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하경, 『불온한 공익』(2024)
이번 주는 책상 위에 쌓은 책들이 많았다. 지금도 비비언 고닉의 두툼한 책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성원 옮김, 오월의 봄, 2024)을 읽는 중이고, 금요일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2024)도 새 번역으로 나와서 급하게 주문해 받아들었다. 새로 시작할 책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한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도 두께에 비해 읽기에 까다로워 한 주 내내 들고 있고, 아직 펼쳐보진 못했지만 스튜어트 홀의 『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코바나 머서 엮음, 임영호 옮김, 컬쳐룩, 2024), 최정규의 『우리 곁에 있어야 할 법 이야기』(철수와영희, 2024)도 대기중이다. '출판계의 빛과 소금', 적독가의 책상이란 그런 것이다. 널브러져 있는 책들 중에 무엇에 대해 쓸까 고민하다가, 류하경의 『불온한 공익』(한겨레출판, 2024)을 집어들었다.
'공익'의 경계를 밀고 당겨온 사람들과 함께 투쟁해 온 변호사의 에세이다. '스쿨미투' 후속 조치 결과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피해나가려는 서울시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 비례위성정당에 대한 헌법소원 등 공권력을 대상으로 한 사건들부터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쟁의행위가 '시끄럽다'고 고소한 대학생에 맞서 청소노동자의 편에서 변론을 담당했던 사건, 갑질로 경비 노동자를 자살하게 만든 입주민을 상대로 한 민사 소송같은 사인간의 사건, 로스쿨 제도의 문제점과 같이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사익'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고민까지 빼곡하게 담겨있다.
다양한 사건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공익'과 '사익'의 관계, 조금 더 간명하게 말하면 '공익'의 경계다. 어떠한 사익은 공익이 되고, 어떠한 사익은 공익이 되지 못하는가? 그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익'이라는 개념은 '사회적약자의 사익중 현재의 공동체 다수가 위험하지 않다고 보아 그 추구 행위를 허용하는 사익'이다."(6)라고 조금은 냉소적으로 주장을 개진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익'의 경계가 매우 가변적이고, 충분히 '공익'으로 여겨질 수 있는 '사익'들을 효과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철저하게 동원하기 때문이다.
'공익'의 경계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 첨예한 건, 공익의 경계가 반드시 '시민'의 경계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를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여부와 그들의 이익을 공익의 구성요소로 볼 것이냐의 여부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애초에 다양한 사익들 가운데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것이 공익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 것이니, '우리 모두'의 경계가 공익의 인증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경계는 사회의 근간을 결정한다. '공익'은 사회가 무엇에 기초하여 굴러가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인 것이다.
'공익'의 문제를 다룰 땐 언제나 '시민'의 범위가 문제가 된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치적인 권리를 지니는 주체로서 '시민'의 범위는 살아 숨쉬는 '인간'의 범위보다 언제나 좁다. 어떤 인간은 시민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권리도 묵살당한다. 그들의 요구는 시민이 내는 목소리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사회를 어지럽히는 소음으로 여겨진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대표 박경석의 『출근길 지하철』(위즈덤하우스, 2024)가 '시민이 되게 해달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을 떠올려 보라. 출근길 지하철 탑승 투쟁을 두고 그들과 시민을 가르는 헤드라인을 보라. 헤드라인 안에서 전장연은 시민으로부터 분리되고, 그들의 이익은 공익으로부터 구별된다.
사회적약자를 '시민'으로부터 구별해내기 위해서라면 진실이 아니어도 활용할 수 있다. 2009년 철도노조가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에 반대해 벌인 파업 때문에 '서울대학교 응시생이 면접에 늦어 불합격했다'는 뉴스가 한 중앙 일간지에 실렸고, 다른 주요 언론사들에서 그 뉴스를 받아 썼다. 죄 없는 학생은 공익을 대변했고, 철도노조의 이익은 선량한 시민의 공익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분리되었다. 물론 한참이 지난 후에 사실관계가 잘못되어 기사가 삭제되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약자들의 '이익'을 공익과 분리해내는 기술은 유구하고, 성공률도 높다.
사회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들이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사익'이 '공익'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우리는 보통 사회의 변화를 잘 원하지 않는다. 적어도 자신이 그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적약자들의 요구가 '사익'인 동시에 '공익'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요구사항이 우리의 요구사항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역마다 설치하고, 탑승도우미를 배치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요구사항이 될 수 없는가? '우리'도 다치고 늙으며, 그들도 친구를 만나러 혹은 일하러 가고 싶다. 그들의 사익은 곧 '우리'의 사익이기도 하다. 성소수자들이 가족을 형성하고 구성원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대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우리'의 요구가 될 수 없는가? 결혼 이외의 시민결합이 과연 '우리'의 사익을 증진시키진 않는가?
