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세 권의 책
오카 마리의 『가자란 무엇인가』(김상운 옮김, 두번째테제, 2024), 질베르 아슈카르의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팔레스타인 평화 연대 옮김, 리시올, 2024), 일란 파페의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백선 옮김, 틈새책방, 2024)를 읽었다. 그저께 보도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체포 영장 발부 소식이 계기였다. 사 놓고 읽지 못했던 책들을 급히 훑었다. (책장 어딘가에서 사라져버린 아테프 아부 사이프의 『집단학살 일기
』(백소하 옮김, 두번째테제, 2024)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책 내용에 대한 비판적 평가라보다는, 책을 읽으며 떠오른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했다.
2024년 11월 21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국제형사재판소(ICC)로부터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받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오마르 알 바시르, 무아마르 카다피에 이어 네 번째로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 영장을 받은 국가 지도자다. 체포영장을 청구한 지 6개월만의 일이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네타냐후 외에도 갈란트 국방장관과 이슬람 저항 운동(하마스)의 지도자 무함마드 데이프 외 2명에게도 함께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그의 혐의는 2023년 10월 7일에 일어난 하마스의 '알아크사 홍수 작전'에 대한 보복 조치인 '철검 작전', 그리고 이어진 1년 간의 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하마스는 10월 7일 오전 기습적으로 이스라엘 영토에 침투했다. 다수의 로켓포와 중장비로 방벽을 돌파해, 군사 기지와 정착촌을 점령했다. 근처에서 발생한 음악 축제에 참여했던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 1,000명이 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망했고, 200명 넘는 인질이 발생했다. 네타냐후가 이끄는 이스라엘 정부는 즉각 보복에 나섰다. 가자지구 전역에 공습이 이루어졌다. 병원, 학교, 언론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경 봉쇄로 가자지구는 연료와 물, 식량이 동이 났다. 직접적인 폭격과 총격 외에도 굶주림, 질병, 부상 후유증으로 사람들이 죽었다. 413일이 지난 오늘, 4만 명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이 이 전쟁의 여파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네탸냐후에 대한 영장 발부를 결정한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부는 그 이유로 "[네타냐후 총리와 갈란트 전 국방장관]두 사람이 가자지구 민간인에게 식량, 물, 의약품, 연료, 전기 등 생존에 필수적인 물건을 고의로 박탈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조문희,「ICC,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체포영장 발부」, 『경향신문』, 2024.11.21.) 물론 국제사법재판소는 강제로 범죄자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에 실제로 영장이 집행될 가능성은 낮다. 심지어 네타냐후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다른 조 바이든 정부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의 결정을 "터무니없는 일"라고 깎아내렸다.(박병수, 「ICC, 네타냐후 체포영장 발부...유럽 "지지" 미국 "터무니없어"」,『한겨레』, 2024.11.22.)
앞으로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하기도 어렵다. 바이든의 후임으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2018년, 이스라엘 건국 70주년을 맞이해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했다.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원래 팔레스타인 영토인 동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일방적으로 합병한 후 어떤 국가도 예루살렘 전역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트럼프가 이를 처음으로 뒤집은 것이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빠르게 주이스라엘 대사로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를 지명하며, 임기 시작 전부터 이스라엘(그리고 네타냐후)에 대한 지지를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다.(김휘원, 「트럼프, 주이스라엘 대사 허커비 지명... 네타냐후가 웃는다」, 『조선일보』, 2024.11.13.)
강력한 우군을 얻은 네타냐후가 가자와 서안에서 어떤 일들을 벌일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10월 7일은 가자 재정복의 정치적 조건―네타냐후가 오랫동안 갈망했으나 너무 무모했고 공개적으로 논의에 부칠 수가 없을 정도로 도가 지나쳤던―을 창출했다."(『이스라엘의 가자 학살』, 41) 질베르 아슈카르가 이번 전쟁이 이전과 달리 끔찍한 집단 학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긴급하게 대응한 것이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이고, 오카 마리의 긴급 강연회 원고가 『가자란 무엇인가』다. 두 권이 긴급한 정세적 개입의 흔적이라면, 일란 파페의 책은 그보다는 이른 2017년에 저술된 학술서다. 다만 한국에서는 모두 올해에 출간되었고 이는 어쩌면 참혹한 전쟁의 결과 앞에 비교적 조용한 한국의 시민사회에 (다른 의미에서) 긴급히 개입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이번 전쟁으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전쟁 때 고향에서 추방당한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또 한 번의 대재앙, '나크바'의 위험 앞에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잔혹한 폭력에 마치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로 논쟁의 장에 불려나온다. "미국 등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아닌 '평화 과정'에 임할 동등한 책임이 있는 두 당사자로 호명된다."(덩야핑, 「옮긴이 해제」,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 97) 특히 하마스와 같은 무장 독립 운동 단체를 지지하는 것이 그들의 '원죄'를 구성한다. 팔레스타인 땅엔 오직 두 개의 비교 불가능한 '야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가?
