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 싱어, 사고는 없다
저녁을 먹고 호두과자를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앞 사거리에 경찰서에서 만든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무단횡단, 인생의 마지막 발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평소라면 무심히 '그래, 조심히 건너자 좀' 하고 교통법규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탓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마침 어제 제시 싱어의 『사고는 없다』를 읽은 터였다. 덕분에 다른 생각을 했다. 사람이 길을 건너는 것이 '무단'이 되려면, 길이 사람이 아니라 탈것들 우선이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간이 지금껏 길을 내고 만들고 건너온 시간에 비해 자동차로 건넌 시간은 고작 100여 년 정도에 불과한데. 왜 사람은 길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게 당연해진 걸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의 상당수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지거나 변형된 것이다. 길의 주인이 자동차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자동차가 발명된 후에도 얼마동안은 길의 주인은 사람이었다. 자동차가 길 위에서 사람과 부딪히면 성난 군중은 자동차 주인을 둘러싸고 항의했다.(저자의 고향인 미국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전차 사고가 발생하면 흥분한 군중이 차량을 둘러싸고 항의하는 일들이 빈번했다) 자동차를 운전한 사람은 '살인'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차량 살인' 대신 '교통사고'라는 중립적이고, 책임이 모호한 단어를 쓴다. 운전자를 둘러싸고 항의하는 대신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무단횡단자'를 비난한다. 무단횡단이 아닌 경우라면 더욱 간단하다. 사고를 유발하는 경향이 높은 운전자를 비난한다. 제시 싱어는 묻는다. 그렇게 하면 '사고'가 줄어드나?
제시 싱어는 '사고'로 죽는 사람들의 거대한 숫자를 언급하며 책을 시작한다. 연간 20만 명의 사람이 미국에서 '사고'로 사망하는데, 이는 매일 747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하는 수준이다. 1990년대 이래로 사고가 사망 원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높아졌지만, 사고에 대한 연구 자금 지원은 감소했다. 수많은 영역에서 위해 저감을 위한 혁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통사고 사망은 늘고, 추락사고는 여전히 노동자 사망의 주요 원인이며, 약물중독으로 인한 사망도 는다. 모아보면 거대하지만, 사고는 '재난'이라는 이름을 획득할만큼 거대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시선에서 잊힐만큼 개인적인 수준에서 일어난다. 매일 수십명이 수십 번의 사고로 죽는다.
"문제의 본질은 일터에서 사망하는 노동자 대부분이 한꺼번에 100명을 죽이는 대규모 재난이 아니라 사고라고 간단히 치부되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상황으로 사망한다는 사실이었다." (85)
미디어는 '사고'라는 언명을 통해, 누군가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일들을 우연의 결과물로 바꿔버린다. 충분히 예방할 수 있고, 적어도 회복가능한 수준의 상처로 경감시킬 수 있을 방법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미디어는 꽤 책임이 있다. 개별화되고, 우연의 산물로 해소되어버린 '사고'는 그 사고 이면에 놓여 있는 사회적 힘, 권력 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비극은 왠지 '일어날 것 같은' 사람들에게만 일어난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쏠린다. 그것들을 일일히 '사고'로 무미건조하게 풀어 해체하는 것이 미디어의 일이다. (물론 반대로 그러한 경향을 끊임없이 거스르는 미디어 종사자들이 있지만...)
