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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Oct 21. 2024

방향 없는 분노

앤절라 네이글, 『인싸를 죽여라』

날이 좋았다. 카페에 앉아 개구리가 그려진 표지가 인상적인 앤절라 네이글의 『인싸를 죽여라』(김내훈 옮김, 오월의 봄)를 읽었다. 원서 『Kill All Normies』는 2017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서는 2022년에 나왔다. 이제야 읽었으니 시차가 7년이다. 원서와 번역서가 출간되던 때의 정세와 지금의 정세는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얼마나 나아졌고 얼마나 힘들어졌는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시차적 읽기'가 되어버렸다. 


감상부터 말하자면, 일단 피곤하다. 한 줄 한 줄 읽어나가기가 버겁다. 번역이 잘 되어 있는 것이 더 괴로울 때가 있다. 안 좋은 의미가 생생하게 다가오는 문장들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건 고역이다. 그 다음으로는 기시감이 든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20년 넘게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전전하며 보았던 다양한 혐오와 자기비하, 냉소가 바다 건너 사례들에서도 느껴졌다. 이런 것도 공간을 넘어서 공명하는 걸 보면, 역시 인터넷인가? 마지막으로, 답답해진다. 이제 대안 우파의 목소리는 인터넷 공간에서 '상수'가 되었다. '일베'는 해산되었지만 '일베의 감각'은 모든 커뮤니티에 흩뿌려진 것처럼. 인터넷 문화전쟁에서 지금까지는, 대안 우파의 승리를 막을 방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좌파가 자랑하던 '무기'들은 모두 대안 우파의 손에 넘어갔다. 상황이 반전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문화 전쟁의 양상과 그 결과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추적하기에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로라 베이츠의 『인셀 테러』와 마크 피셔의 『뱀파이어 성에서 탈출하기』를 함께 두고 읽으면 조금 더 풍부하게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라 베이츠의 책은 온라인 극우들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는 데 용이하게 만든 마음의 기저엔 깊은 여성 혐오가 있다는 주장에 다양한 근거들을 보충하기에 좋고, 마크 피셔의 글은 안젤라 네이글이 '문화적 좌파' ('경제적 좌파'와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지리멸렬함을 비판하는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다. 이 글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입지를 이해하기에 용이하고 주장을 해석하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딱 잘라 '문화적 좌파'와 '경제적 좌파'가 나뉘진 않을 것이지만...)


저자는 묻는다. 대체 2010년대를 전후로 해서 인터넷 공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인터넷은 처음부터 '진보'의 공간처럼 여겨졌다. 탈권위와 전복의 공간, 그리하여 자유와 평등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라는 '환상'은 인터넷을 떠받치는 기초적 허구가 아닌가? 인터넷 사용자 대다수가 여전히 오프라인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던 때, 인터넷의 익명성은 현실 세계의 차별을 잊게 만드는 투명 망토였던 때, 새로운 세계의 시민들이라며 서로를 네티즌이라고 부르던 때,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 때엔 환상이 비교적 잘 작동했다.


때로는 그런 환상이 실제 세계의 변화와 맞물리는 경우도 있었다. 2009년 뉴욕의 작은 공원에서 시작된 반(反) 월가 시위는 트위터 해시태그 유행에 힘입어 그 세를 불렸다. 리더도 없고 조직도 없지만,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에 대항하는 시민들이 모이자는 움직임은 온라인에서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었다. 리트윗은 리트윗을 타고 퍼졌고, 점거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한 스페인 사람은 온라인으로 시위 정보를 접하고 곧바로 뉴욕으로 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2010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 운동 역시 SNS가 봉기의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식의 분석이 한 때 유행했다. 튀니지의 한 노점상 부아지지의 분신 자살은 장기 집권 중이던 벤 알리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내는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고, 혁명의 불길은 주변 국가의 독재 정권으로 번졌다. 국가 통제가 느슨한 SNS가 혁명의 불씨를 계속 퍼트리는 통로였다는 거다. (물론 대부분은 그 이후에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까진 궁금해하진 않았지만)


