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마사히코, 『망고와 수류탄: 생활사이론』
"우리들은 역사와 구조에 의해 우리 인생 대부분을 규정당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혼자가 아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그런 역사와 구조 속에서 각자의 고유한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14)
몇 주에 걸쳐 기시 마사히코의 『망고와 수류탄: 생활사이론』(이하 『망고와 수류탄』)을 읽었다. 저자는 겸손하게 "각주와 참고문헌도 극히 적으며, 어딘가 부족하고 단편적인, 논문인지 에세이인지 알 수 없는 문장으로 가득 차 버렸"(15)다고 이야기했지만, 읽으면서 머리를 세게 얻어맞는 기분에 연신 시달렸다. 그는 사회학자고 사회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시사교양PD로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고민했던 지점들과 상당히 많이 겹쳐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일찍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PD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활사를 조사하는 사회학자든 시사교양 PD든 본질적으론 같은 일이지 않는가 싶고, 그래서 이 책을 집어든 것이겠지만. 몇 번의 품절로 인해 최근에서야 구할 수 있었다는 변명을 해본다.
여러 곳에 제출한 에세이 가운데 생활사 조사 방법에 대한 내용들만 추려 묶은 책인데, 읽다보니 피터 버거의 고전인 『사회학으로의 초대: 인간주의적 시각』의 첫 문장을 떠올리게 했다. "이 책은 연구용으로 쓰인 게 아니라, 그저 읽히기 위해 쓰였다. 이 책은 교과서도 아니고 이론적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도 아니다. 내가 진정 흥미를 느끼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어떤 지적 세계로의 초대이다."(피터 버거, 7)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니라고 손사래치고 있지만, 사람들을 문장 앞으로 끌어당기는 매력이 넘친다는 게 두 책의 공통점이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제대로 읽으려면 머리에 쥐가 나는 느낌이라는 것도 똑같고. (사회학 전공을 하겠다고 덤벼들지 않은 과거의 나를 이럴 때 칭찬한다)
사회학자로서 그가 조사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은 '별난 자'들이다. 좋은 쪽으로가 아니라, 나쁜 쪽으로.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간 사람들, 지역들이 그의 조사 대상이다. 부락민들, 성소수자, 노숙인, 이민자, 조직폭력배의 일화를 담은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김경원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6)는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지만 제대로 가시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손쉽게 대상화하거나 재단하는 대신, 그들의 고유한 이야기들을 길어올린다. 그들을 동정하거나, 폄훼하는 대신 제한된 조건 아래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망고와 수류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은 오키나와의 주민들에 대한 생활사 조사 과정을 중심에 두고, '어떻게 조사할 것인가?'를 물었던 흔적들이 담겨 있다.
오키나와는 한 때는 별개의 국가였으나 19세기 일본 제국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인해 무력으로 점령당하고, 태평양전쟁의 주요 전장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미군 점령지로서 존재하다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다시 일본의 일부로 '반환'된 독특한 역사를 지닌다. 이 역사는 이곳에 거주했던 혹은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의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영구히 바꿔놓았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일본 본토의 사람들과는 다른 '결'이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사회학자가 만날 수 있는 건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역사와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독특한 사람들 각자일 뿐이다. 개인의 이야기로 사회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사회학자들이 '사회'라는 대상을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일반적인 건 설문조사와 통계를 통한 대규모 사회조사다. 체계화된 질문들로 이루어진 설문조사와 이를 통해 얻은 수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통계로 드러나는 집단적인 행동을 분석하고 그 동기와 의도를 묻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양적조사'의 필요성을 부정하거나 폄하해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만나는 개인들이 다양한 데이터의 조합으로 분해되고 재조립되는 과정만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충분하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평균' 그 자체인 인간은 없고, 우리는 저마다 독특하고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점차 더 많이 분석되고 노출되는 상황은 인간을 '숫자들의 조합'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고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반대로, 사회학의 양적조사에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개인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거시적인 시선이 지나칠 수 있는 개인들의 고유한 경험이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칫 그 경험들을 절대화하는 바람에 우리가 함께 경험하는 사회적 사실이란 없다는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고유한 시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경험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조차 무시할 수는 없다. 개인의 고유한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타당성' 검증을 방어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것은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고민하기를 멈추는 지적 불성실일 수도 있다.
