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루페미 O. 타이워, 『엘리트 포획』
올루페미 O. 타이워의 『엘리트 포획』을 읽었다.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전통을 잇는 경찰의 폭력들을 일별하며 책이 시작된다. 케냐에서, 콜롬비아에서, 브라질에서, 미국에서 그리고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진 경찰의 폭력이 빚어낸 비극은 거대한 저항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인종과 상관없이, 차별과 혐오 그리고 폭력에 대한 항의에 연대하는 움직임은 국제적인 규모였다. "나라마다 맥락은 다르지만,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시달려 온 경찰의 테러와 폭력에 맞서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세계적인 무엇인가가 위태로워졌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17) 인종주의와 치안유지가 전 지구적인 수준의 동학이며 이것에 대한 전면적 저항이 표면화될 때, 사회 기득권으로서 지배 엘리트들은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기 전에 사태를 어떻게든 진압해야 했다.
변화하되, 변화하지 않는다
지배 엘리트들의 전략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실제로는 개혁을 시행하지 않으면서 정체성 정치를 상징적으로 활용해 시위의 예봉을 꺾는 것, 다른 하나는 정체성 정치의 몇몇 요소들을 활용해 기존 제도를 재포장하고 그대로 구질서를 유지하는 것. 실제로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심지어 저항에 대한 불만섞인 목소리들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터져나왔다. 노골적으로 흐름을 거부하는 우파들뿐만 아니라, 좌파에게서도 같은 편의 내분을 유도한다는 비난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정체성 정치가 결국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를 더 작은 단위로 분열시키면서 현재의 계급 지배를 유지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아니냐는 것이다.
저자가 개입하는 지점은 이곳이다. 정체성 정치에 덧씌워진 혐의들 중 상당수 - 특히 위에서 언급한 지배와 분열의 수단이라는 식의 '경제적 좌파'의 기소장 문장처럼 - 는 정체성 정치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엘리트 포획'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분명 정체성 정치를 최초의 기획과 다르게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렸던 이들을 정치의 전면으로 다시 내세우는 마중물이자, 서로 다른 존재들이 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바닥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로서 등장한 '정체성 정치'를 "협소하게 이해된 집단이익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25)고자 활용하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체성 정치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엘리트 포획
"분파적이지 않은 변혁적 연합 정치를 가로막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엘리트 포획"이지, 정체성 정치가 아니다."(26) 그렇다면 엘리트 포획이란 뭘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좋은 지위에 있고 자원이 많은 이들에 의해 정치 프로젝트가 하이재킹되는 방식"(27)이며 "사회적 우위에 있는 소수가 다수에 도움이 되는 자원과 제도를 자신의 협소한 이해관계와 목표에 따라 이용할 때 나타난다."(49)
이는 비단 정체성 정치의 장 안에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경제적 좌파'의 내부에서도 발생하는 문제다. 그리고 그것이 '경제적 좌파'의 본질적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애초에 이 문제는 한 개인이 의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게 아닌 "체계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행태"(28)다. 엘리트 포획이라는 현상은 완전하게 종식하긴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이고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면 다르게 세상을 만들어 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 미디어학자 다니엘 할린은 1986년 자신의 저서 『The Uncensored War』(1986)에서 베트남 전쟁 보도를 바탕으로 저널리즘이 특정한 관점이나 논쟁을 다루면서 참조하는 세 영역을 설명한 적이 있다. 기정사실로 공유되는 가치가 자리하는 합의(Consensus),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찬반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자리하는 합법적 논쟁(Legitimate Controversy), 마지막으로 객관적 저널리즘으로 포함하기 어려운 내용과 주제가 '버려지는' 일탈(Deviance)의 영역이다. 문제는 각각의 영역이 분절되는 지점의 자의성이 해결이 안된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바로 이 구분이 정치인들이 구체적 사안들을 갈등으로 다룰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적어도 미디어 내 논쟁의 장에서 엘리트는 결국 기자들이고 그들은 논쟁의 장이 자신들의 규칙에 따르길 바란다. 어쩌면 여기서도 엘리트 포획의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저자는 프랭클린 프레이저와 프란츠 파농을 경유하면서, 어째서 흑인 엘리트 계층이 흑인을 위해 사회 구조를 개혁하기는 커녕, 현존하는 질서를 강화하고 자신들의 지위 상승과 흑인 계층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력 강화만을 꾀하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흑인들의 경제적 피폐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종차별과 불평등을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하는 대신, 부유한 상인이 되자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하는 동시에 진짜 문제인 구질서가 마치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대안'처럼 부상한다. 저자는 이러한 엘리트 포획이 우리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점차 우세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엘리트
포획하려는 '엘리트'들은 누구일까? 저자는 특정한 속성 대신 관계로서 엘리트를 설명한다. "엘리트란 소수 집단과 다수 집단 사이의 관계, 그것도 특수한 맥락에서 생기는 관계를 말한다."(49) 엘리트의 '본질적' 속성은 없다. 혈통, 카스트, 경제적 부, 지능, 젠더 등 다양한 속성들은 시대에 따라 엘리트의 속성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변별력이 없어 버려지는 속성이 되기도 했다. (어느 정도 그래도 공통점은 있겠지만서도) 다만 중요한 건 엘리트와 비엘리트는 권력에 대한 접근성이 차이가 있고, 돈, 지식, 주목, 가치 등은 그에 따라 매우 불공정하게 분배된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시간에 이 불공정한 분배가 자리했다.
