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 파슨스, <재앙의 지리학>(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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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한국어로 된 문장을 쓰는 일의 유용함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냉소하지 말고, 지치지 않고 쓰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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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 파슨스의 <재앙의 지리학>을 읽었다. 원제는 <탄소 식민주의Carbon Colonialism>다. 탄소 식민주의란 "기후붕괴를 체계적으로 외주화함으로써 부유한 국가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도록 글로벌 위험을 재설계하는 행위"(77)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인데 저자가 본문에서 '재해 위험의 지리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제목 변경에 대한 출판사/번역자의 의견이 책 안에 전혀 남아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원제를 바꾼다면 왜 그렇게 바꾸는지에 대해선 책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출판사가 지켜야 할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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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정말 믿을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허리케인입니다. 기압이... 죄송해요. 기압이... 10시간 만에 50밀리바가 떨어졌어요. 죄송해요. 음... 정말... 공포스럽습니다." 미국의 방송사 NBC6 사우스 플로리다의 기상캐스터 존 모랄레스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멕시코만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밀턴'의 규모를 설명해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예상보단 적은 피해를 입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말핬다) 평소보다 훨씬 따뜻해진 멕시코만의 해수 온도로 인해 이 허리케인은 세력이 최고등급인 5등급이 되고 말았다. "이건 제가 말할 필요도 없어요. 전 세계적인 온도 상승으로 인한 기후 변화가 만들어낸 거에요." 수십 년간 날씨를 전달해 온 베테랑도 울먹이게 만드는 일은, 더 잦아질 것이다. 기후 위기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우리는 더 많은 끔찍한 날씨들을 맞이해야 한다. (한국에서 이 사건은, 경합주를 훑고 지나간 허리케인이 민주당과 공화당 어느 쪽에 유리할 지를 논하는 방향으로 소비되었다.)
주변에 보이는 모든 기업이 ESG와 지속가능성을 언급하고, 선진국들은 탄소 배출을 절감하기 위한 조치들을 차근차근 실행하고 있고, 우리들 스스로도 1회용품 사용을 자제하고, 친환경 기업에 대한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는 등 할 수 있는 조치들은 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기후 위기는 현재진행형이고 심지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왜?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제대로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윤리적인 행동 때문에 그렇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행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기후 위기를 해소하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전자에 매달린다. 우리는 제대로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과 국가, 지역이 그만큼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있다는 거다. 작은 플라스틱 하나조차 꼼꼼히 나누어 버리고 있다가 미국 여행을 가면 구분 없이 쓰레기통에 모든 것을 밀어넣어 버리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할 것이다. (최근엔 재활용을 강조하는 광고들도 늘고, 쓰레기통에도 매립/소각과 재활용을 구분하는 경우가 늘었다. 정작 사람들이 아무데나 밀어 넣어도 제지가 없는 게 문제지만.) 하지만 한국의 플라스틱 재활용률이 고작 16.4%에 불과하다는 뉴스를 접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로 기후 위기 해소에 제대로 도움이 되는지 의문을 갖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재활용이 되지 않는 쓰레기들은 어디로 갈까? 매립엔 한계가 있다.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환상은 쓰레기를 수출하고 수입하는 과정에 대한 정당화로 이어진다. 우리는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활용 원료를 수출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필리핀에 불법으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출했다가 다시 회수했던 때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비교적 가난한 국가들, 소위 '3세계' 국가들이 쓰레기의 주요 수입국이다. 한 때 세계 최고의 재활용 국가로 선정된 독일은 연간 평균 백만 톤 이상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터키, 그리스, 베트남으로 '수출'한다. 그린피스 영국 사무소의 보고서 'Trashed'에는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쓰레기 식민주의'의 진정한 얼굴들이 담겨 있다. 선진국의 '탄소 배출 감축'엔 쓰레기 떠넘기기가 있고, 대부분의 쓰레기는 한 때 '피식민'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 대부분 담당한다. 