자료화와 소설화 사이에서 한 개인의 경험은 어떻게 역사와 사회 구조를 비춰주는 작은 거울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기시 마사히코가 찾으려는 좁은 회랑이다. 「망고와 수류탄」에서 그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긴 과정을 설명하며 이 논의를 시작한다. 그가 만난 구술자는 오키나와 집단 자결 사건의 생존자다. 1945년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미군이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 제도에 상륙을 감행해 성공하자, 당시 오키나와를 방어하던 일본군은 집단 자결을 택했다. 그리고 동시에 오키나와에 살고 있던 거주민들 (조선인 노동자를 포함한다)에게도 집단 자결을 요구했다. 1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과 3만 여 명의 군인이 무의미한 명령을 강제로 따라야 했다. 구술자에게도 자결을 위한 수류탄이 손에 쥐어졌다. 불발탄이었다. 강제로 터트려야 하나 고민하던 때, 그녀의 어머니는 수류탄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도망친다.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가족을 잃고, 굶주림에 시달리지만 끝내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70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저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망고를 내놓으면서.
저자는 망고를 먹으며 생각한다. 손에 든 것이 수류탄에서 망고로 뒤바뀌는 긴 시간 동안, 이야기는 만들어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비록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혹은 강렬했던 인상과 그에 비례하는 흐릿한 디테일 때문에 이야기에는 몇 가지 착오들이 들러붙었지만 말이다. 저자는 이 오류들이 오히려 이야기의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본다. 착각, 생략, 과장, 애매한 표현은 "구술자가 그 자신과 역사와*[역사'의'의 오타일까?] 사이에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게"(193) 해주는 역사적 자료다. 「조정과 개입」에서 저자는 이야기란 조사 대상자와 조사자의 상호작용으로 인해서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고, 그것의 타당성은 이러한 오류들을 검증하고, 조정하는 (때로는 조사자의 이론을 수정해 가면서라도) 방법을 통해서 확보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구술자의 '소리'를 '자료'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질적조사라고 해도 피할 수 없다. 외부의 시선, 경험의 교차 검증 등의 조정과 개입이 이야기를 비로소 가치 있는 역사적 진술로 만들어낸다.
물론 사회학자도 마찬가지지만, 시사교양PD도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냥 그 사람의 주장이 그렇다는 겁니다'는 것만큼 게으른 것도 없다. (아쉽게도 많은 저널리스트들은 '발언 자체는 사실이 아니냐'는 태도로 자신의 불성실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 때 필요한 것은 '평가자'의 태도가 아니라 '공동작업자'의 태도다. 자기 자신의 접근 방법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겸손한 태도 말이다. "이야기가 태어나는 순간은 질량과 크기가 없는 단순한 점이 아니다. 그 순간에는 무게도 길이도 있다. 생활사 구술청취조사에는 사실, 최초의 질문을 하기까지 길고 긴 도움닫기가 필요하다."(45) 이야기는 구술자에게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조사자와의 만남이라는 과정을 통해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조사자가 구술자에게 취하는 태도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결정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상호작용'일 것이다. (PD가 취재하러 가서 내가 필요한 문장만 취해서 잘라붙이려고 해서야 될 리가 있겠느냔 말이다...)
「인용부 벗기기」는 사회학의 조사 대상이 되는 '사회문제'를 '없다'고 말하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다각도로 고민하면서, 앞서의 논의를 심화시킨다. 조사자가 보기엔 차별과 같은 사회문제로 인해 불이익을 받고 있는데, 정작 조사 대상자가 나는 그런 걸 겪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사회문제는 실재하므로 조사 대상자가 사회문제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가정해야 할까, 아니면 경험을 존중해야 하므로 사회문제같은 건 없다고 가정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제3의 길, 사회문제의 실재 여부보다 경험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그 형식들에 집중해야 할까? 저자는 앞의 두 가지 극단적 방법도, 제3의 길의 상대주의도 온당하지 않다고 본다. 분명한 건 사회학자는 이야기와 실재의 연결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거다.