지금 여기 엘리트 포획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서 특별할 건 없다. 오히려 저자가 보기에 특별한 건 자유주의자들의 기묘한 믿음이다. 그들은 민주주의 아래에서 엘리트와 비엘리트의 상호 견제와 순환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고 믿으며, 현실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상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민주적 책임성이라는 것은 꾸준히 악화되고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공백이 많다고 저자는 말한다. "민주적 책임성이라는 이상을 희망으로 삼았다면, 실제로 우리가 우리 삶을 스스로 통제하겠다는 이런 낮은 기준조차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따져봐야 한다."(52)
엘리트 포획은 일국가적 차원에서도 드러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원의 취득과 축적 방식에 대한 규제를 회피하는 과정을 통해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건 국제적 차원에서다. 민주적 책임성을 지울 시도조차 하지 않는 '국제기구'들이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들에 결정을 내리고, 주권이 그 앞에서 무력해지는 경험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겪었던 바로 그 사건들처럼. 그들은 세계질서를 재구성할 힘이 있지만, 그들을 제어할 힘은 없다. 저자는 볼프강 슈트렉을 인용하며 민주주의의 종말이 결국 엘리트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포획으로 인해 일어날 것임을 주장한다. "위기가 잇따라 발생하고 국가의 재정 위기가 나란히 전개되자, 분배 갈등의 장이 위쪽으로 이동하면서 시민들이 벌이는 집단행동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이해관계가 테크노크라트 전문가들의 추상적 전문용어에서 '문제'로 등장하는, 동떨어진 결정 장소로 옮겨 간 것이다."(61, 『조종이 울린다』재인용)
엘리트 포획이라는 개념을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올루페미 타이워는 이 개념을 정체성 정치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정체성 정치를 구해내는 방법으로서 사용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다만 '독특하다'고 확언할 수는 없는데, 내가 이 분야에 과문하기에 실제로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없었는지를 확실하게 검토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접했던 책들 가운데 가장 논의의 결이 독특하긴 했다.
냉소적 주체
후반부 방 독해하기의 첫 부분은 여러모로 복잡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문장들은 슬라보예 지젝의 냉소주의적 주체에 대한 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왜 마을 사람들이 임금을 믿는지가 아니라 임금을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다른 대답을 얻게 된다. 달리 말하면,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념이 아니라 행동이야말로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85)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냉소주의적 주체를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하는 자들'로 정의내린다. 보통 이데올로기라면 허위의식이라 생각하고, 진실을 알려주면 다르게 행동할 거라 믿는다. (빨간 약?) 하지만 책에서도 인용하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를 떠올려보면, 주민들의 속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다 벗고 있는 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고, 아예 신경쓰지 않고 행차가 지나가면 뭘 먹을지 고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들은 고개를 조아리고 연도에 나와 왕의 행차를 제지하지 않음으로써 상황을 완성한다. 거칠게 표현하면 '엘리트 포획'이란 결국 엘리트가 설정한 행동규칙에 (속마음이 어떻든) 따르게 되는 것이다. 포획을 시도하는 계급과 포획당하는 계급은 일종의 '공통 기반'을 형성하고,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것이 일종의 합의의 결과물이라면, 뒤바뀔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쉬운 일은 아니다. 엘리트들은 자신이 가진 자원과 권력을 모두 활용해 공동체의 행동과 목표를 사로잡는다.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 설정하는 '게임의 룰'을 다룰 수 있는 힘과 권위가 있다. 게이머가 게임 디자이너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듯이, 비엘리트들은 (어느 순간) 정해진 게임의 룰을 벗어나는 위험을 감당하기 어렵다. "권력 구조는 가상 환경처럼 사람들이 따라 해야 할 이유를 제공"(96)해주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에 가시 울타리를 친다. 저자는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언급된 '가치 포획', 추구하는 가치의 단순화 과정이 엘리트 포획의 과정과 유사함을 지적한다. "현실에서 엘리트들은 경우에 따라 가치 포획 과정을 의도적으로 관리하면서 게임 디자인과 같은 전술을 활용하여 다른 이들을 조작하고 통제한다."(97) 우리는 별점이 우리의 가치 평가 체계를 얼마나 왜곡시켰고, 우리의 선택지를 얼마나 단순하게 만들었는지 안다. 배민을 통해서. 몇 가지 단순한 구간으로 나뉜 별점이 우리 의사 표현 수단의 전부가 되었다. 노동자들 역시 이러한 평가 체계에 자신을 순응시킨다. 좋아요를 받기 위해, 별점 만점을 받기 위해,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비엘리트 계층은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을 행하며 엘리트가 결정한 룰을 따른다.