이것이 개별 국가의, 혹은 개별 기업의 부도덕이나 비윤리적 태도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하기엔 세계적인 규모의 시스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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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 파슨스의 <탄소 식민주의>는 이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제로, 우리가 구입하는 거의 모든 것은 어느 정도 환경에 대한 착취, 그리고 그 환경에 의존해 생계를 건사하는 민중에 대한 착취와 관련되어 있다."(15) 이 책은 북반구(혹은 1세계)가 환경 오염의 부산물들을, 기존의 식민-피식민 시기에 갖춰 놓은 착취의 경로를 통해, 구 피식민 국가들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자국의 환경을 개선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상품의 생산과 소비, 소멸의 끝단을 따라가며 추적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후위기에 있어서도 그 피해를 경감시킬 수 있는 이들과 아닌 이들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기후위기의 경제적 토대에 대해 논한다. 기후위기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경제적 재난이며 그 피해 역시 차등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 주로 접했던 기후 위기에 대한 책들은 자연 재해의 원인을 '자연적'인 무언가로 이해하는 편이었는데, 이 책은 수탈과 축출을 통한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자연 재해이며, 그것이 아주 오래된 일임을 (자본주의, 식민주의의 역사와 함께 간다) 지적한다는 점이, 뭐랄까 꽤 마르크스주의적이서 눈길이 갔다. "탄소 식민주의는 천연자원을 계속해서 추출하고 수출한 뒤, 해당 자원의 소유자들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유구한 체계[식민주의]의 가장 최근 버전이다."(21)
생산과 소비가 '글로벌'해졌다는 건, 단일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규제와 권한의 공백이 전체 과정에서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제한적이고, 국가의 숫자가 적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국가가 비슷한 규제와 비슷한 집행력을 지니고 있지 않는 한 생산 체계는 빈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한 국가 안에서 행동하는 개인들의 윤리적인 소비가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가지게 되는 이유다. 국경 안에 있는 공장들에 비윤리적인 노동 환경에서 추출된 자원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들, 그 공장에 납품하는 업체가 거짓말을 하고 다른 법인을 차려 우회하면 걸러낼 뾰족한 수가 없다. 국가 입장에서도 다른 국가로 자본이 도피할 것이라는 공포로 인해 - 개발도상국일수록 의존도가 높아 그 공포를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 강력한 규제를 집행하지 못하거나, 유착된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산시설을 개선하면, 생산비용이 올라 궁극적으로 글로벌 자본이 떠날 것이다. 심지어 1세계 안에서도 감히 더 비싼 옷을 사겠다고 선언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은 이 시스템 아래에서 희소하고, 불평등한 자원이 된다. "오늘날의 글로벌 공급망은 탄소 배출을 통해 전 지구적인 환경 위협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이런 위험을 다루는 데 필요한 자원을 빨아들인다."(37)
이 책의 장점은 거시적인 시선을 뒷받침할 현장 조사가 튼튼하다는 점이다. 글로벌 경제가 만들어 낸 환경 오염물질을 다룰 제3세계의 노동자들을 '생산'해내기 위해서, 캄보디아 농촌 마을의 농부들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토지로부터 축출되어 쓰레기를 다루는 임노동자가 되었는지를 다루는 현장 조사 부분은 특히 탁월하다. 원래의 생산수단들을 농민으로부터 빼앗고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새로운 생산수단을 구비하기 위해 금융자본과 지주에 종속되는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탄광, 광산, 가마 등 유독하고 위험하며 치명적인 노동 환경에 놓여 있는 이들을 수급하는 것이 '첨단 산업'의 '고부가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선 필수적인데 착취의 순환구조를 완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클로저'는 피식민 국가의 말단 지역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케이트 크로퍼드의 <AI 지도책>에서도 첨단 산업의 토대를 지탱하는 현장들에 대한 조사가 탁월하게 제시되어 있다.) "민중과 환경에 대한 학대는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50) 특히 빈번해지는 기후 위기는 농촌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그 때마다 농촌 가구를 지원해야 하는 도시 노동자들 (자녀들 중 일부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도시로 떠난다)은 생계 유지를 위한 압박감에 시달리며 위험한 노동에 매달린다. 기후 변화는 농민을 노동자로 변모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공장주의 입장에서 기후 위기란 유휴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고마운'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캄보디아와 같은 개발도상국의 경우 이런 공장들의 '생산성' (저임금과 위험한 노동 환경을 기반으로 한)을 쉽게 저해할 수 없다. 그것들을 '개선'하는 순간,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개발도상국으로 자본이 유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지적인 차원에서 이 모든 '순환'을 정지시키는 선택이란 가능할까?