"정착촌과 파괴된 집들, 봉쇄용 바리케이드는 자살폭탄범에 앞서 존재했던 것이지만, 그것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에 존재했던 것은 아닌 것처럼, 자살폭탄범 또한 처음부터 거기에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사라 로이, 「홀로코스트와 함께 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아이들의 여정, 『가자란 무엇인가』, 171) 물론 외부인의 입장에서 하마스가 작년 10월에 벌인 민간인에 대한 전쟁범죄를 무조건 옹호할 순 없다. 그러나 동시에 대항폭력의 '맥락'을 이해할 순 있다. 하마스의 행위를, 선후관계가 모호한 '연쇄' 속에 집어넣는 건 팔레스타인 문제에 놓여 있는 역사적 맥락을 거세하는 일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려면, 바로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곳인 '이스라엘'이란 무엇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수 차례의 전쟁에 걸쳐 탄생한 '유대인의 나라'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가? 왜 팔레스타인에서 끔찍한 인종 청소가 수차례 자행되고 있고 누가 침묵하는가? 이 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안토니우스 구테흐스 UN 사무총장은 왜 "하마스의 공격이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임병선, 「유엔 총장 "하마스 공격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것 아니다" 이스라엘 "끔직한 견해"」, 『서울신문』, 2023.10.25.)고 말했는가? 폭력의 '연쇄'는 10월 7일에 발명된 것이 아니다.
"역사는 10월 7일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앞서 이스라엘에 의한 인종청소와 오래 누적된 점령과 봉쇄와 아파르트헤이트 폭력의 역사가 있으며, 그 폭력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80년 가까이 인권을 부정당하고, 기본적 자유를 빼앗기고, 인간성을 억압당해 왔습니다."(『가자란 무엇인가』, 8)
세 권의 책은 각각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오카 마리), 10월 7일 이후의 급박한 정세와 앞으로의 전망(질베르 아슈카르),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신화의 근원과 이에 대한 역사적 반박(일란 파페)을 다루면서,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시작을 다룬다. 그 훌륭한 설명들을 더욱 짧게 줄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홀로코스트와 관계가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럽의 반유대주의의 결과에 대한 대가를 부당하게 대신 지불해 온 시간. 오렌지와 올리브, 딸기로 가득한 기름진 이 땅엔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정착자들의 식민지 점령과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인종 청소, 그리고 자행되는 비극에 대한 과거 식민지 모국의 위선적인 침묵이 단단하게 결합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자. 1894년 프랑스의 군인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는 국가기밀 누설죄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부당한 스파이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각하지도 못한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재판 내내 차별 대우를 받는다. 이 사건은 자유-평등-박애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반유대주의가 온존한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서구 사회로 동화되었다고―종교를 바꾸고 거주지를 벗어나는 것―믿었으나, 끝내 실패했음을 깨달은 유대계 지식인들 사이에선 '시오니즘'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유대인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 새로운 조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896년 드레퓌스 사건을 목격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 국가』를 집필하고 시오니즘의 정치적 지도자가 된다.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성지,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이 그들의 약속의 땅이라 믿었다. 그곳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최종 해법이라고 말이다. 문제는 그곳이 세 종교의 성지이자, 오랜 시간 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에서 아랍인들의 땅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면, 힘을 지닌 열강, 그 지역에 영향력을 발휘할 동기가 있는 유럽 국가를 찾아야 했다.
