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셰보르스키, 민주주의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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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뉴스에 질려 있다. 도덕과 양심, 윤리에 맡겨놓은 법과 제도의 빈틈을 알뜰히 파고들어 '불법은 아니'라며 비웃는 정치 집단을 제재할 수단이 없다는 소식만 들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력하다. 선거는 아직 한참 남았고, 탄핵은 절차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반동의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대변하는 '민의'가 있다. 위법적 절차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선출된 권력의 행동에 정당성이 없다고도 못한다.
그럼에도 의문이 남는다. 민주적 규범과 제도를 활용해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려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얼마만큼 효과적인 제도일까? 선거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동의만 한다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강화하고 차별을 공고화하는 정치 세력들에게도 정당성이 있다는 걸까? 선거를 통해 선출된 세력이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적극적으로 훼손한다고 해도, 가치를 수호하려는 이들은 선거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극우파들이 의회정치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의 공고화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은밀한 붕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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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셰보르스키의 2010년 저작인 《민주주의,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기훈, 이지윤 옮김, 후마니타스, 2024)을 그런 무기력 속에서 마주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달성할 수 있는 것과 달성할 수 없는 것의 경계선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란 간단히 말해 악당을 쫓아낼 기회가 있는 체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선거가 주기적으로 열리고, 서로 경쟁하는 출마자들 가운데 누군가를 뽑아 그들이 공동체를 다스리는 체제다. 민주주의 아래에서 인민은 선거를 통해 다수의 의지를 확인하고, '주기적' 선거를 통해 제대로 의지를 대변하지 못하는 이들을 교체한다.
"인민이 악당[현직자]을 쫓아낼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아마 유일한 답이 될 것이다. 반사실적 가정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지만 '쫓아낼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경쟁적인 선거 ― 인민이 합리적으로 공정한 규칙과 절차에 따라 투표해 결정하면 현직자가 공직에서 퇴출될 가능성이 있는 선거 ― 만이 인민의 정부라는 신화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다."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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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민주주의' 정의에는 '민주주의자'들이 흔히 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이 빠져있다.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인민이 정부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해임할 수 있는 시스템일 뿐이다. 대표성, 책임성, 평등, 참여, 정의, 존엄, 합리성, 안전 같은 가치나 이상을 민주주의에 결부시키지 않는다. 왜?
"오늘날 우리는 대의제 정치체제에서 살고 있다. 이 체제는 18세기 후반, 세계를 뒤흔든 혁명적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이른바 인민이 스스로 통치해야 한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그 사상에 따르면] 평등한 시민이 자신이 따라야 할 법을 스스로 정할 때만 그들은 자유로울 수 있다." (23)
자치(스스로 통치하기), 평등, 자유는 과거 대의제의 창설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자들도 품고 있는 이상이다. 하지만 루소와 칸트가 정교하게 다듬은 '자치'의 이상은 금세 문제에 봉착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그 속에서 살기를 바라는 법질서가 같을 경우에만 자치라는 이상은 논리적으로 일관된다."(43) 스스로 통치한다는 인민은 단수로 제시되지만, 실제 인민은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누가 어떻게 모든 인민을 동시에 대표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사회적 분열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한 이들조차, 파당이나 파벌은 자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몸[공동체]을 허위로 분열시키는, 정치인들의 야심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봤다."(59) 대의제의 창설자들은 이러한 분열들이 불가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인민 일반의 의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누군가는 늘 통치만 하고 누군가는 늘 통치받기만 할 가능성"(77)을 은폐한다. 특히나 19세기 후반 대두한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이라는, 사회를 가로지르는 근본적인 분열선을 드러냈다.