선진국 국민들의 '소비자 행동'이 궁극적으로는 한계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지어 우리는 제대로 된 소비자 행동조차 하기 어렵다. 모든 기업이 '친환경'과 '그린'을 내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진짜 친환경인지 확인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냉소적으로 소비자 행동을 바라보려는 건 아니지만, 이 길고 복잡하고 불투명한 공급망을 일국적 차원의 도덕적 소비를 통해 개선하려는 시도를 칭찬하며 장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소비자의 힘이 글로벌 경제를 더욱 윤리적이거나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93) 글로벌 기업은 실제와 무관하게 '친환경' 이미지를 내세우는 데 집중할 수 있고 그 홍보는 성공적이다. 이 책에선 더 깊게 이야기하진 않지만, 민주주의 정치 아래에서 '성장'이 아닌 선택지를 과감하게 내세우면서 장기적으로 집권 상태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보수든 진보든 성장 일변도의 정책을 선택하게끔 강제되는 상황 자체가 선진국 (대부분은 민주주의 국가다)이 처한 교착 상태라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기후변화가 '오래된' 이야기라는 점을 지적한다는 거다. "그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전에 닥쳤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더 큰 폭풍이 점점 더 많이 발생하고, 더 심한 홍수가 더 빈번해지며, 더 깊은 가뭄이 더 오래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도의 문제이지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181) 그 정도가 심해지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1세계 안에서 늘어났기 때문에 문제가 '가시화'된 것이지, 사실 오래 전부터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 3세계에서 기후 변화와 그로 인한 파괴적 결과는 누적되고 있었다. 갑자기 기후 위기가 문제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 자체가, 어쩌면 스스로 그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 눈을 감고 있었거나 문제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대해 무지했음을 드러내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문제는 결국 시스템 자체의 종식을 요구하는 방향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일국적 차원의 정치 참여뿐만 아니라, 국제적 차원의 거버넌스를 형성하도록 압박하는 것, 탄소 배출량의 기준을 생산지역별이 아닌 소비지역별로 변경하기를 요청할 것, 그리하여 '가시화'되지 않는 문제들을 전면에 노출시키기를 요청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유일한 길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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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기 전에 최근에 본 경향신문의 훌륭한 기획 기사 <쓰레기 오비추어리>를 인용하기로 한다. 마치 이 책의 '한국'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몰입해 읽었다. (실제로 이 책에선 한국이 꽤 자주 언급된다. 세계 5위의 벽돌 수입국인데, 우리는 정작 우리 집을 짓는 그 벽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파키스탄의 벽돌 노동자들이 어떤 질병과 위협에 시달리는지 알지 못한 채 따뜻한 집에서 기후 위기를 걱정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언급하는 '1세계'에 이미 가깝다. 세계 5위의 벽돌 수입국이며, 세계 4위의 중고 의류 수출국이다. 우리는 쓰레기를 수출하고, 벽돌에 새겨진 탄소 발자국을 은폐한다. 복잡하게 얽힌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의 일부로, 기후 위기를 촉발하는 환경 파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 국가의 국민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무엇을 정치에 요구해야 하는 걸까? TV에서 '기후 위기'를 다루는 모든 다큐멘터리들이 끝내 '정치'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윤리적 소비'에 머무르는 것들을 본다. 정말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우리는 '반자본주의'와 '반식민주의'를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인가.
"라벨에 담긴 간단한 정보는 옷의 시작과 끝을 보여줄 수 없고, 이는 옷들이 지구를 돌며 만들어낸 탄소발자국과 저임금 노동의 문제를 가린다. 이 상황에서 '윤리적 소비'는 가능하지 않다." (나이지리아로 간 '7번' 유니폼, 옷의 죽음을 따라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