 책이 하나 있습니다. 오카 마리의 <기억, 서사>라는 책입니다. 예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인데, 최근에 복간된 책들이 좋은 게 많아요. 제 책에도 짧게 인용을 해두긴 했습니다만 이 책의 핵심 질문은 이겁니다. “타자가 경험한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어쨌든 근본적으로 타자가 경험한 ‘사건’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편적으로나마 그 기억을 나누어가지려는 시도들이, 사건에 잠식된 사람들을 위로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아까의 책들과 비슷한 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전달하려 애쓰는 ‘시도’들의 유용성에 대한 이야기죠 결국.


문제는 주객전도입니다. 그리고 이 주객전도가 이 업계에선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제대로 그 고통을 나누어지려는 시도들이 결과적으로 사건의 당사자들을 위로하는 것일 뿐, 어떤 방식이든 전달만 하면 자동으로 당사자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저널리스트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아니면 회사 차원의 수익을 위해서 사건을 ‘전달’하는 행위가 그들의 고통을 나누어지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요? 진지하게 고통을 나누어지려는 시도를 하는 저널리스트들은, 조직 내에서 대부분 힘의 열세에 놓여 있다고 저는 봅니다. 적어도 다수는 아닌 거죠.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도 결국 자본의 요구인 겁니다. 이런 거죠. 당신에게 매달 지급하는 월급이 있는데, 적어도 그 돈을 준 만큼의 수익은 벌어다 줘야지 않냐는. 그것도 매번 들이닥치는 마감에 치여 살아야 하는 사람 입장에선 깊게 생각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럼 가장 효율이 좋은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그게 결국 사람들의 직관적인 관심에 호소하는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일 겁니다.


돈을 태우고 자극을 강하게 주면, 사람들의 눈과 귀가 쏠립니다. 조회수가 오르고 수익이 나면 많은 게 정당화되죠. 이렇게 번 돈으로 자극적이지 않은 좋은 영상을 만들자고. 하지만 정작 다음 영상을 올릴 땐 다시 한 번 이 결정이 유예됩니다. 다음 영상에선 좋은 영상을 만들고, 이번엔 재미있는 걸 만들자고. 영원한 유예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다보면 문득 두려워지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잔잔하면서도 힘이 있는 영상을 더 이상 못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 교양의 힘이라는 게 거기에 있는 것 같은데, 이러다간 우리 부서가 필요없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그 날을 내가 앞당기고 있는 건 아닐까?


교양국의 존폐 문제랑도 저는 연결되지 않을까, 그렇게 좀 기우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정보성 프로그램, 사회 고발성 프로그램,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도 만들긴 힘들었겠지만, 명분이 있고 시청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둘 다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코드 커터라고 하죠, TV를 보지 않는 사람들요. 자기가 원하는 영상들만 모아서 볼 수 있는 OTT를 구독하고, 유튜브 광고를 없애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구독하면서 TV는 끊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제 전처럼 진득하게 앉아서 뭘보게 하기도 힘들고, 그런 독자들이 다 파편화가 되어 있다보니 ‘공통 기반’에 기초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원래 TV라는 게 좀 중산층 편향적이긴 한데, 그 중산층이 사라지니 TV도 설자리를 잃고 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교양 부서가 직격탄을 맞는 거죠. 애초에 이 부서가 지상파 제외하고 몇 군데나 있는지 생각해보면, 없어지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도움이 되자고 이 일을 시작했는데, 가면 갈수록 내가 만드는 영상들이 세상에 정말 도움이 되는 걸까 싶어집니다. 저의 한계를 매일 깨닫고 있죠. 이 거대한 흐름을 바로잡을만한 힘도, 의지도 부족한 사람이라 약간 흘러가는 대로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양을 아예 연성화 하거나, 아니면 타인의 고통을 최대한 자극적으로 팔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저는 별다른 저항의 방법조차 모르겠습니다. 물론 개인의 의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시대가 더 좋죠 아는 척 하고 계몽하려 드는 방송국놈들 영상 안 볼 수 있고, 각종 규제에 심의까지 있는 잘려진 영상 보느니 원하는 대로 잔인하고 즐겁고 수위 높은 영상들만 골라보는 게 비용을 내도 더 낫지 않냐 하는 경우도 있고요. 저는 단지 제가 속한 공동체의 효용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를 고민할 뿐입니다.


아마 제가 중심부에 있었다면, 승승장구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방식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러 부서들을 떠돌면서 ‘구경’하는 사람의 자리에 자주 있었습니다. 그게 제 태도를 좀 많이 결정하지 않았나 싶어요. 사람들은 어지간해선 다 중심에 있기를 바랍니다. 기둥 뒤가 편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찬밥신세가 된다는 걸 뜻하진 않으니까요. 기둥 뒤에 있어도 중요할 땐 자기를 찾아주길 바라죠.