무엇이 '사고'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일로 인해 벌어진 인적-물적 피해의 책임을 모호하게 하는 일이다. 물론 모호하다. 매년 수만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지만, 그 사고에 내가 연루될 가능성은 여전히 모호하다. 그러므로 사고는 나에게서 여전히 '모호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이번에 내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산중턱에 난 좁은 도로에 가드레일이 없다면, 이번엔 잘 통과했다 하더라도 다음 날엔 내 차가 굴러떨어질 수 있다. 그렇게 떨어지고 있는 차 안에서 이것을 예측할 수 없는 '사고'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고는 우리가 만들어 낸 인공적인 환경 안에서 벌어진다. 그 말은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환경을 어떻게 조성하느냐에 따라 그 사고가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사람을 고쳐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한 조건 때문에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에 환경을 고치는 게 더 급선무 아닐까? 인간은 언제나 실수를 한다. 단지 그 실수에도 '불구하고' 생사를 가르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는 만들 수 있다. 물론 그러려면 비용이 들고, 시간이 든다. '이윤'은 누군가가 생사의 기로에 서는 것을 당연한 일로 만든다. 안전에 들이는 비용을 줄이는 건, 그로 인해 누군가의 실수가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환경을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안전에 대한 비용을 확보하는 대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대중 캠페인을 벌이고, 입법 로비를 펼친다. 교통사고의 원인을 차량이 아니라 인적 과실 - 무단횡단자, 미치광이 운전자 - 로 돌리기 위한 캠페인에 막대한 돈을 들였고, 자동차에 속도 제한 장치를 설치하게 만드는 조례안이 부결되도록 입법 로비를 꾸준히 실시했다. 가끔씩 안전 장치를 의무화하는 경우들도 있었지만 예외적으로 이윤 추구와 비용 절감, 그리고 안전이 서로 긍정적으로 결합될 때에만 그랬다. 차량 제조사들 뿐만 아니라, 총기 업체, 건설 업체도 마찬가지였다. 안전교육은 한 편으로는 노동자들을 보호해주는 규칙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노동자들이 조심만 하면 (이 거지같은 환경에서도) 사고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면책조항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하기 위해 노동 강도를 높이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투입하는 인원을 감축하고, 안전장치 설치를 게을리하고, 그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로비를 벌이는 과정에서 실제 일하는 노동자들은 더욱 위험에 노출된다. 동시에 다양한 매체를 통한 안전교육과 사고 사례 전파는 사고가 노동자의 '부주의' 탓이라는 편견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스크린도어 수리에 한 명이 들어가게 만들고, 화력발전소 기계에 끼이게 만드는 것이 정말로 노동자의 '부주의' 탓일까? 그것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로 불린다. 마치 노동자의 부주의, 그것도 아니면 예측불가능한 기계 오류 때문인 것처럼 여겨지도록. 그리하여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는 '비극'으로 여겨지게끔.
한 때 '차량 살인' 지도를 그리던 언론은 이제 무미건조하게 사고를 보도하고, 비극을 중계한다. 무심히 대로변에 서 있는 '오늘의 사고 - 사망 X명, 부상 XX명'을 알리는 전광판 숫자가 바뀌는 정도의 감각으로. 숫자로, 감각이 차단된 건조한 사실로서만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끊임없이 규제를 회피한다. 그리고 그렇게 회피한 곳에서 사고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생명과 신체의 손상이 '사고'라고 불릴 수 있을까? 비닐하우스와 같은 열악한 공간에 몰아넣고, 이동의 자유를 박탈한 채 반강제적으로 노동을 시키는 농장주들의 이야기가 종종 들려올 때,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진 이주노동자의 죽음을 들을 때 나는 반문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고'인가?
우리는 대부분의 사고가 '언젠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안다. 단지 내 차례에 일어날 지 아닐지만 모를 뿐이다. 러시안 룰렛과 뭐가 다를까? 내 차례엔 격발되지 않는다 해도, 그 게임에서 누군가는 결국 총을 맞고 죽는다. 우리는 그 게임을 '사고'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고'라고 부르는 사태의 상당수는 러시안 룰렛에서 방아쇠를 당겨 벌어지는 일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탄창의 숫자가 좀 더 많고, 방아쇠울에 걸린 손가락이 여럿이라는 점이다. 책임이 삭제된 '사고'라는 말은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걸어 놓은 수많은 존재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용이하게 만든다. 그러니 사고라는 말 대신 물어야 한다. 누가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넣었나.