"논자들은 2010년대 초 인터넷을 중심으로 일어난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지닌 초당파성을 상찬했지만, 리더 없는 수평적 인터넷 중심 정치학의 정치적 무근본성은 더 이상 무턱대고 찬양할 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33)


탈 권위적, 탈 중앙적인 온라인 공간의 특징은 저항의 수단으로서 각광받았다. 억압된 자들의 분노를 실어나를 수 있고, 통제로부터 벗어나 은밀하게 세를 불릴 수도 있다. 파시스트들에 맞선 파르티잔들의 공간이 인터넷이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이 깨지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6년 미국 대선의 승자는 트럼프였다. 인종차별, 여성혐오의 언어를 거리낌없이 내뱉고 극단적인 정치 성향으로 인해 제도 정치의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가 권력의 핵심에 다가간 것이다. 2008년 오바마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활용한 마케팅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지 8년만에, 온라인은 극우파들의 거리낌없는 언사로 점철되고 조롱과 냉소가 가득한 밈들로 넘쳐났다. 트럼프가 끝내주는(!) 트위터 유저였던 것도 한 몫 했겠지만, 더 이상 온라인이 진보의 아성이 아니라 걸 '좌파 리버럴'(나는 이 표현이 그리 마음에 들진 않는다)이 너무 뒤늦게 깨달은 탓도 있을 것이다. 


안젤나 네이글은 이 문화전쟁의 경과를 간략하게 정리한다. 처음에는 온라인 유머게시판와 정치게시판에서 자신들끼리 낄낄대며 웃을 수 있는 자기비하적인 유머 코드를 버무린 '밈'을 가지고 놀았던 이들이, 게이머게이트와 같은 사건들을 계기로 자신들의 여성 혐오와 사회 부적응을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들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던 수단들을 활용해 온라인 공간에서 진지전을 펼친 결과가 지금이라는 거다. 대안 우파 이데올로그들은 1968년 이후 좌파의 문화적 우세에 저항하기 위해 반문화와 저항이라는 수단을 자신들의 선전을 위한 도구로 빌려왔고, 좌파는 이러한 무기고 습격에 갈팡질팡하다 무기력해졌다는 게 저자의 현실 진단이다.


"온라인 우파의 전술은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되어 있다. 디지털 시대와 그람시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도권 정치가 아니라 미디어와 문화를 통해 담론의 창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데 목적을 둔 운동으로 거둔 전략적 성취를 묘사하는 데 그람시적이라는 말보다 적합한 말은 없어 보인다." (86)


유머는 그 코드를 이해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급격하게 좁힌다. 자신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맥락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동지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 밈은 유머스러움과 단순한 사상이 결합되어 있다. 단순한만큼 밈에 의존하기 쉽고, 유머는 그러한 밈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당의정의 역할을 한다. 저자는 밈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대안 우파들을 보고 '우파 그람시주의자들'이라 지칭한다. 가장 대중적인 방식으로, 일상적인 수준에서 끊임없는 선전전을 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 표현을 사용하기가 저어된다. 그들이 '~주의자'라고 할만큼 일관된 의지와 주장의 체계를 갖추고 있진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 높이 올려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처지를 비하하면서, 자신들을 낮은 위치에 놓이게 만든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반복한다. 가부장제의 해체와 연애 자유화가 불러온 연애시장의 비대칭은 비자발적 독신을 강제당한 이들의 좌절을 불러일으키고, 그 좌절은 여성을 독점하는 알파메일과 알파메일에 자신의 '순결'(?)을 바치는 여성들, 그리고 그런 여성들 가운데 경쟁에서 탈락했으나 자신의 '문란함'을 '설거지'하려는 이들을 수발하는 남자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안젤라 네이글은 대안 우파의 분노의 기저에 놓인 인셀의 성적 좌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것이 자신들을 주인으로 하는 권력 체계의 재정립을 급진적으로 요청하는 밑바닥의 욕망이라고. 세계는 페미니즘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그러니까 좌파 때문에 (혹은 좌파와 결탁해 기생하는 보수파들 때문에) 망해간다는 세계관 안에서, 그들은 나름의 '성전'을 펼치는 중인 셈이다.