하지만 세상은 좀 잔혹하고, 우리는 대부분 원하지 않는 자리에 타의로 섭니다. 그리고 그걸 유배라고 생각하거나, 대기하고 언제든 버리고 떠날 곳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대체 중심이 뭘까요? 중심이 어딘 걸까요? 회사 생활을 꼭 모범적으로 하고, 그래서 의사결정의 핵심 부서에 가는 게 중요할까요? PD 생활을 하다가 안 하게 되면 그건 좌천이거나 탈락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평생 PD를 할 줄 알았다고 해고 그건 제 바람일 뿐이고, 짧은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방랑을 해보면 생각보다 세상은 다양하고, 넓고,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제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회사 구조상 그게 잘 안되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잠깐 길이 다른데로 샜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다 말았던 고통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요. 저도 취재를 하며 사람들의 고통을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통들을 공익적인 이유로 방송 전파에 실어 보냈죠. 요샌 전파로는 잘 수신을 안하고 거의 케이블로 합니다만. 그런데 이게 정말로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던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고통스런 경험을 저에게 털어놓는다 할 지라도, 취재하는 사람은 그 고통을 방송에 실을지 말지를 스스로 재차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면 고통이 공적으로 회자되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그 고통이 자신을 엄습해오는 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카 마리의 말마따나, 이제 사건이 주체가 됩니다.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건은 엄습해 옵니다. 그리고 그런 사건을 지금 이 자리에 불러오는 게 바로 우리들의 일입니다. 방송은 지워지지 않을 거고, 그렇기 때문에 무뎌진다 해도 그 고통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경험을 반복해야 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감안하고서 이 이야기를 꼭 해야 하겠다고 하며 털어놓는 사람들이 있고, 그게 저의 죄책감을 반감시켜 주긴 하겠습니다만 본질적으로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이 고통을 언급하면서 다시금 기억을 상기키시게 만들었다는 사실로부터 저를 구원할 방법이 별로 없는 거죠. 업의 업보라고 생각해요.


종종 그럴 때가 있습니다. 별다를 것 없는 촬영에서, 예상치 못한 거대한 재난의 상흔을 만나는 경우. 신기한 능력을 취재하러 갔다가, 그 사람이 겪은 재난의 크기에 놀라는 경우. 저랑은 먼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적 재난이 얼마나 많은 피해자와 유가족을 만들었는지 알게 되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남의 일이 아닌 거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재난의 흔적을 만났다면, 이것을 전달하여 사회를 향해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이 거대한 사회적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라 목소리를 높이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보통은 그렇죠. 그런 공익적 목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제가 취재를 나갔던 프로그램에선 이걸 소화할 방법이 전무했습니다. 애초에 신기한 능력이나 기예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인데, 여기서 고통은 아무리 깊은 것이어도 일종의 소품이나 배경이 되는 수밖에 없었거든요 지금은 없지만 당시엔 동원 방청객도 있어서 감정을 . 조절했는데, 그렇게 조절하면 유치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욕심도 나고, 사람의 사연이 훨씬 더 깊어서 눈물지으며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그게 정말 당사자를 위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능력이 좋았다면 그걸 어떻게든 소화했겠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고, 그냥 그 이야기를 통째로 뺐습니다. 삐걱거리고, 저 사람은 왜 저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었지만 당시엔 그게 제가 소화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지금이라면 조금 더 세련된 방식을 고민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모든 고통을 전달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여전합니다.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카메라에 털어놓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고통을 공개하라는 의미라고 바로 말할 수는 없죠. 그 반대로 공개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어도 때로는 숨겨선 안될 것이라는 판단에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요.


어느 쪽이든 찍고 기록하는 사람의 거리낌의 문제겠습니다만. 저는 아직도 명확하게 이 부분에선 결론을 못 내리겠습니다. 공유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모르는 것이겠습니다만 모든 게 꼭 다 알아야만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카 마리의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기억이란 때때로 나에게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의 신체에 습격해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건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다면 기억의 회귀란 근원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있는 것이 된다. 29쪽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책 한 번 사서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널리스트가 이 기억의 근원적 폭력성을 이길만한 가치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여전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달하지 않는 것이 꼭 좋은 건 아니라는 것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가령 최근 방송되고 있는 다양한 솔루션 프로그램에서 뭔가 보여주지는 않으면서, 전문가나 제작진만 봤다는 식의 자막 화면을 보여주는 경우들이 있을 겁니다. 아동 관련 프로그램이나 부부 관련 프로그램들이 여기 해당되겠죠. 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인가 있었다는 사실은 보여주면서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 방식. 그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마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모습들을 상상하여 그 빈 장면에 대입시킬 것입니다. 물론 직접 그 장면을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여기 빈칸이 있으니 당신의 상상으로 채우는 게 좋겠다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건 오히려 가장 극단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라는 말로 ,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듣고 본 모든 것들은 전달할 수 없지만, 남이 알기 위해선 전달해야 합니다. 저는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가 아니지만, 사건을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고통에 목말라 있고, 그런 목마른 사람들의 시선을 회사는 배고파 합니다. 저널리스트의 사명감이나 윤리는 한 편으로는 고결하고 한 편으로는 현실에 매여 있습니다. 이상론도 현실주의도 완전한 답이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매일 실패하고 있고, 실패할 예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게 어쩌면 제가 속한 부서의 마지막 존재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두서없이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요정도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우리는 다들 비슷하게 방황하고 있고, 언론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다르지 않더라. 물론 지금보다는 더 나아져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떡해야 할까요? 질문으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유튜브 이야기나, 예능과 교양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우리 본업의 목표가 뭔지 헷갈리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는 질의 응답에서 혹시나 궁금하시다면 추가적으로 말씀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뭔가 이것만으로도 복잡할 것 같아서요.


여러분들이 귀한 시간을 낸 것에 대한 값어치를 했는지 조금 두렵습니다만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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