"이스트먼은 《피츠버그 서베이》The Pittsburgh Survey 1장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이런 상실이 낭비인가? 이것은 피츠버그 및 모든 산업 지구가 답해야 할 질문이다. 이것이 단순히 산업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감수해야 할 상실이라면, 우리는 그저 슬퍼하고서 잊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대체로, 혹은 절반이라도, 혹은 부분적으로라도 막을 수 있었던 불필요한 죽음이라면, 젊음과 숙련과 힘이 낭비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에 맞서 싸워야 하고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84)
이러한 '사고 유발자' 비난하기의 최근의 사례는 '노인 운전자'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다. 노령화가 진행되면서 노인 운전자가 증가하고, 그로 인해 노인 운전자들의 사고도 늘고 있다. 인지능력과 반사신경이 떨어지면서 사고에 대비하는 신체적 능력이 점차 감소하고, 인지에 있어서도 약점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재빠르게 대책을 마련해야 할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끔찍한 '사고'를 일으킨 노인들을 비난한다. 페달도 제대로 밟지 못하면서, 반응도 제대로 못하면서 왜 도로로 차를 끌고 나와 위험을 유발했냐고. 그리고 소리 높여 외친다. 노인 운전자들을 운전석에서 끌어내야 한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이동권을 쉽사리 박탈할 수 있는 문제인가? 도시든 시골이든 이 나라는 노인이나 장애인이 이동하기에 편한 환경이 아니다. (노약자의 대중교통 비용 면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면서 그들의 운전에 불만을 가지는 것만큼 모순적인 태도도 없다) 그들도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자유가 있다. 끔찍한 사고를 일으키는 건 노인만도 아니다. 면허를 빼앗고 노인을 집에 반 감금하겠다는 과격한 언사를 할 게 아니라면, 늘어나는 사고를 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술적-제도적 차원에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경향신문의 기자 조문희는〈노인만 잘못하는 운전은 없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적절한 대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웃 나라 일본은 최근 차량 내 안전장치 부착을 의무화한다고 공표했다. 장애물 인근(1~1.5m)에선 액셀을 강하게 밟아도 부딪치지 않도록 시속 8㎞ 미만으로 속도를 억제하는 장치다. 이처럼 연령 구분 없이 오조작 자체에 집중한 방안도 가능하다. 게다가 이번 사고에선 가드레일이 제 기능을 못 한 채 판판이 부서졌다지 않나. 더 튼튼한 안전 방안이 마련돼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노령 운전자 증가는 고령화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택시나 버스처럼 운전을 생업으로 삼는 노인도 많다. 대중교통 환경이 열악한 지방 노인들에게 면허 박탈은 일상을 힘들게 만드는 요인일 수 있다. 20대 운전자의 교통사고 비율은 한때 다른 연령대 대비 무려 2.6배였는데, 그래도 ‘운전 미숙은 면허를 뺏자’는 등 얘긴 나오지 않았다. 운전 능력은 어느 연령대건 검증받아야 하며, 노인이나 장애인 등은 인지 기능 등 의학적 진단까지 함께 받도록 하는 종합 대책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뉴질랜드나 일본이 이렇게 한다. 노인 포함 시각, 인지 약자를 고려해 역주행 방지 등 안내판 글자 크기를 더 키우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이번 사고 분석이 개인 잘못으로 결론이 난대도 이런 종합 접근 필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출처 : 경향신문)
우리는 더 많은 사고를, 다시 한 번 사고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사고를 낸 사람을 비난하는 대신 사고를 유발하는 자본의 압력에 저항하는 것, 저항하는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 대항 권력을 형성하는 것, 그리하여 실수가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전략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나의 동료들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과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묵인하고 과로로 인해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그러게 그렇게 뭣하러 열심히 일하래'하고 힐난하는 대신, 과로할 수 없도록 노조를 세우고 정부를 압박하여 규제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사고는 (언제나) 있다. 인간은 언제나 실수하므로. 동시에 '사고'는 없다. 사고를 유발하는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