이에 대한 진지한 비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들이 주요한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 '진지함에 대한 냉소'를 기반으로 하는 밈이기 때문이다. 진지하지만 정확한 비판은 '나는 그냥 웃기려고 했을 뿐이야'라는 자기 비하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태를 그대로 모방해 되돌려주는 '미러링'은 그 끝이 좋지 않다. 우리는 이미 조롱이 끝내 그 형식만 남아 무차별적인 사이버 불링과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지점까지 쉽게 미끄러진다는 사실을 안다.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러한 유형의 좌파로 대표되는 유해하고 고당혹스러운 온라인 정치는 좌파를 새로운 시대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226)


대안 우파가 연합 전선 아래에서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듯이, 리버럴 사이에도 소위 '도덕자본' 경쟁이 벌어진다. 누가 더 순수한가, 누가 더 가난한가, 누가 더 극단적인가를 묻고 따지는 과정에서 한 때의 '동지들'에 대한 모욕이 스스럼없이 자행된다. 밈을 통한 조롱은 우파 만큼이나 좌파에게도 유구한 전통이다. 특히나 교차하는 정체성들을 외면하고 더욱 순수해지려는 욕망에 굴복하여 작은 단위로 갈라지려는 이들은 더욱 극단적 언어를 통해 자신들이 도덕자본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소리 높여 외친다. 안젤라 네이글이 이 책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건 대안 우파들의 모욕적인 언행보다는, 그들에게 무기를 안겨주고 전선을 와해시키는 한때의 '동료들'인 것 같다. (물론 정말로 서로가 '동료'였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좌익 트위터는 종종 비참하고 낙심한 지역일 수 있다. 올해 초 트위터에서는 몇 가지 이슈가 큰 화제였는데, 좌파로 인식되는 사람들 몇몇이 '호명'되고 비난받은 것이다. 이 사람들 말이 때론 반대할만한 것이긴 했지만 그들이 한 개인으로서 쫓기듯 비난받은 방식은 그곳에 끔찍한 잔여물을 남겼다." - 마크 피셔, 『뱀파이어 성에서 탈출하기 (이여로 번역)』


좌파가 한때 성공적이었던 1968년의 전략들에 대한 성찰을 방기하고, 분노와 저항의 목표를 상실한 후 문화전쟁에서 패배한 우파는 적의 전략을 재활용했다. 그 사이 좌파는 '리더 없는 수평적 인터넷 중심 정치학'에 대한 상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빈 공백을 활용한 대안 우파가 오늘날 정치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치는 현실을 마주했다. 안젤라 네이글은 오늘날의 사태에 대한 책임이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을 '악세사리'처럼 추구하는 '리버럴 좌파'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하지만,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을 진정성 있게 추구하는 이들과 '악세사리'로 추구하는 이들 사이의 구분은 누가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주장 자체가 대안 우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면, 이 주장은 어떻게 섬세하게 제기될 수 있는 것일까?


"남초 커뮤니티와 대안우파의 교류과 활발해진 지금 상황에서 어떤 커뮤니티든 저러한 사고방식에 노출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확실한 것은 위계질서의 피라미드에서 낮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그들의 분노가 종종 매우 극단적인 방식으로 폭발한다는 것이다."(190)


1~2%의 표 차이만으로도 당락이 결정되는 양당제인 미국,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진보-보수의 단일 대결로 귀결되는 대한민국에서 대안 우파의 정치 공간 진입은 이제 상수가 되어버렸다. 트럼프는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고, 대안 우파에 힘입은 정치 세력이 국회의원이 되었다. 문화 전쟁에서 거점을 확보한 대안 우파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끊임없이 생산될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의견'이 되어버린 극우의 주장들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 목적 없는 분노들을 고정시킬 지향점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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