영국 정부에겐 명확한 동기가 있었다. 기독교 성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적국인 오스만의 중동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제국주의의 전초기지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영국이 아닌 곳에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해 그곳으로 유대인을 보낼 수 있다면 동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밀려들어오는 유대인 난민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동시에 시오니즘에 공감하는 국민들에 대한 정치적 지지도 확보할 기회였다. 이에 영국은 19세기 중순부터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유대인들의 이주를 비공식적으로 격려하며 차근차근 식민지 확보를 준비했다. "시온주의는 한마디로 팔레스타인을 식민지화하여 그 자리에 유대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운동이었다."(『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66)
공들인 대가로, 1차 대전이 끝나고 패전국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중동 지역을 '위임통치령'이라는 이름으로 빼앗아 식민 통치를 시작한다. 이미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밸푸어 선언을 이행하기로 결정한 영국은, 원래 거주하는 아랍인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차별 대우와 박해를 시작한다. 동시에 자기들만의 응집된 문화를 가진 아랍인, 기독교인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한 줌의 유대인으로 '조국'을 건설하기란 난망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제 한 때 자신들의 정착을 돕고,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던 그들을 '사람이 아닌 존재'로 격하시키는 "인간성 말살의 논리"(『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113)가 필요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은 유럽의 정착 식민지 개척 과정의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였다. 북미 대륙에서 이루어진 원주민 학살,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루어진 착취와 노예 수급과 비슷한 식민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간기와 2차 대전 기간 동안 원주민들은 탄압에 맞서 끈질기게 자신들의 권리와 존엄을 요구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이 위임 통치를 종료하겠다는 방침을 정하자, 유엔은 이곳에 건국될 국가의 형태를 결정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 1947년, 총회에 제출된 특별위원회의 보고서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할안과 유태인-아랍인의 연방 국가안이 동시에 담겼다.
분할안은 초기 팔레스타인 원주민과 유대인 정착민들 모두에게서 불만을 샀다. 인구의 2/3을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 국가에 영토가 50-60% 가까이 할당되고 풍부한 자원이 있는 해안선의 상당수도 내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유대인 정착민들 역시 불만을 드러냈다.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했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아랍인들이 유대 국가의 구성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건국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던 정착민들은 분할안으로 기울었고, 그해 말인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통과되었다. 정착민들에게는 이제 시작이었다. 배타적인 민족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필요했다.
크고 작은 집단 학살이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유엔 결의안이 통과된 후 이스라엘의 건국 전쟁(제1차 중동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마무리될 때까지 이어졌다. 영국의 위임 통치가 종료된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인 다비드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의 '최소화'를 목표로 한 전쟁을 개시한다. "이전의 모든 정착 식민 운동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학살과 비인간화라는 쌍둥이 논리였다. 정착민의 토지 소유권을 7퍼센트 이상으로 확대하고, 배타적으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려면 원주민을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시온주의는 정착 식민주의 프로젝트이자 아직 완성되지 않은 프로젝트다."(『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126)
이스라엘의 건국 초기는 위태로웠지만 국제사회의 강력한 후원자인 미국(그리고 건국 당시로 한정하면 소련까지)의 도움을 받아 차례차례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팔레스타인 지역 내의 통제권도 강화했다. 요르단과 이집트, 시리아가 점령하고 있던 서안 지구, 가자 지구, 골란고원,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에 점령되었고 이 중 시나이 반도를 제외한 지역은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이 현재까지 점령중이다. ('자치'라는 명칭 때문에 혼동하지만, 한 번도 이스라엘은 점령지역에서 철수한 적이 없다.) 고향을 잃고 쫓겨난 난민들은 1960년대 이후 국제 사회가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조국 해방을 위한 움직임에 나선다. 야세르 아라파트를 수장으로 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1964), 지금은 온건 노선으로 전환한 파타(1965),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1967)과 같은 무장단체들이 결성된 것이다.
평화적인 해법을 모색하지 않은 건 아니다. 1987년엔 1차 인티파다 운동을 벌였고, 1993년과 1995년엔 무장 투쟁 노선을 포기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이스라엘과 오슬로 협정을 체결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설립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1차 인티파다 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그로 인한 반감이 이슬람주의에 근거한 팔레스타인 해방을 주도하는 하마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오슬로 협정은 양측 모두에게 불만스러운 결과로 남았다. 협정 당사자인 라빈은 그해 암살당했고, 이후 집권한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어진 2차 인티파다에 대한 강경진압과 정착촌 늘리기를 통한 '점령'을 이어나갔다. 무력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반감은 2006년 팔레스타인 입법평의회 선거에서 강경 투쟁파인 하마스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로 나아갔다.
무력을 갖춘 하마스가 가자지구에서 집권하면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는 더욱 엄격해졌다. 식료품이 부족하고 의약품이 동이났다. 각종 기반 시설은 망가졌지만 복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어 청년들이 빈곤과 마약에 시달린다. 빈약한 영양상태와 인도적 지원에 의존하는 원조 경제는 가자지구를 사실상 지붕이 없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야외 감옥으로 만들고 있다. 살아 있지만 단지 죽을 수 없을 정도로만 삶을 연명시키고 있어 살아 있을 뿐인 상태가 2007년 이후 무려 16년 가까이 이어졌다. 이것이 한 때 하마스와 등을 졌던 팔레스타인의 다양한 저항단체들이 함께 손을 잡고 긴 시간에 걸친 침투 작전을 준비하게 된 이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절망적인 시도 앞에서 '양비론'을 꺼내들고 침묵과 망각을 준비하고 있다.