오늘날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어떤 개인이나 단체도 전체 인민의 의지를 대표할 수 없다"(69)는데 동의했다. 하지만 인민 전체의 의지같은 게 없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우연히 수적으로 다수가 된 사람들의 의지를 나머지에게 강요"(70)하는 게 민주주의라는 건가? 선호가 이질적인 대규모 사회에서 인민 스스로가 인민을 다스린다는 자치의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 아닌가? 어떻게 하면 분열된 상태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타인의 지배를 받는다.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귄위는 통치자가 선거에서 표출된 '인민'의 의사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뿐이다."(317)
셰보르스키는 차선의 선택지를 찾는다. "개인의 선호를 가장 잘 반영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이 가능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집단적 의사 결정 체계"(77-78). 이것이 셰보르스키가 이야기하는 최소주의적 민주주의이며, 그가 민주주의를 최소주의적으로 정의하는 이유가 된다. 자치는 민주주의가 가진 힘과 매력의 근원이며, 완벽한 자치가 불가능하다면 차선의 자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의 이름으로 내린 결정이 집단 구성원의 선호를 반영한다면, 그 집단은 스스로 통치한다는 개념이다. (중략) 즉, 일부의 구성원들은 자신은 좋아하지 않더라도 다른 구성원들이 선호하는 법에 따라야 하며, 가능한 최선의 자치는 이 조건하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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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집단적 의사 결정 체계'는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1) 모든 참여자가 집단적 의사 결정에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 (평등) 2) 모든 참여자가 집단적 의사 결정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 (참여) 3) 집단적 의사 결정은 선출된 사람에 의해 시행될 것 (대표) 4) 법적 질서 아래에 부당한 간섭 없이 안전한 협력관계가 이루어질 것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는 바로 이 네 가지 조건들에서 각각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게 셰보르스키의 진단이다.
민주주의는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한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그것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혁명적이었든지 간에, 그 시작은 경제적 불평등에 눈을 감은 기획이었다."(169) 애초에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시장 경제 체계 위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평등'은 경제적 불평등과 양립할 수 있고, 양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은 끊임없이 정치적 평등을 위협한다.
민주주의 아래에서 인민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협소하다. 서로가 닮은 정책들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든 의미가 없다는 비판에 오래 시달리고 있다. 내 선택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효능감이 없다는 주장에는 언제나 힘이 실린다. 몇 가지 오해로 인한 것도 있겠지만, 인민은 끊임없이 민주주의 아래에서 자신이 스스로 '통치'한다는 감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셰보르스키는 집단의 결정이 개인 선호의 분포를 반영하기에 여전히 집단적으로는 유권자가 선거 결과를 결정한다고 본다.)
또한 민주주의는 인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가 전체가 아닌 당파를 위해 행동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또한 법을 통한 자유와 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쉽게 양립하지도 않는다. 이 글에서 책의 모든 내용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지만, 셰보르스키는 각각의 조건들에서 민주주의가 보여주는 한계를 짚으면서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구제하려 시도한다.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다. (늘상 이야기하듯 차악에 가깝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한계인지 아니면 여타 정치 제도의 공통된 한계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제거할 수 있고,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는 데 힘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지만, 지금까지 발명한 약 가운데 어쩌면 가장 효과가 좋은 약인지도 모른다. 좀 더 나은 약효를 내기 위해선, 선거를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정부 행위의 투명성을 증진시키고, 소득 창출의 기회를 평등하게 하고 전반적인 복지를 향상시켜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을 달성하려 노력하고, 법과 공공 정책이 다수결의 통제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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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정권이, 법과 제도를 악용해 민주적인 제도와 규범을 파괴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셰보르스키의 이야기가 얼마나 도움이 될까? 역자의 말마따나 "민주적 가치가 위협받더라도 선거 패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원론적으로 인정하더라도 선거와 선거 사이 기간에 반대를 조직할 수 있는 민주적 규범과 제도의 점진적 붕괴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338)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그가 친절하게 분석한 것처럼 '민주주의'의 한계를 몰라서 생기는 오해일까? 아니면 민주주의의 고유한 한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젠 그 자체에도 불만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의 분별력있는 노고가 정말로 사람들의 선호나 의식을 바꿔낼 수 있을까? 그렇게 구원해 낸 민주주의는 정말로 지킬 가치가 있는 무언가인가? 전쟁을, 폭력을, 파괴를 경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에게 '민주주의'의 억지력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은 가능한가? 가망없는 삶의 전망을 현존하는 시스템을 파괴함으로써 얻는 카타르시스로 대체하려는 분노한 이들에게 그의 말은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오늘날처럼 정치가 양극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외피만 두르고 민주주의를 내파하려는 극단주의자들 앞에서 민주주의자는 무기력하다. 오늘날 인민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편을 선호하는가? 아니면 1933년의 독일을 다시금 바라는가? 그 어떤 정치체보다도 민주주의가 낫다는 저자의 믿음은 어떻게 하면 고립되지 않고 다시금 인민들의 마음에 파고들 수 있는가? 그가 일반 정치체의 한계로부터 민주주의의 한계를 구별해내는 일이 민주주의를 다시금 구원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