이것은 엘리트 개개인의 악의로 만들어진 시스템은 아니다. 누군가 실제로 개입하는 엘리트들도 있겠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디자이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작과 끝을 모르는 역사의 한 가운데에 던져져, 누군가 먼저 내렸던 결정의 퇴적물 위에서 새로운 결정을 해 나갈 뿐이다. 엘리트는 유리한 환경에서 시작해 더욱 유리하게끔 규칙들을 재설정하며 사회를 포섭해 나가고, 우리는 그 규칙에 따라간다. 이것을 뒤집을 방법이 있나? 저자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묘한 '의지주의'적 태도를 내비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와 관련된 규칙이 우리가 행동할 때 실제 결정하는 선택과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114)고 말하면서. 물론 혁명가들은 그런 삶을 살았다. 몇 변의 투옥과 망명을 거치고 조국의 독립을 이끌어 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사회적 각본'을 따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저자가 릴리카 볼 같은 혁명가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엘리트 포획이 일거에 일어난 게 아닌 것처럼, 저항도 단번에는 불가능하다. 사회적 무기력을 학습하라는 게 아니라, "사회가 우리에게 컨트롤러를 넘겨주기까지 이미 얼마나 많은 게임을 플레이했는지를 밝혀내"(123-4)려는 것이다. 저항은 틈새에 있다. 우리에겐 주어진 규칙이 있지만, 그 규칙을 꼭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이 방에서 우리의 발언으로 인해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까지 통제할 수는 없지만, 발언을 할 수는 있다."(124-125) (이것은 마치, 벤야민?)
존중 정치?
다만 이러한 전복의 기회들은 대부분 무력화된다. 저자는 '존중 정치'가 그 장애물 중 하나라고 본다. 존중 정치란 가장 피해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자거나, 가장 주변화된 이들을 중심에 놓자는 요청이며, (저자가 보기에는) 입장 인식론이라는 이론적 지향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정리한 입장인식론은 지식은 사회적으로 위치지어진 것이며, 사회적으로 배제된 삶으로부터 사고하는 것이며, 연구 프로그램과 사회 활동이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통상적으로 드러나는 건 '주변화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자'거나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자'는 목소리로서다.
문제는 주변은 누구고, 당사자는 전부 옳으냐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경험한 "가장 주변화된 이들을 중심에 놓는 것"이란 대개 이 방 안에 있는, 겉보기에 어떤 억압과 연관된 사회적 범주에 부합하는 사람들에게 대화의 권위와 주목을 넘겨주는 것을 의미했다."(127) 엘리트의 '주변'이지, 실제 '소외된' 자들과는 무관할 수 있고, 그 주변의 이익이란 특수이익이지 소외된 사람들의 일반 이익이 아닐 수 있다. 존중 정치는 정당한 요청이었지만, 누구를 왜 존중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 한, 현재의 질서를 인정하고 강화시키는 데 복무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의아한 부분인데, 입장인식론이 반드시 '당사자'의 목소리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진 않는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허수아비 때리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의 입장을 숙고할 만 하다고 평가를 내려주는 과정에서, 나는 인정과 권위를 얻는다. "다른 사람에게 주목이나 공간을 건네기 위한 가시적인 존중 행위는 그 약속대로 단기적으로 주목을 재분배하곤 한다. 하지만 존중 정치는 여전히 본질적인 권력관계를 숨길 수 있다."(134) 마이크를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것도 일종의 긍휼이자 자비다. 어쩌면 이것은 실제로 주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세상 너머를 '잊어야만' 존중 정치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적 정치
저자가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구성적' 정치는 살짝 힘이 빠진다. 의식화와 실천이라는 오래된 단어들을 다시 길어올리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지주의의 낭만에 빠지진 않는다. 여전히 행동을 제약하는 물리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잊지 않는다. 다만 물리력은 행사에 제약이 많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득권 엘리트는 강제 대신 권유와 교육을 통해 기존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할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식화'와 '실천'의 빈틈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모든 세계의 구조물과 사회적 관리가 우리를 제약하는 데 실패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우리와 같은 피조물들은 특별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프로그래밍이 존재할지라도, 우리는 그냥 할 수 있다.“(178-179)
어떻게 우리를 분열시키는 장애물에 맞서고, 어떻게 새로운 더 큰 '방'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해방'이라는 목표는 조금 두루뭉술하다. 무엇이 서로 다른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맞대고 함께 맞설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언급은 찾기 어렵다. 책의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민주적 책임성의 압력이 약화되는 곳에서 엘리트 포획이 발생하고, 당사자성 기반 운동의 특정한 내부 문화이자 규범으로서 '존중 정치'가 엘리트 포획에 더욱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은 신선했다. 다만 정체성 정치를 엘리트 포획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를 구원해려는 시도는 성공적인지는 의심스럽다. 정체성 정치가 '포획'에 '특별히' 더 취약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한 사례로서 등장할 뿐인지를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론부가 약하다는 건 함께 읽는 사람들이 채워나갈 몫일 수 있겠다. 여러 의문이 남지만, 깊이 생각해볼 부분들이 많았다. 읽기 전과 후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독서의 몇 안 되는 장점이지 않나 싶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