오카 마리는 이런 맥락에서 하마스의 비인도적인 전쟁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점령군인 이스라엘군에 대한 저항으로서 국제법상 인정되는 저항권 행사"(『가자란 무엇인가』, 93)로서 이해한다. 바다에서의 조업도 차단하고, 하수 처리 시설을 가동하지 않아 피부병에 시달리고, 간단한 약조차 없어서 병상에서 사람이 죽어가며, 정전과 홍수에 시달리도록 옥죄는 이스라엘의 전략을 사이 하나피라의 말을 빌어 '스페이시오사이드Spaciocide'라고 부른다. "전쟁처럼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더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모조리 짓밟아 버림으로써 그들이 그곳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것"(같은 책, 106)이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안전한 곳에 물러나 양비론을 읊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편에 서기를 망설이지 않고 전쟁을 그만두도록 압박하는 일이라는 게 오카 마리의 결론이다.
질베르 아슈카르 역시 "야만은 정의상 그 자체로 언제나 부당하다. 그렇더라도 두 종류의 야만이 충돌할 때 억압자로 행동하는 강자의 책임이 더 크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이스라엘의 가자 학살』,27)고 주장한다. 하마스의 저항은 전 세계 반식민 해방 운동과 궤를 같이한다고 본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격이 "종교적 유형의 마법적 사고 방식"(같은 책, 17)이 초래한 대책 없는 공격이며, 이로 인한 희생이 이스라엘이 치를 희생에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닌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건 1차 인티파다 운동과 같은 비폭력 대중 투쟁과 같이 "힘의 우위를 우회할 수 있는 영역을 선택하는 것"(같은 책, 18)이다. 이러한 투쟁으로 이스라엘과 1세계 국가들 정치 영역 내부의 압력을 늘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일란 파페의 책은 급박한 정세에 대응하는 책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행하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제공하는 책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행하는 인종 청소와 같은 행위는 식민지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흔적을 영구적으로 삭제하기 위한 과정에서 벌어지는 길이며, 아직 완전히 달성된 목표가 아니기에 여전히 "분쟁의 불을 지피는 주요 연료"(『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300)로 남아있다고 본다. 또한 북미, 남아프리카, 호주에서 벌어진 식민주의, 즉 '정착 식민주의'의 한 사례로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식민지화하고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다양한 '신화'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저자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이스라엘의 식민주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에 기반한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데에서 시작함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책이 출간된 시기, 목적,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 말하기 방식, 원고의 형태, 다루는 대상, 접근 방식, 역사적 배경과 자신이 처한 위치가 서로 다르기에, 같은 사안을 설명하면서도 방점이 서로 조금씩 다른 곳에 찍힌다. 이 잔인한 역사의 발단이 된 영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언급하는 수준, 식민 모국의 정치적-경제적 욕망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서로는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컬럼 연재, 대중 강연의 필연적인 한계들, 비폭력 저항이라는 환상에 대한 호의적 태도,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대안에 그치는 결말 등 각 책마다 아쉬운 부분들은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책 모두 팔레스타인 문제가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의 결과물로서 발생하였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우리 시대의 당면 과제라는 점, 인종 청소가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 침묵한 채로는 우리는 부자유할 수밖에 없다는 점,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하며 끔찍한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는 태도가 요구된다는 점을 공통으로 지적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제 과제는 독자의 것이다. 제1세계의 '말석'에 자리해 있으면서 동시에 피식민자로서 억압받은 역사가 있는 나라의 인민으로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사태의 중대성과 핵심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미디어 산업의 종사자로서 어떻게 동료들과 함께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개인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 시민 사회의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그것들에 나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즉 "우리가 우리의 투쟁을 제대로 하는 것도 팔레스테인과 연대하는 것으로 이어"(『가자란 무엇인가』, 206)진다고 할 때, 무엇이 '제대로' 된 투쟁인 것일까?
뾰족한 답은 없고, 단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쓰고 말하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으니 나는 판단하지 않겠다고 물러서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말고,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의욕적으로 찾아서 끝내 판단하겠다고 나서는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사태에 대해 다루는 책이 동시에 여럿 쏟아져 나왔다는 건 출판계 입장에선 복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긴박하게 대결해야 할 절박한 문제가 우리 앞에서 입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이 문제에 있어서 더는 조용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초조함이 있다. 그런 초조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길 빈다.