노동자가 노조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는 어떤가? 저임금과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권리는 아닌가? 전문 통역사를 대동하고 난민 심사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는 어떤가? '우리'가 불가피하게 고국을 떠나야 할 때 필요로 하는 요구는 아닌가? '우리'는 불변하는가? '우리'의 처지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의 사익 증진이 '우리'의 사익 증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어째서 그것은 '공익'이 아닌가? 사회 속 자기의 위치, 지위, 수준이 완고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지 않다면, 사회적 약자들의 사익이란 결국 공익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저자가 싸우는 전장이 바로 여기다.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의 이익이 곧 사회의 이익임을 강변한다. 권력을 가진 이들도 자신의 이익이 곧 '사회'의 이익이라 선전한다. 말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한다. 말로 설득하기 어려우면 악을 쓴다. 사회의 근간을 두고 벌이는 싸움이 '젠틀'하긴 어렵다. '누가 그것을 공익이라고/공익이 아니라고 결정하는가?'를 두고 벌이는 주도권 싸움의 파열음은 거칠다. 그들은 때때로 법을 위반한다. 알고서 그럴 때도 있고, 모르고 그럴 때도 있다. 때로는 법 자체가, 법의 해석이 사회의 권력구조의 일부이기도 하다. 변호사로서 때때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는 법이 만들어내는 힘을 믿는다. 법이 제대로 만들어지거나 해석된다면 법이 사회적약자들이 기대는 최후의 보루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시작하는 문장의 냉소는 짧고, 치열한 전투에 대한 헌신은 길다.
모든 문제를 법원에 가져다 바치는 '정치의 사법화'는 경계해야 하지만, 법은 때로는 이미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국가나 대기업, 그리고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멋대로 짓누르는 사람들에 대해 사회적약자가 기댈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불리하면 도망갈 수 있는 인터넷 '키배'가 아니라, 어떻게든 결론을 내기 위해 전력으로 맞서야 하는 법정은 더 이상 약자들의 악다구니를 '소음'이 아닌 '말'로서 대하게 만드는 장소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쉬운 길은 아니고, 애초에 너무나 복잡하기에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유리한 전장에서 균형을 이끌어내기 위한 헌신적인 변호사들이 필요한 이유다. 먹고 살기 조금 팍팍해지고, 심지어 '같은 편'에게 욕도 먹고, 의뢰인들에게 실망스러운 반응을 듣기도 하지만, 그가 여전히 버티는 이유다. 현실적인 이유로 권력의 편에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모순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저자는 자신이 대변하는 사람들을 '이상적인'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그러한 믿음은 어떤 순간엔 일에 큰 동력을 가지고 오지만, 상당한 경우엔 허탈감으로 이어진다. 진실과 정의, 역사가 우리의 편이라는 믿음이 강할수록 회의감으로 인한 '변절'도 강하다. 오히려 그들도 오류가 있고, 그들도 때로 우악스러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면 기꺼이 그들의 편에 설 수 있다는 생각이 연대를 더 오래 끌고 가는 동력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가 다양한 싸움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건 역사의 진실을 담보하는 계급의 형성 같은 거대한 무언가라기보다, 싸움의 순간 불현듯 형성되는 공통감각인지도 모른다. 이기적인 사익으로 애써 구별해내려는 권력자들의 말과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공익'에 대한 의문이 거대한 공사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조금 더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사법 영역이 정치-경제 권력을 가진 자들로부터 얼마만큼 독립되어 있는지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중립적인 사법제도의 빈틈을 노려 유리하게 활용하는 '법꾸라지'들이라기보다는, 아예 그 제도 자체와 불가분의 상태로 융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 내가 있는 언론사도 다를 게 뭐냐...?)
힘이 없는 자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대우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모두를 억누르는 부당한 대우를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의 사익 속에서 우리 전체의 이익을 떠올릴 수 있다. '과도한 요구'의 단면 속에서 우리를 짓누르는 부당한 요구를 철폐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파편처럼 흩어진 사람들의 요구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투생 루베르튀르가 그러했듯이)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발휘하는 힘을 발견하는 것. 영원히 지는 '일대일'의 싸움을 '집단'의 싸움으로 전환해내는 매개가 되는 것. 그것이 그가 거리에 서 있는 이유고, 급진적, 전위적인 요구에 뒤따르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멈출 수 없다는 그의 길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