"이유를 모르는 것에 이유를 찾는 것이 사회학이 하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합리성을 한 번 더 기술하기 위해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기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와 실재의 연결성을 되돌리고 이야기에서 인용부를 벗기는 것이 필요하다."(106-107)
행위자의 무능함을 강조하거나, 사회문제의 문제성을 소멸시키거나, 아예 이야기를 실재와 별개의 것으로 다루지 않고, 대신에 "우리가 그 자리에서 우리들 자신의 논리와 해석에 변형을 더하여 대화 상대의 합리성과 신념의 올바름을 유지하는 것도 틀림없이 가능하다"(101)고 말한다. 이야기의 공동작업자로서, 그의 이야기를 실재와 단단하게 결박할 수 있도록 조사자가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조냐 개인이냐의 오래된 논쟁에서 실재를 버리지 않는 '인간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저자의 길이다.
「바다와 밀가루」에서는 구술조사의 특징으로서 시간 중첩성과 즉흥성을 이야기한다. 구술자에게 아무리 많이 준비를 시킨다고 해도, 이야기의 흐름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일목요연한 정리가 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쏟아내는 이야기들엔 다양한 시간대가 중첩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혼돈의 상태에 가깝고, 오류들이 잦다. 애초에 작은 단서나 자극으로부터 시작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이야기는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이야기를 풀어내도록 만드는 작은 디테일들이, 이야기가 탄생하는 계기는 아닐까? 가령 그가 인용하는 구술자의 이야기는 TV 중계방송을 보다 한자를 착각한 사건을 중심으로 여러 사건들이 꿰어진다. 오키나와 전투 이후 굶주림을 견디던 구술자는 바다로부터 흘러내려온 미국산 밀가루 포대(메리켄) 덕분에 굶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밀가루는 어디서 왔을까. TV 중계방송에서 류큐대의 한자를 잘못 보았던 사건을 꺼내면서, TV에서 보았던 카미카제 특공대 다큐멘터리의 시청 경험이 갑작스럽게 풀려난다. 거기서 특공대의 자폭공격에 미국의 함선이 침몰했고, 그 배에서 흘러나온 밀가루가 자신이 먹었던 '메리켄'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경험이 동시에 풀려나온다.
사건은 일회적이지 않고, 사건의 자리인 사람을 때때로 폭력적으로 엄습한다. 똑같은 오늘을 살아도 작은 단초로부터 풀려나오는 거대한 과거의 기억들이 각자에게 고유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오카 마리가『기억·서사』에서 "사람이 무언가를 '떠올린다'고 할 때 '사람'이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에게 도래하는 것이라는 사실"(오카 마리, 29)이라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 사건의 주체가 아니라, 사건이 인간을 영유한다. 생활사 조사자들이 포착해야 하는 것은 이 사건이 빚어낸 인간을 해명할 수 있는 중첩된 순간이다. 그것이 비록 오류와 애매함으로 가득할지라도 말이다. 이어지는 「푸딩과 사슴벌레」에서 이 중첩된 순간은 '디테일'이라는 말로서 좀 더 명료하게 설명된다. 대부분의 데이터 수집 과정에서 무시되고 잘려나가지만, 분명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디테일은 과거가 들이닥치는 작은 구멍, 즉 '계류점'繫留점이다. "기묘할 정도로 구체적인 디테일은 거꾸로 그 실재성을 전한다."(151)
「폭음 아래에 산다는 것」에서는 인간의 선택이 얼마나 다양한 조건과 제약 아래에서 이루어지며, 타인의 선택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함부로 평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고, 「담배와 코코아」에선 더 나아가 사람에 대한 상투적인 이해, 전형을 만들어놓고 그에 맞추어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알 수 있다. 모든 장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구체적인 얼굴을 한 인간을 이해하는 이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그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을 '연대'라고 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회학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이런 생각들을 조금 더 일찍 오래 접했다면, 나는 공부의 방향을 바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체적인 인간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것을 자부심의 근거로 삼는 시사교양이라는 장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 더 나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덮는다. 『더 단단한 질적 연구를 위한 안내서』를 옆에 가져다 놓으면서.
"'인간에 관한 이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상황에 있다면 그런 행위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이해', 또한 그런 상황에서 한 그 행동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해'의 집합이다."(293)
아래는 글을 쓰며 다시 거들떠본 책들.
기시 마사히코, 김경원 옮김,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위즈덤하우스, 2016.
기시 마사히코, 정세경 옮김, 『망고와 수류탄: 생활사 이론』, 두번째테제, 2021.
오카 마리, 김병구 옮김, 『기억·서사』, 소명출판, 2004.
피터 L. 버거, 김광기 옮김, 『사회학으로의 초대: 인간주의적 시각』, 문예출판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